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5화 〉25화 (25/44)



〈 25화 〉25화

다음날.

평소와 같은 루틴으로 복지부에 출근했다.
라이먼 백작은 여전히 자리를 비운 상태였는데 계획대로 된다면 앞으로도 쭉 자리를 비우게 될 거다.

“조만간 돼지 같은 작자를 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하니 기분이 좋네요.”
“그렇겠지? 나도 마찬가지야.”

릴리아의 허밍 소리가 아침부터 지금까지 이어졌다.
보틀러스 남작이 사라질 거라 생각하니 여간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하긴,  돼지는 좀 심했지.... 내가 여자였어도  나왔을 거야.’

출근과 동시에 잠깐의 여유를 느끼고 있을 때 닫힌 문이 벌컥 열렸다. 빌라스 자작이 흐트러진 옷차림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는 릴리아를 흘끗 쳐다보고는 말했다.

“이보게 백작. 잠시 얘기를 좀 하지.”
“무슨 급한 일이라도?”
“후.... 단 둘이 할 얘기가 있네.”

빌라스 자작은 릴리아를 계속 곁눈질 했다. 하지만 릴리아는 요지부동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괜찮으니 나가달라는 말을 했다.
릴리아가 나가자, 빌라스 자작은 내 얼굴을 뚫어져라 살펴보면서 말했다.

“어제 바일런 상단에 왜 간 거지?”
“그게 뭔 개소리야? 예산을 더 할애할 가치가 있는지 내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다 했고, 네가 가든 말든 알아서하라며.”
“이 새끼가...!”

빌라스 자작은 갑작스레  멱살을 잡았다. 앙상한 팔이라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지만 표정만큼은 살벌했다.

“너.... 알고  거지? 이제껏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네놈이 상단에 갔다 온 이후로 문제가 생겼어. 너 이 새끼, 나랑 뭐하자는 거야.”
“왜 이렇게 화가 났어? 이거부터 좀 놓지?”
“말장난 하지 말고 대답해 이 새끼야! 나랑 뭐 하자는 거야.”

나는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우고 빌라스 자작의 얼굴을 내려 보았다. 분노로 점철된 눈은 확신을 품고 있었다.

“다 알고 왔어?”
“내가 바보로 보이나? 우연? 그딴 게 있을 리가! 네놈이 갔다 온 이후로 문제가 생겼는데 당연히 관련이 있겠지.”

나는 우선 잡힌 멱살부터 풀어냈다. 그러고선 스스로도 차갑게 느껴질 목소리로 말했다.

“뭐 하자는 거냐고? 당연히 널 치워버릴 생각으로 벌인 일이지.”
“나를 치워?”
“그래. 분리수거 몰라?”
“크크크큭.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하는 거 같은데.”

음침한 웃음이 멎어들자, 그는 냉정한 태도를 되찾았다.
사람이 머리끝까지 화가 나면 되레 이성적으로 변한다는데 딱 그 모습이다.

“이보게 백작. 귀족사회는 만만하지 않아. 그래 뇌물? 받았어. 아주 잘 사용하고 있지. 그런데 그게 어쨌다고?”
“미쳤네.”
“겨우 뇌물  받아먹은 정도로 나를 처벌하겠다고?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 용병새끼가 운 좋게 백작이 되었다고 나를 무시해?”
“그건 해봐야 알겠지.”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빌라스 자작은 조롱하는 태도로 말했다.

“백작. 지금이라도 일을 깔끔하게 마무리 짓지? 나는 정말로 처벌 받을 자신이 없어.  끝 없이 여기서 끝낸다면 나도 보복하지 않겠네.”
“뭐, 보복?”
“백작이 알지 모르겠는데 귀족사회에 떠도는 소문이 있어. 백작은 무능력한데 어떻게 황녀전하와 결혼을 했을까? 그런데 소문이 제법 신빙성이 있더군. 로또라는 웃기지도 않은 짓거리의 최대 수혜자라는 소문이.”
“그게  어쨌다고.”
“상황 파악이 안 되나? 순혈 귀족도 아니고, 아무런 능력도 없는 네놈이 그 소문 때문에 귀족사회에 발을 들이밀 기회가 더 좁아진다는 거지. 아!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려나. 푸흐흐.”

황제가 억제시킨 진실이 점점 드러나는 모양이다. 어차피 목적인 결혼도 했으니 그런 말이 나도는 거야 큰 상관이 없다.

