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6화 〉26화 (26/44)



〈 26화 〉26화

“알테온 전하께서?”
“네. 각하께서도 아마 반기실 내용입니다.”

나는 아주 잠깐 눈을 찌푸렸다.
1황자와는 그때 이후로 접점이 전혀 없었기에 굳이 이런 타이밍에?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부터 받으시죠.”
“이건 뭐지?  나한테?”
“초대장입니다.”
“당장 읽어보면 되는 건가?”
“하하. 좋을 대로 하시면 됩니다.”

나는 괜스레 고급스런 초대장을 앞뒤로 휙휙 뒤집어봤다. 왠지, 당장 내용을 읽으면 그 자리에서 답을 해야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이건 리엘라와 함께 읽는 게 좋을 거 같은데.

“공무가 바빠서 당장 읽을 시간은 없겠군. 전하께선 빠른 대답을 요구하셨나?”
“따로 당부를 하진 않았습니다.”
“그럼, 조만간 읽어보고 답을 하지.”

나는 알테온이 보낸 초대장을 서랍에 넣어두었다. 프리우스 남작은 안경을 고쳐 쓰곤 슬며시 말을 붙여왔다.

“이번 일은 유감입니다.”
“비리를 저질렀으니 어쩔 수 없지. 나보단 남작이 더 잘 알지 않나.”
“그야 저는 조사하면서 알게 됐으니 말이죠. 각하께선 어떻게 아셨습니까?”

프리우스 남작은 정말 궁금했는지 약간 들뜬 어조로 말했다.
순간 눈동자가 태도와 달리 위화감이 느껴졌다고 생각됐다. 정말 찰나의 분위기라, 그랬던가? 싶을 정도로 애매모호하다.

‘감찰부 소속이라 그런지 괜히 꺼려지는 사람이야.....’

친해지고 싶지 않다는 속내를 품은 채 남작에게 말했다.

“바일런 상단과는 전에 안 좋은 일이 있었지. 그걸 갚아줄 겸 하다 우연히 들어맞았다, 그렇게 설명하면 되겠군.”
“이런, 각하와 원한을 지다니. 상단도 참.. 멍청한 짓을 했군요. 제가 책임지고 상단을 엄벌하도록 하겠습니다!”

프리우스 남작은 호쾌한 웃음으로 맞장구쳤다.
그럼, 평생 감옥에서 썩을 가능성이 크겠는데? 눈앞의 알렌도 엄벌을 장담했으니까.
그는 손목의 시계를 슬쩍 확인하고서 말했다.

“이만 돌아 가봐야겠군요. 조만간 유익한 자리가 또 마련되길 바라고 있겠습니다.”
“마찬가지네.”

나는 프리우스 남작의 가벼운 목례를 받고 악수를 의미하는 손을 맞잡았다. 남작의 손은 차갑게 느껴졌다.

부임된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집무실을 옮기게 되었다.
릴리아는 앨비스 자작의 긍정적인 소식을 가져왔다.혹시나 했는데, 자작은 사퇴를 결심하기로 마음을 먹고 있었나보다.

‘굳이 귀족을 부서장으로 뽑을 필요는 없어.’

라이먼 백작의 집무실이었던 공간에서, 새롭게 단장을 꾸리는 사람들과 그들을 부리는 릴리아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왕이면  쉽게 뜻이 통하는 한국인을 뽑는 방향을 정해두었다. 부리기 요원한 귀족들은 가성비가 너무 구리다.

‘남은 귀족은 아무도 없으니까. 내 맘대로 임명한다 해도 내부에선 불만이 나올 일은 없어.’

문제는 외부의 일.
어차피, 원체 다른 힘 있는 부서랑은 차원이 달라서 딱히 의미는 없으려나.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곳이니까.

“먼지가 날리는데 들어가 계시지 않고 굳이....”
“있어봐야 얼마나 있다고.”

나는 대충 손을 휘저으며 대꾸했다. 릴리아는 별 뜻 없는 손짓에 나도 모르는 의미를 읽었나보다.
그녀는 인부들에게 다가가 손뼉을 짝 마주쳐 이목을 집중시키고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상보다 빨리 끝낸다면 20골드를 하사하겠습니다.”
“오!”
“정말입니까?”

