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4화 〉24화 (24/44)



〈 24화 〉24화

“백작님. 제가 주제넘은 발언을 한 건가요?”

황궁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릴리아가 물었다. 남들 앞에서 있을 때보다는 편해진 목소리다.
 이름이 각하, 백작 아니면 둘을 합쳐서 백작각하. 요즘 하도 그런 소리만 듣고 있으니 아예 개명을 한 느낌이다.

“저, 백작님?”
“됐어. 그냥 둘만 있을 때는 이름으로 불러도 괜찮아.”
“그게 편하시다면 보는 눈이 없을 때엔 그렇게 할게요.”

릴리아의 말투는 여전히 공손했다.
그녀가 딱딱하게 대하는 것도 차츰 나아지겠지,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을 때 릴리아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김혁수라는 자가 술을 대접하겠다는 곳은, 아마 불순한 장소를 말하는 거라 생각돼 나섰어요.”
“아하하! 불순한 장소라니. 설마 걔가 그런 의도로 나를 대하겠어?”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지훈님..”

릴리아는 조금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면서도 작은 목소리로 내 의견을 곧장 반영한 모습은  귀여웠다.

“아냐, 잘했어. 그런 데를 자주 갔었던 것도 아니고.”
“다행이네요.”
“뭐가?”
“지훈님이 문란한 분이 아니라는 게요. 아마 그곳에 가셨다면 저로서는 말리지 못했겠지만 황녀전하께서 슬퍼하셨을 거예요.”

무슨 뜻이지?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릴리아를 쳐다봤다. 하늘색 단발의 예쁜 얼굴이 처음과 같은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다.

‘유부남 인생에 그런 장소는 당연히몰래 가야하는 거 아닌가?’

불현듯, 뇌리에 좋지 않은 가정이 스쳐지나갔는데. 정말 찰나의 순간이라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다.
에이 설마.

“장부나 줘봐. 증거는 확실하지?”
“네.”

나는 릴리아의 손에 들린 장부를 펼쳐보면서 혀를 찼다.

“이현성의 말에 따르면 김혁수가 아닌 서인혁의 방에서 찾아냈다고 하더군요.”
“그 새끼가 실세인 게 확실해.”

장부에는 그동안 얼마만큼 돈을 찔러줬는지 아주 상세하게 기입돼 있었다.
마음에 안 드는 빌라스 자작은 어디보자, 1만 골드를. 그놈과 영혼의 듀오로 생각되는보틀러스 남작은 보다 적은 5천 골드.
생각 외로 크게 해먹진 않았다.

“자잘한 귀족들도 꽤 연관되어 있네.”

내가 알지 못하는 일면식도 없는 몇몇 귀족들도 자잘하게 돈을 받아갔다.
복지부의 듀오가 1.5천 골드를 해먹었다 치면, 남는 골드가 5.7천 골드.
자잘하게 먹인 귀족들은 대략 훑어도 1만 골드 가량이  안되니까 남는 건 바일런 상단이 꿀꺽 했다는 건데.

“남는 돈을 어디다 썼을지 짐작이 가?”
“아직은요.”

릴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곧바로 한 가지 첨언을 덧붙였다.

“제 생각엔 조용히 처리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나도 그래.”

우선 리엘라와 얘기를 나눠봐야겠다. 내가 아는  가장 똑똑한 사람이 그녀였으니까, 뭐라도 좋은 방법이 생각날지도 몰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멀단 말이야.”
“네?”
“출퇴근 말하는 거야.”

황궁과 복지부는 왔다 갔다 하는 데에만 무려 1시간 가까이 걸린다. 불만이 없을 수가 없다.

“피곤하신가요?”

나는 대답대신 감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릎을 내어드리겠습니다.”

나는 마다하지 않고 릴리아의 무릎에 머리를 뉘었다. 뒤통수에 말랑하고도 탄탄한 감촉이 가득 전해진다.
눈을 덮는 릴리아의 손바닥을 마지막으로 잠에 빠져들었다.



*



개운해진 정신으로 궁에 들어올 수 있었다.
도착했을 때 릴리아의 치마에 침을 흘린 해프닝이 있기는 했는데, 서로 어색한 분위기가 있지는 않았다.

“샤워부터 하시겠습니까?”
“응.”