“그거랑 이거랑 무슨 관련이 있는데? 나는 전혀 모르겠거든.”
“네가 어떻게 연관성을 찾아서 그런 짓거리를 했는지는 모르겠어. 어쨌든 깔끔하게 일을 묻으면, 네 태도에 따라 귀족사회에 다리를 놔  수도 있다는 말이지.”
“조용히 묻자 이 말이지.”

빌라스 자작은 오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도권을 가져왔다는 확신어린 표정이었다.

‘역으로 협박을 해올 줄이야.’

리엘라와 얘기를 나누지 않았더라면  상황에 어이가 없어서 주도권을 빼앗길  했다. 다행히 그런 상황은 일어나지 않는다.
빌라스 자작의 착각에 빠진 얼굴도 곧 절망으로 바뀌겠지.

“자작은 종종 내가 누구의 남편인지 잊어버리는 거 같아.”
“아무리 황녀전하여도 내가 그분께 무례를 범하지 않는 이상, 이 일을 문제 삼지   거다.”
“그게 아니라. 2황자께서 문제 삼지 않을까.”

오만하던 빌라스 자작은 갑자기 망치를 맞은 듯 멍해졌다. 곧 눈을 찌푸리는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드리는 눈치였다.
나는 그 행동이 의미가 없다는 걸 알려주었다.

“오늘 아침에 리엘라가 어머니를 만난 다 하던데. 누구를 말하시는지는 자작도 알지?”
“네놈.... 일을 크게 벌이는 군.”

빌라스 자작은 얼굴이 굳어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올 때보다 빠른 동작으로 다급히 방을 나갔다.

아마 믿고 있는 거목인 카엘로스 백작과 연락해볼 심산일 터. 하지만 늦었다. 리엘라는 이번 일을 빠르게 몰아붙여야 한다고 했고, 벌써 행동에 옮겼을 테니까.

*

오후가 지나기 전에 일은 터졌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감찰부에 한적하던 복지부가 처음으로 소란스러워졌다.

“귀하가 이번에 봉작된 이지훈 백작각하 되십니까?”

감찰부 소속 귀족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는 내 신원을 확인하고는 품에서 상당히 고급스런 양피지를 꺼내 펼쳤다.

“황제폐하의 칙령입니다.”

나는 재빠르게 한쪽 무릎을 꿇어 자세를 갖췄다.

“이지훈 백작은 들어라. 복지부내의 사정은 충분한 설명을 들은 바, 그대는 조만간 라이먼 백작의 뒤를 이어 새롭게 복지부를 이끌 준비를 하라.”
“황송합니다, 폐하.”
“일어나셔도 됩니다.”

리엘라의 바람대로 일이 잘 처리가 된 낌새다.
나는 눈앞의 감찰부 소속 귀족에게 물었다. 손에 끼워진 반지를 슬쩍 보니 남작이라 하대를 해도 괜찮았다.

“빌라스 자작은 어떻게 되는 거지?”
“자작은 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마 처벌을 면치는 못할 것 같군요.”
“풉,  미안하네. 그는 어디 있지? 벌써 연행되진 않았을 텐데.”

나는 남작을 지나쳐 빌라스 자작의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난장판으로 변한 복도를 볼  있었다.

쿠당탕탕-

이런.
저건 자작이 꽤 애지중지 하던 가구 아닌가. 흔히 말하는 방을 빼는 상황, 자작의 집무실은 이삿짐센터가 작업하는 곳처럼 분주했다.

“야 이 새끼야! 그게 얼마짜리인지 알기나 해!”
“이보시오 자작. 그만 자중하시오.”
“이이익, 저놈들이!”
“자작은 죄인의 신분이오. 너희들은 얼른 자작의 짐을 옮기 거라!”
“이보게! 카엘로스 각하의 연락은 없는 건가?”
“아까부터 왜 자꾸 아무 연관도 없는 분을 찾으시오?”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벽에 기대 우스꽝스러운 촌극을 지켜보고 있었다. 빌라스 자작의 목소리는 다급함이 많이 느껴졌다.

“하아.... 알렌. 적어도 말은 전해줄 수 있는 노릇 아닌가. 우리사이는  정도의 안면은 있지 않나!”
“우리가 어떤 사이인지 나는 전혀 모르겠소.”

저게  떨어진 귀족의 말로인가.
나도 발을 삐끗해서 궤도를 자주 이탈하다 보면 언젠가  자리에 내가 있을 지도 모른다.

‘살벌하네. 저렇게  되려면 더 똑똑해져야겠어.’