20골드면 하루 술값으로 사용하기엔 넘치는 금액.
인부들은 의욕이 바짝 들어서, 2배는  빨라진 착각이 들만큼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전혀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타오르는 촛불을 후, 불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아서 그대로 놔두었다.
릴리아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이현성이 각하와 만남을 원하는 눈치입니다.”

잠깐 궁금한 게 떠올랐다.

“혹시 그놈한테 얼마를 
“2000골드입니다.”
“어렵지 않게 갚겠네.”

이현성은 좆밥이지만 다른 사람의 눈에는 A급 용병에 협회의 간부다.
몸만 열심히 굴리면 2000골드는 금방 갚을 거라 생각했다.

“이자를 가능한 최고로 높였습니다. 아쉽게도 40%지만 쉽게 갚지는 못할 겁니다.”

그보다 더 높여서 받아내려 했단 말인가. 릴리아의 표정은 정말로 아쉬워보여서 이현성의 처지가 공감될 뻔 했다.
다행히 내 입에서  말은 처우를 개선해주는 아량이 아니었다.

“그럼 보나마나 사정 좀 봐달라는 말이나 하겠지. 매달 800골드씩 이자를 내야 되니, 그럴  같네. 똥줄 좀 타라지.”
“음..”

릴리아는 진지한 얼굴이 되어,  말을 곱씹는 듯 했다.
그녀는 인부들이 일을 끝마치고 나서야 깨달음을 얻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제가 지훈님의 뜻을 깊게 헤아리지 못한 모양이네요. 다음엔 이런 일이 없을 거예요.”
“...?”

뭔가 핀트가 어긋나지 않았나.
보기에 따라서, 릴리아의 미소는 섬뜩한 면모가 엿보인다.
그건 한동안  붙어있었고 앞으로도 쭉 내 곁을 보좌할 그녀를 가까이서 지켜본 내 입장이 되어야 느낄 수 있는 종류의 위화감이다.

‘좋은  좋은 거겠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릴리아는 내 말은  듣고 있으니까.’

*

알테온에게 받은 초대장은 황궁으로 돌아오는 내내 뜯어보지 않았다.

릴리아와 의미를 상의해봤는데 역시 직접 확인을 해야겠다. 당분간은 편히 복지부에 여력을 쏟으려 했는데 생각할 일이 또 생겼다.
정말이지 이 황궁에서 맘 편히 지내는 양반은 망나니 3황녀 뿐 일거다.

‘누구랑은 달라도 너무 달라. 시발 년.’

리엘라가 초대장에 집중해 있을 때 불경한 생각을 해버렸다. 리엘라는 귀신같이 알아차리곤 물어왔다.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요?”
“아냐... 아무것도.”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초대장에 시선을 옮겼다. 나는 망나니 3황녀와 다른 느낌의 아름다운 얼굴을 감상하며 시간을 때웠다.
리엘라는 초대장을 내려놓고 말했다.

“이걸 받아온 걸 보니, 알테온 파벌의 귀족이 파견됐네요?”
“응, 알렌 프리우스란 남작이었어.”
“누군지 모르겠네요. 남작과 대화를 나눌 일은 있어본 적이 거의 없어서.”
“아.... 그럴  있지..”

리엘라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얘기해서  빠진 기분이 들었다.
하긴 제국의 황녀였지. 일개 남작과 접점이 있기에는 신분이 너무 달라서 그럴싸한 명분이 없었다.

리엘라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크리스 파벌의 감찰부가 파견될 거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걸 보니까 뜻대로 되지 않았네요. 주도권을 완전히 가져왔다 판단했는데 대응이 빨랐어요. 카엘로스와 연관을 지어 알테온을 조금 압박하려나 싶었는데...”

아쉬운 기색인지, 리엘라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그녀는 푸른색이 감도는 긴 은발을 한차례 쓸어 올리고 말했다.

“상단 관련자들은 어떻게 된다 하던가요?”
“프리우스 남작이 자기만 믿으라던데. 아주 확실하게 처리한다면서.”

나는 알렌과 있었던 일을 간략히 부연설명을 해주었다.

“곧 죽겠네요. 빌라스 자작보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게 더 많을 텐데.... 안타깝네요.”
“지금이라도 가서 뭐라도 캐내야 할까?”
“아뇨. 너무 늦었어요. 평민에게 죄목이야 그럴싸하게 갖다 붙이면 되는 거니, 굳이 살려둘 이유가 없죠. 카엘로스 백작의 입장에서도 불법 노예상과 연관된 정황이 있으면 껄끄러울 테니까요.”