릴리아에게 겉옷을 대충 넘겨주고서 몸을 씻으러 들어갔다. 황궁에 처음 왔을 때 받았던 목욕시중은 아쉽게도 없다.
리엘라와 같이 살고 있는 처지에그런 깡다구는 없었다.

100평은 충분히 넘을 호화로운 욕실을 홀로 이용한다.
정말이지 끝내주는 인생이다.
특히 어떤 향을 쓰는 건지. 은은하게 코를 간질이는 기분 좋은 향기의 녹색 탕은, 몸을 담구고 있으면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 든다.

‘점점 권력에 물들어 가는 느낌이야...’

없이 살았을 때는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웠다.
어떻게든 살아가려 악착같이 노력했었지. 지금의 내게 그때로 돌아가라 한다면 두 달도못 버티고 객사할거다.

권력을 더 공고히 다져야 해.
자주 그런 다짐을 하게 된다. 지금의 생활을 잃어버리기엔 너무 아쉬웠다.

샤워를 끝마치고 식당에 갔다.
리엘라는 최근 황비와 관계를 회복하는데 힘을 쏟느라 바빠서, 나 혼자 수저를 들었다.

“오. 이거 맛있다.”

눈치껏 시녀가 그 음식을 부족함 없이 더 가져왔다. 밥을  먹으니 시녀들이 자리를 정리하고 차를 내오려 했다.
한잔에 족히 수백 골드의 가치를 하는, 보통 사람들은 입에 대기도힘든 종류의 차를.

“아, 차는 방으로 가져다주면 좋겠어.”
“그렇게 하겠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마셔야지.
귀족 놀음도 좋은데 공부는 열심히 해야 한다.

‘머리에 든 게 있어야 사람도 부리지.’

망나니가 돼서 쾌락만 추구하고 다니면 기껏 운으로 이룬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만다. 그런 병신이 될 수는 없으니 공부에 집중했다.
아무래도 내가 마시는 차에는 집중력을 높이는 성분이 있는 게 분명하다. 리엘라가 방에 들어온 것도 방금에서야 알았으니까.

“역사책이네요? 좋은 선택이에요. 역사를 알아야 정치도 이해할 수 있는 법이니까요.”

리엘라는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음, 황비....님? 아무튼 어떻게 진전은 있어?”
“그럼요. 어머니는 엘리아 보단 저를 유독 예뻐했으니까요. 뭐, 제 입장에서는 그리 달갑지 않은 사랑이었지만.”

엘리아라면 싸가지 없는 3황녀를 말하는 거였다. 하긴, 내가 부모의  3황녀는 매로 다스렸을 거다.
언제 기회가 되면 형부 된 도리로써 사람을 대하는 예의범절을 가르쳐주고 싶은데 영 기회가 없다.

“어머니가 당신을 싫어하는 건 어쩔 수 없죠. 일을 방해하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인 정도예요.”
“그건...  그러는지 대충  거 같아. 그래도 방해하지 않는 건 의외네. 솔직히 하든 훼방을 놓을 거라 생각했거든.”

결혼식 당일, 아주 잠깐 마주쳤던 눈빛을 떠올려보면 싫어한다는 말이 절로 이해됐다.
눈빛만으로 사람 한명을 죽일 기세였으니.

“괜찮아요. 당신이 2황자의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증명하면, 어머니와 사이는 아마 더 없이 좋아질걸요? 조만간 그렇게 만들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리엘라는 여느 때와 같은 아름다운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그러나 짧은 시간이지만 살을 맞대며 생활한 내가 보기엔, 왠지 모를 섬뜩함이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크리스 황자 말이지? 너랑 사이는 어때?”
“나쁘지도 않고, 좋다고 하기도 애매하네요. 적어도 겉으로는 그래요. 저는 그자를 오라버니라 생각하고 싶진 않네요.”

2황자인 크리스 아르카옌은 리엘라의 오빠였다. 황자 둘의 사이도 황권 때문에  좋고. 같은 배에서 나온 자식들 관계도 썩 좋은 것도 아니고.

‘콩가루 집안이 따로 없네. 나는 그런 집안에 들어온 사위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여요. 보나마나 형제애가 전혀 없는 황가라고 생각하고 있었겠죠. 안 그래요?”
“어... 뭐.. 그렇지.”
“당신은 표정관리를 더 의식할 필요가 있겠네요. 여우같은 늙은이들, 특히 대공 같은 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단번에 꿰뚫어볼 테니까요.”

