소설리스트

〈 27화 〉27화 (27/44)



〈 27화 〉27화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당당히 들어오는 걸음걸이는 마음에 든다. 그녀는 가장 상석에 있는 나를 보고선 눈이 잠깐 휘둥그레졌다.

릴리아는 방금 들어온 여자에게 사무적으로 말했다.

“최대한 간략하게 자기소개를 했으면 좋겠네요.”
“네!”

여자는 잠시 목을 가다듬은 후에 차분하게 말했다.

“김세희입니다. 사회복지를 전공해서 자신 있는 분야입니다.”
“방금 남자도 그런 말을 했었죠. A대학교라 하던데, 당신도 같은 출신인가요?”

릴리아는 가늘게 뜬 눈으로 물었다.
내가 방금 전 남자를 내보냈으니 릴리아의 머릿속에서 A대학교의 수준은 어떤지 태도를 보면   있다.

“아~ 저는 한국대학교 출신이에요. 졸업까지 했죠. 저쪽에 계신 분은 아마 어딘지 알거라 생각하는데...”

김세희는 곁눈질로 나를 가리키며 말을 흐렸다. 그 태도에 릴리아의 눈이 잠깐 찡그려졌고, 김세희가 살짝 움츠러들었다.

명문대학교 출신이네.
나는 그제야 김세희를 다시 쳐다보게 되었다.
자세히 보니 예쁘장한 얼굴이 눈에 띈다. 내가 그녀를 뜯어보고 있을 때 릴리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는 그곳이 어딘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당신이  수 있는 일만 간단히 설명하세요.”
“아, 네...”

여기엔 나와 릴리아를 제외하고도 몇몇의 복지부 인사들이 있었다. 마커스라던가 라이먼 백작의 부관이었던 사람 등.

김세희는 자신감을 되찾고 그들을 상대로 능숙하게 자신을 홍보했다. 간간히 나를 쳐다볼 때는 눈동자가 일렁이는 듯했다.
얼마 안지나 질문이 쏟아졌다.

“그럼 제국의 복지는 미개한 수준이라는 거요?”
“아뇨. 아예 복지라는 개념이 없는 수준이에요. 앞으로도 지금처럼 운영한다면 돈을 퍼다 주는 꼴 밖에 안돼요.”
“그러면  방법도 있는 거겠지?”
“당연하죠. 제가 들어온다면 적어도 지금보다 몇 배는 상황이 나아질 거예요.”
“그 방법이라는  지금 들어봐도 되나요?”

마커스가 호기심이 깃든 어조로 끼어들었다. 마커스 뿐만 아니라 다른 자들도 궁금하다는 눈치였다.

“음... 그건 제가 일을 하게 되면 말씀드릴게요.”

김세희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이곤  잘라서 대답했다. 그러고 나서 좌중을  한번 둘러보고 나를 쳐다봤다.
 태도가 마치 자신을 뽑으라는 시위로 보였다.

“쯧, 말만 번지르르  여자였군!”

누군가가 그렇게 평가했다.
김세희는 그 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올곧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백작각하를 대하실 땐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봐서는 안 됩니다.”
“헉! 죄송합니댜악!”

릴리아의 경고에, 김세희는 혀까지 씹을 정도로 놀래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나를 조심스럽게 흘끔거렸다.
김세희는 나지막하게 릴리아에게 물었다. 목소리와는 다르게 눈동자가 짙게 일렁이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저분이 백작각하세요..?”

릴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얼굴을 찡그리며 일갈했다.

“그게 무슨 망언입니까. 눈앞에 계시는 분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제국의 백작이십니다. 귀족을 모욕한 죄로 재판을 받고 싶은 건가요?”
“아, 아니요.... 죄송합니다! 그냥.... 너무 신기해서.. 정말로 나쁜 뜻은 전혀 없었어요!”
“각하. 이자는 그냥 내보내는  

릴리아는 김세희를 무시하고 내게 그녀를 내쫒자는 의견을 구했다. 흘끗 김세희를 쳐다보니 얼굴에 망했다는 글자가 적힌 표정이다.

“저 정말 자신 있어요! 졸업하고 석사과정을 준비하고 있었단 말이에요!”
“언성을 낮추세요. 고위귀족을 모욕한 죄로 재판에 넘기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자비를 베푸는 겁니다.”

릴리아는 조금 화난 얼굴이었지만, 나는 별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내가 백작이든 나발이든 김세희랑 무슨 상관이 있었던가.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에게 쓸데없는 갑질을 할 필요는 없다.