빌라스 자작의 방황하던 눈초리가 내게도 향했다. 나는 눈이 마주쳤다고 느끼자 비웃음을 머금었다.

“너 이 새끼!”
“어허! 자중하라니까. 다 치웠으면 모시고 가.”

투박하게 방에서 빼내진 가구들처럼 자작도 팔을 붙들리곤 끌려 나갔다. 보틀러스 남작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을 거다.
나는 감찰부 남작에게 말했다.

“바일런 상단의 일은 어떻게 되는 거지?”
“관리에게 뇌물을 수수한 일은 처벌이 가볍지 않습니다. 못해도 10년 이상은 감옥에서 썩게  것 같군요.”
“죄목이 그것뿐인가?”
“그렇습니다.”
“음... 일이 마무리되면 내게도 알려줬으면 좋겠군.”

남작에게 그리 당부하고, 릴리아를 시켜 마커스를 데려오게 했다. 마커스도  기색이 짙어 좋은 몰골이 아니었다.

“부르셨습니까.”
“자네와는 할 얘기가 있어.”

마커스는 어떤 말을 할지 짐작이 간다는 초연한 태도로 내 말을 기다렸다.

“빌라스 자작의 일, 언제부터 알고 있었지?”
“1년 조금  됐습니다.”
“그런데 왜 처음에 내게 알리지 않았지?”
“바뀌는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마커스는 나를 빌라스와 비슷한 과로 보고 있었던 건가. 달가운 사실은 아니지만 입장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그처럼 귀족과 대면하며 일을 해온 건 아니더라도 신분은 비슷한 처지였으니까.

‘좀 나쁘게 꼬아서 생각해보면 얘는 내가 아니라 빌라스 자작에게 베팅을 했을 수도 있겠네.’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다.

“앞으로 일을 계속할 생각은 없다고 봐도 되겠지?”
“네, 이제 고향에 내려가서 쉬고 싶습니다.”

나는 턱을 매만지며 마커스를 바라보았다.
처음 일을 배울 때를 떠올리면 마커스는 꽤 깔끔하게 일처리를 하는 편이었다.
조금 아쉽긴 한데. 고향에 내려간다고 하니 순간 한국이 떠올라 잠깐 동정심이 일었다.

“급여는 어느 정도 받았지?”
“매달 40골드입니다.”

뭐지 이 쥐꼬리만 한 월급은.
내 황당한 표정에 마커스는 쓰게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복지부의 입지가.... 조금 그렇지 않습니까.”

쯧, 나는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럼 앞으로 한 달만 더 고생해.”

나는 릴리아를 시켜 그에게 1000골드의 어음을 쥐어주었다. 마커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새로운 인원을 뽑아야하는데 자네가 교육을 하는 게 효율이 낫겠지. 어차피 고향에 내려갈 거, 돈은 많이 들고 돌아가는  좋지 않나?”
“시키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리엘라의 돈이지만, 부부는 일심동체 아니던가.
1000골드는 이제 푼돈 수준도  되었다. 릴리아는 마커스가 돌아가자 기다렸다는  말을 걸어왔다.

“앨비스 자작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음....”

복지부에 마지막으로 남은 귀족. 그는 이번 사건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자라서 쫒아낼 명분이 없었다.
개인적으론 그 역시 떠나보내고 온전히 새 술을 담고 싶다.

“가서 무슨 생각인지 알아보고 와. 남아있을지 관직을 내려놓고 싶은지.”
“지금 갔다 올게요.”

부임하고 마주치지 않은 귀족이 라이먼 백작과 앨비스 자작이었다.
내가 황실의 부마인데 얼굴 한번 안 비추는 꼬락서니를 보면 그 역시 나랑 사교적인 관계가 될 생각은 없었겠지?

‘어차피 내가 그놈이랑 친해질 일은 없으니까 스스로 그만둘 수도 있겠어.’

기분 좋은 가정을 떠올리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났다. 릴리아는 아니다. 그녀는 노크 후 곧장 들어오는 편이니.

“실례하겠습니다, 백작각하.”
“누구지?”
“제3 감찰부의 알렌 프리우스 남작입니다. 전해드릴 게 있습니다.”
“들어오게.”

아까 전, 빌라스의 호소를 매몰차게 거절했던 남자가 들어왔다.

“하하... 죄송합니다.  전달해드릴  있어서.”
“감찰부가 내게 줄 게 있다니, 불길한 느낌이야.”
“알테온 황자전하의 서신입니다.”

알렌 남작은 그다지 달갑지 않은 내용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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