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23화
갑질.
내가 하고 있는 행위는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 불가항력적인 갑질이었다. 나는 바일런 상단의 대표와 서인혁을 데리고 다니면서 상단을 제집처럼 헤집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서인혁이 더 상단의 주인 같은데.’
바일런 상단의 대표는 김혁수라는 한국인 남자였는데, 직접 본 눈으로 판단하자면 왠지 서인혁의 눈치를 보는 느낌이다.
바지사장 그런 건가.
“복지부의 예산을 기록한 장부부터 줘봐. 그동안 지원받은 금액을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지 확인을 좀 해야겠어.”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대표인 김혁수의 공간에서, 그의 자리에 주인처럼 앉았다. 방은 제법 값이 나가 보이는 가구들로 도배돼 있었다.
“가져왔습니다.”
허겁지겁 달려온 직원의 손에 든 장부를 김혁수가 건네받아 공손히 내밀었다. 장부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두께였다.
‘확실히 자작새끼의 말대로야. 봐도 모르는 것투성이네.’
매달 3천 골드의 사용내역이 일목요연하게 정리 되어 있었는데, 평소 그런 것들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내겐 익숙하지 않은 문자다.
생필품 구매 내역.
의약품 구매 내역.
식료품 구매 내역.
장비 수리 내역 등.
장비 수리? 아, 이건 대장간과 협력해 떨거지 용병들을 도와준 내역이네.
뭔가 좋은 일을 하고 있는 건 확실한데. 대충 보니까 이런 지원들을 복지부를 대신해 2년간 해온 모양이었다.
“유독 장비 수리 내용에 돈을 특히나 많이 쓴 거 같은데?”
“아무래도 특성 상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장비를 고치는 비용이 다른 것들보다 값이 비싸잖습니까. 그래도 용병들의 생존율이 높아지면 치안과 경제활동에 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다른 내용은 어떻게 지원을 하고 있다는 거지?”
“매주 한번 금요일 오전에, 상단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선착순으로 지급하고 있습니다.”
“왜 선착순이지?”
“물량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죄송합니다.”
김혁수는 고개를 숙이면서 사과부터 하고 봤다.
“그럼 용병을 지원하는 내용도 선착순인가?”
“그것도... 비슷합니다. 금액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먼저 오는 용병들을 우대합니다.”
“복지부를 대신해 자선사업을 벌이면서 하는 일은 죄다 선착순 선착순이군.”
“더 자주 대장간을 이용하는 용병들이 열심히 한다는 증거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이들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말대꾸를 하는 건가?”
“아닙니다!”
김혁수는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를 비롯한 다른 상단의 인물들도 전부 경직된 자세로 서있었다.
속 빈 강정, 그런 느낌이었다.
무언가 하기는 하는데 방법이 전혀 세련되지 않다고 해야 하나. 나도 잘 모르는 분야지만 이래서야 받는 사람만 받는 구조라고 생각 될 수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이세계는 지구보다 소문이 빠르지 않은 구조다. 아르카나에 와서 줄곧 황궁에 있었던 거를 감안하더라도, 바일런 상단이 사회봉사를 하고 있었다는 소문은 들어 본 적도 없었다.
“2년간 일을 이런 식으로 해온 거라면 예산을 할애하는 의미가 없어 보여.”
“저... 각하. 그건 빌라스 자작, 보틀러스 남작님과 상의해 보시는 게.”
가만히 있던 서인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릴리아가 갑작스레 끼어든 그를 차가운 눈으로 쳐다보자 다시 구석으로 찌그러졌다.
“이번에 빌라스 자작이 2천 골드의 예산을 더 올려서 책정하라 하던데 그건 너희들이 요청한 건가?”
“그렇습니다.”
“무슨 이유로?”
“그건... 마커스 부관에게 이미 보고한 바가 있습니다.”
“이유를 말하세요. 각하께서 묻고 있지 않습니까.”
릴리아의 재촉에 김혁수는 서인혁을 두어 번 곁눈질 하고서 말했다.
“각하께서 하시는 말씀을 저희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지원하고 있는 내용을 정해진 예산 안에서 갑자기 바꾸기에는, 지원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당황스러워 할까봐. 늘려 달라 요청한 것입니다.”
그럴 듯하다.
나는 김혁수의 대답에 그런 생각을 했는데 릴리아는 나와 달랐던 모양이다. 그녀는 전보다 더 얼음장 같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유를 말하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이유라고요? 변명이 아니라?”
“어..... 음... 죄송합니다! 보틀러스 남작님께 보다 자세한 계획을 세워 조만간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그러면 남작님이 검토한 후 각하께 내용을 알려드리실 겁니다.”
“아니, 마커스에게 보고한 내용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왜 자꾸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한 대답만 늘어놓는 거죠?”
“....”
김혁수가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당황하고 있는 게 보였다. 저놈 속이 어떻든 간에 나랑은 전혀 관련 없는 일.
이럴 때 팝콘이라도 있으면 꿀잼 각인데.
“그만.”
나는 이쯤에서 릴리아를 말려주었다. 서인혁은 무표정했어도, 김혁수가 안도하는 표정은 확실히 볼 수 있었다.
릴리아는 조금 불만스러운 기색이었지만 내 말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생필품을 지원하는 거야 금요일 오전에 지급한다니 어쩔 수 없고, 대장간이라도 둘러보고 싶은데 당연히 되겠지?”