“됐어. 그만.”

김세희를 내보내려는 릴리아를 침묵시켰다. 나는 비스듬히 앉아있던 몸을 김세희를 향해 돌리고선 말했다.

“몇 살이야?”
“스물여덟이에요.”
“그럼 이세계로 온지는 몇 년이나 됐지?”
“올해로 3년 차예요.”

김세희는 담담히 대답했다.
나는 잠깐 암산을 하고 의문점을 물었다.

“그럼 2년이 비는데?”
“학비 때문에 2년간 휴학을 했어요. 이젠 의미 없는 행동이 돼버렸지만...”

그렇다면야.
납득이 가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정말로 명문대를 나왔는지는 의심된다. 나로서는 명확하게 확인할 방법이 없다.

‘어떤 방법인지 자세히 설명을 해보라 해야겠어. 들어보고 판단하는 게 제일 낫겠다.’

내가 물으면 아까 전처럼 간을 보는 태도로 대답할 수는 없겠지. 김세희에게 방법을 말하라고 할 때였다.
그녀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고 말했다.

“혹시나 해서 가져왔는데 다행이네요.”

설마 저거 학생증인가?
김세희가 꺼낸 건 한국인이라면 알아볼 수 있는 학생증이었다. 나는 릴리아를 시켜 그것을 가져오게 했다.

‘설마 이렇게까지 정성 들여서 구라를 치진 않겠지.’

딱히 위조의 느낌은 나지 않았다.

“그... 도서관을 이용하려다가 갑자기 이세계로 오게 되가지고..”

김세희는 학생증을 살펴보던 내게 덧붙여 설명했다.

“뽑아줘.”
“알겠습니다.”

어차피 모든 결정권자는 나다.
김세희가  하든 내 허락을 받아야하니, 일단 뽑고 하는  본 뒤에 결정해도 되겠다. 릴리아는 마음에 안 드는 기색이었지만 토를 다는 일은 없었다.

“아, 너도 저쪽에 앉아.”

나는 김세희에게 참관인 자리에 앉으라고 턱짓했다.

“네가 나보다 아는 게 많으니까, 필요해 보이는 사람을 뽑는데 더 도움이 되겠지.”
“열심히 할게요!”

씩씩한 대답으로 마련된 자리에 앉는 김세희를 끝으로, 창밖으로 몸을 돌려 다시금 초대장을 떠올렸다.
면접을 보고 있어서 생기는 소음이 점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상념에 집중했다.


*

이제껏 복지부는 아무런 정책도 없는 곳이었다.
원래  자리에 앉아있던 라이먼 백작은 복지부에 정말로 무관심한 인물이었다. 이젠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김세희가 기대이상으로 일처리를 잘 해주었기에, 그녀를 필두로 조직구도를 새롭게 짰다.
덕분에, 정말 한가했을 라이먼 백작과 다르게 나는 제법 바쁘게 지내야 했다.

“제국 전체적으로 삶의 질을 높여야 해요. 아르카나와 몇몇 도시를 제외하고, 영주들이 지배하는 영지는 정말 최악이라고 해도 될 정도예요.”

치마가 너무 짧아서 늘씬한 다리라인을 대놓고 드러내는 옷차림의 김세희가 조곤조곤 따졌다.

릴리아는 보기 싫은 눈치였는지 그럴 때마다 한소리를 했지만, 김세희는 웃어넘기면서 꾸역꾸역 저런 옷차림을 고수했다.

“다 좋은데, 옷차림을  더 정갈하게 하면  되는 건가요?”

기어코 릴리아는 한소리를 하였다.

“아.. 날이  덥잖아요. 어쩔 수 없었어요. 안 그러면 너무 지쳐서 일을 못한다고요.”

김세희는 손으로 부채질을 하면서 넉살좋게 대꾸했다. 릴리아는 여전히 마음에  드는 눈치인지 짜게 식은 눈으로 짧은 치마를 바라보았다.

‘음.. 다리라인이 예쁘네.’

나는 오히려 저런 옷차림을 장려한다. 본인이 입겠다는데 무슨 상관이야. 타이트한 치마라 엉덩이의 윤곽도 도드라졌다.

“몰래 보신다고 제가 모르는 게 아니에요.”

곧장 릴리아의 회초리를 맞았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차고 김세희에게 말했다.

“맞는 말이야. 삶의 질이 최악이긴 하지. 근데 단기적으로 효과를 볼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해.”
“단기적이요...? 복지는 단기적인 게 아닌데....”
“그래도 해야 돼. 아르카나 내에서 효과를 볼 수 있는 걸로.”