내가 빼온 장부에 카엘로스 백작은 관련이 없었다. 단지 이현성의 말을 듣고 연관이 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다.

“크리스가 당신이 해야 할 일을 대신 해줄 거라 생각했는데 아쉽게 됐어요.”

리엘라의 목소리엔 짙은 아쉬움이 묻어있었다. 그녀는 내려놓았던 초대장을 툭툭 짚으며 말했다.

“자기 파벌에 들어오라는 뜻인 걸까요.”

프리우스 남작이 주고 간 초대장은 알테온이 주최하는 모임의 초대장이었다. 당연히 알테온을 지지하는 귀족들만 가득한 곳이겠지.

“가도 문제고 안가도 문제 아니야?”
“적어도 어머니가 좋아하진 않겠네요. 하지만 가는 편이 좋겠죠.”

딸 때문에 사위를 도와줬더니 1황자에게 꼬리를 흔들러 가버렸다고 생각하면.... 어떤 마음인지 이해가 아주 잘 된다.

‘존나, 돌아버리겠네.’

클레이튼 대공은 아직까지 뭐하는 양반인지 모르겠고.
적어도 나는 처음부터 1황자 2황자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해야 하는 운명이었다.

높은 건물 사이를 이은 외줄에 안전장비 없이 첫걸음을 내딛으려 하니 똥줄이 심하게 탄다.
나는 습관적으로 리엘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름다운 얼굴이 작게 끄덕여졌다.

‘그래. 시발.. 별수 있나, 가야지.’

황비는 리엘라가 어떤 식으로든 커버를 치겠지? 그럼 나는 알테온의 똥꼬를 좀 핥아주면서 발을 걸칠  말듯, 모호한 태도를 유지하면 되겠지 뭐.

다행히 초대장에 적힌 날짜는 앞으로 7일 후였다.


*

리엘라의 예상대로 김혁수와 서인혁 둘은 처형되었다. 바일런 상단은 언제 그런 게 있었냐는  와해되어 자취를 감췄다.

결국 내가 용병이었을 적 바일런 상단이 습격당한 일의 전말은 알  없게 되었다.
이현성도 시키는 일을 하는 자여서, 그 일의 자세한 내용은 몰랐다.

‘오히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기습은 카엘로스 백작과 뭐라도 연관이 있는 거 같은데.’

첫 습격 때의 기병들.
그들은 분명 어딘가의 귀족을 섬기는 기사들이겠지? 실력은  뛰어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냥 내가 예민하게 생각하고 있는 건가...’

얼마 전.
알테온의 초대에 응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나서, 카엘로스 백작과 바일런 상단의 연관을 되짚어보게 되었다.

“각하, 집중을 전혀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잠시 쉬었다가 할까요?”

릴리아의 목소리에 수면 아래로 가라앉던 의식이 확 치솟았다. 주변을 보니 전부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 지금 면접을 보고 있었지.
기존 복지부에 있던 3명의 귀족 대신 새롭게 일을 해줄 사람을 뽑고 있었다.
기준은 한국인, 가능하면 지구에 있었을 적 관련된 공부를 해왔던 자들로.
굳이 면접을 참관한 이유는 같은 한국인이니, 지구에 있을  사정을 더 잘 알기 때문이었다.

“계속 진행해.”
“알겠습니다.”

나는 스스로의 쓸모를 열심히 설명하는 자들을 무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다음.
다음.
그리고 다음.

딱히 성에 차는 인물이 아직까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이럴 거면 굳이 이 자리에 있는 의미가 없을 정도로.
지루하다.  다시 아까전의 생각이 스멀스멀 떠오르려 하고 있다.

“저는.... 사회복지를 전공했던 사람입니다!”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다는 말인가요?”
“그... A 대학교라고 저희 세계에 있는..”
“그만, 다음.”
“탈락입니다. 이만 나가세요.”

나는 픽 웃어버리곤 다음 사람을 불러다 앉히라 말했다. 릴리아는 냉정하게 남자를 내보냈다.
A 대학교는 무슨, 나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학교다. 남자는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자리를 비웠다.

남자의 후발주자로 늘씬한 여성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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