날카로운 충고에 나도 모르게 얼굴을 쓰다듬었다. 리엘라는 내가 제법 우스꽝스러웠는지 픽 웃었다.

“릴리아에게 자세한 사정은 들었어요. 당신은 어떻게 하고 싶죠?”

 시험의 연속이다.
리엘라는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음. 일단 빌라스와 보틀러스는 치워야겠지. 장부에 라이먼 백작은 없었고, 복지부의 남은 귀족인 앨비스 자작 역시 관여돼 있진 않았어.”
“그래서요?”
“앨비스 자작과 손을 잡아서 둘을 치워버리는 쪽으로 생각하고 있어.  구체적인 계획은 앨비스를 만나봐야   같아.”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요?”
“카엘로스 백작이 어떤 이유로든 연관이 된 상태라 조용히 처리하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앨비스 자작과 손잡고 은근히 압박하면 둘은 관직을 내려놓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그렇군요.”

리엘라는 그렇게 대답하고 고개를 저었다.
내 야심찬 계획을 들은 그녀의 반응은 꽝이었다.

“당신은... 카엘로스 백작과 다투기엔 아직 시간이 모자라다고 생각하고 있었죠?”
“응.”
“카엘로스 백작이  그 상단을 후원했는지는 짐작이 가진 않죠. 그건 저도 마찬가지랍니다.”

리엘라는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당신 입장에선 카엘로스 백작이 부담스러울지도 몰라요. 그건 저도 이해하고 있어요. 하지만 놓친 사실이 있어요. 결국 어떻게든 카엘로스 백작은 사실을 알게 될 거예요.”
“둘을 잘 협박하면 어찌 되지 않을까? 뇌물을 찔러준 상단도 그렇고.”
“아뇨. 귀족에게는 별로 유효하지 않은 협박이에요.”

리엘라는 그에 부연설명을 해주었다.
귀족들은 끈만 떨어지지 않는다면 그 정도 위법은 헤쳐 나갈 수 있다고.
결국 그걸 가지고 협박 해 봐야 겨우 1만 골드, 5천 골드를 해먹은 수준으로는 큰 위기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백작에게 상단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몰라요. 하지만 어설프게 먹히지도 않는 협박을 해봐야 결국 주도권은 카엘로스 백작, 나아가 알테온에게 쥐어지겠죠. 상단을 중요하지 않게 생각한다면 당신의 뜻대로 될 거고, 중요히 여긴다면 알테온과 담판을 지어야  일이 생길지도 모르죠.”
“조용히 처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일이 그렇게까지 커질까?”
“아마도요. 당신이 협박을 했더라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돼요. 릴리아도 당신과 같은 생각이었나요?”
“처음에 2황자나 라이먼 백작을 이용하는 방법을 제안하긴 했어. 근데 릴리아도 카엘로스 백작과 충돌하는 걸 우려한 편이었고.”
“그녀도 태생이 귀족이 아닌지라, 실수가 있었나 보네요.  아이라면 당신을  보필할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야. 충분히 만족하고 있어. 의외로 죽이 잘 맞기도 하고.”

리엘라는 턱을 매만지고 있었다.
상념에 잠긴 얼굴이었는데 표정은 썩 좋아보이진 않았다. 이윽고, 작은 입술이 열렸다.

“빠르게 2황자를 이용하는 게 낫겠어요. 그래야 카엘로스가 개입하기 전에 일을 끝내는 게 가능하겠죠. 아, 라이먼 백작. 그 역시 이번 기회에 치우는 게 낫겠네요. 명목은 아랫사람을 관리하지 못한 걸 들먹이면 되겠죠. 당신이라는 대체할 사람이 충분히 있고요.”
“라이먼 백작까지?”
“네. 어차피 그는 장애물이었는데 기회가 온다면 없애야죠. 어머니께 말씀을 드려 볼게요. 설득하는데 어려움이 있진 않을 것 같네요. 조금이라도 알테온이 연관돼 있으면 어머니도 생각이 달라질 테니까요.”

얼굴 한번 못 본 직장 상사가 은퇴하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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