이왕 복지를 담당하게 된 거, 책임감을 가지고는 있다. 그래도 우선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내 영향력을 먼저 키울 필요가 있었다.
특히 내 정치적 상황에서는 얼른 날개를 달아서 조금이라도 올라 갈 필요가 있다.

‘막말로 저 멀리 변경에다 좋은 복지를 해줘봐야 그게 무슨 소용이야. 가까운 수도나 루트란부터 시작해야지.’

애초에 5만 골드다.
예산을 더 늘리려면 재무부나 황제와 담판을 짓거나, 가진 예산 내에서 효율을 보여줘야 한다.
가장 좋은 길은 지금의 열악한 상황에서 효과를 보여주고 나서 담판을 짓는 일이지.

김세희가 내 말을 곱씹는 사이에 나도 최대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빌라스 자작은 실패했지만, 나도 상단을 하나 후원해서 좋은 일에 굴려보는  나을 거 같긴 한데.
아르카나와 루트란 양쪽을 왔다 갔다 하면서 일타이피로 말이다.

“그럼, 아르카나에 교육기관을 새로 설립하는  어때요?”
“음? 갑자기?”
“네. 괜찮을 거 같지 않아요?”

김세희는 쾌활한 목소리로 연이어 말하기 시작했다.

“사실 저나 각하나 이곳에 올 때 글을 배울 필요는 없었잖아요? 그런데 제가 3년간 살아보니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은근히 꽤 있더라고요.”

정확히는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이겠지만, 어쨌든 그녀의 말 대로였다.
좆밥이었던 내게도 하나의 치트키가 있었는데, 그건 이세계로 전이되면서 말이 안 통하는 불상사가 없었다는 거다.
모국어처럼 읽고 쓰는데도 전혀 문제가 없었고.

‘음.. 괜찮은데? 근데 뭔가가  아쉬운데.....’

그게 뭐지?
엄청 좋은  떠오를  같은 감각이 든다.

“아... 시발.”

뭔가가 떠오를 거 같은데 생각이 안 난다. 김세희는  욕설에 잔뜩 찌그러졌지만 그에 신경  정신이 없었다.
이럴 때마다 스트레스를 참 더럽게 받는다. 조금만  집중하면 떠오를 거 같은데.

“정신이 맑아지는 차라도 내올까요?”

나는 알아서 하라는 뜻으로 손을 휘저었다.

‘쟤가 말한 건 방향이 잘못됐어. 글은 어차피 부수적인 거잖아. 여기가 조선시대도 아니고, 깨어있는 백성 이딴 건 필요가 없어.’

말만 통하면 되는 거잖아.
글을 읽을 줄 알아서 뭐 할 건데.
정치하는 꼬라지가 마음에 안 들어서 반란이라도 할 거야? 어차피 기사나 제국을 지키는 초인들한테 한칼에 썰려버릴 텐데?

여기는 글 조금 읽을 줄 안다고 기득권이 되는 조선시대 따위가 아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자랑하는 거냐?’ 하는 글을 모르는  강한 놈한테 뒤지게 쳐 맞고 엉엉 울면서 엄마한테 이르겠지.

‘그냥 힘 센 놈이 장땡이야.’

그게 일신의 무력이든 나처럼 권력을 추구하든 본질은 같다는 거다.

“힘.... 힘이 최곤데..”

뭔가 떠오를  같다.
나는 눈을 찌푸리며 입술을 살살 깨물었다.

“오...! 씨바아아알!”

나는 책상을 쾅! 내리치면서 환호했다. 힘이 과했는지 언제 놓인 지모를 뜨거운 찻잔이 뒤집어졌다.

‘헉.’

순식간에 릴리아가 옆으로 다가와 내 몸을 뒤로 당겼다.

“조심하셔야죠. 하마터면 손이 데일 뻔 했잖아요.”
“어... 그렇지. 고마워.”

방금 뭐였지....?
아무튼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다.

“글이 아니야. 그건 읽을 줄 알게 되도 아무런 쓸모가 없어. 검술을 가르치고 마법을 가르치는 그런 교육기관을 설립해야 돼.”
“네?”
“힘을 키울 기회를 주는 거지.”

김세희는 모르겠다는 반응이었지만 나는 확신했다. 이게 옳은 길이라고.
이거라면 지구인을 비롯해 제국의 수많은 사람들을 결집시키기 무척 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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