“물론입니다. 지금 안내할 사람을 붙여드릴까요?”
김혁수가 재빠르게 대답했다.
장부를 빼낼 사람이 편하게 일을 보려면 최대한 많은 인원들을 데려가는 편이 좋다.
“아니. 너, 그리고 너도. 백작인 내가 가는데 기껏 안내할 사람을 한두 명 붙여준다는 건 말이 안 되지. 호위도 있어야 할 테고.”
나는 김혁수, 서인혁을 지목하고 덧붙여 가능한 많은 인원들을 불러오라 시켰다. 김혁수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릴리아를 제외한 나머지를 방에서 모두 내보냈다.
“김혁수라는 놈보다 서인혁이 더 실권을 가진 거처럼 보이지?”
“네. 그자의 눈치를 계속 보고 있는 게 보이더군요.”
“왜 이렇게 화가 나 있어?”
“노예상인들은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는 한다.
나도 노예거래가 꺼림칙하다고 생각한다.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저놈들은 노예가 없던 세상에서 와가지고 잔인하게 사람을 사고팔다니.
어쨌거나 내 인식보단 이세계에서 나고 자란 릴리아의 분노가 더 커 보였다.
나는 릴리아의 기분이 좋아질 만한 말을 해주었다.
“증거가 생기면 자작이랑 남작도, 이놈들도 죄다 시궁창으로 보내버려야지. 카엘로스 백작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카엘로스가 왜 이들을 후원하는지 이유를 전혀 모르겠네요.”
“난들 알겠어.”
“그래도 관계가 깊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카엘로스 백작의 힘이라면 바일런 상단은 지금보다 몇 배는 성장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그러면 더 좋고.
관계가 얕으면 손절도 빠르지 않겠는가. 릴리아의 예상이 사실이라면 굳이 백작과 다툴 생각이 없는 나에게는 좋은 소식이다.
내 지시에 상단의 많은 인원들이 모였다. 거의 100명에 달하는 인원이다. 하지만 이곳은 제국의 수도.
그만한 인원이 몰려다닌다 한들 보기 드문 일은 아니었다.
대장간에 도착하자 낡은 건물이 반겼다. 망치와 모루 등을 들고 땀을 뻘뻘 흘리는 장인들을 기대했는데, 그런 인물들은 몇 보이지 않았다.
나는 눈치껏 높은 사람을 대하려는 대장간 사람들을 물리고 김혁수에게 말했다.
“생각보다 허름한 대장간이야. 말은 번지르르한데 하는 일은 영 시원찮아. 직접 오지 않았으면 전혀 몰랐겠어.”
“죄송합니다. 더 신경 쓰겠습니다.”
“그리고 저들을 봐. 전혀 일을 하는 걸로 보이지는 않는데?”
“그게... 지금 막 점심시간이 지났을 시간이라..”
“뭐, 그렇다면야. 밥 먹고 쉴 수도 있지.”
나는 내 호위의 임무를 맡는 기사무리를 향해 손짓했다. 기사 한명이 재빠르게 다가와 경례를 올렸다.
“부르셨습니까.”
나는 대장간에 걸린 검 하나를 빼와서 기사에게 내밀었다.
“품질이 어때 보이지? 확인해봐.”
“네.”
기사는 검을 받아들고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그러고 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검의 날에 손가락을 대보기도 하고 무게를 확인하는 등 몇 가지 작업을 해보다가, 검을 바로 잡고서 마나를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내 눈으로도 검에 덧씌워진 마나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색이 점점 진해지더니 검신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기사가 마나를 거두면서 말했다.
“품질은 아주 평범한 편입니다. 다만, 마나를 다룰 줄 아는 자들이 이용하기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하는군.”
나는 김혁수에게 삐딱한 시선으로 설명을 요구하는 고갯짓을 했다.
“하하... 저도 무기는 잘 모르는 분야라. 이 대장간도 지원 대상 중 하나로 실력이 더 발전했으면 하는 마음에.... 또 유명한 대장간에 맡기기엔 금액을 감당할 수 없어서.... 그랬습니다.”
김혁수는 쩔쩔 매면서도 주절주절 어떻게든 말을 이어가며 대답했다.
이런 수준의 대장간은 나도 자주 이용해 온 경험이 있었다. 김혁수의 말대로 유명한 대장간은 가격이 비싸다는 걸 동의한다.
‘여기 정도면 기껏 해봐야 30실버 내로 떡 칠거 같은데.’
무기를 공짜로 주는 것도 아니고, 기록상으론 수리만 지원 대상에 포함된 걸로 확인했는데.
이현성에게 들은 내용을 토대로 직접 확인해보니 터무니없는 수준이다.
‘제대로 돼 있는 게 하나도 없어. 어물쩍 지원하면서 돈을 빼돌리는 모양이야.’
가장 많은 돈을 쓴 대장간이 이런 수준이라면 다른 건 안 봐도 뻔 했다.
돈을 세탁하는 방법이야 내가 아는 게 없어도, 지원금이 제대로 쓰이지 않고 있다는 의심은 강하게 든다.
이현성의 보고를 듣지 않았어도 언젠가 의심을 할 정도였다.
‘자금 세탁이야 당장은 상관없는 내용이고. 뒷돈을 찔러준 정황만 빼내오면 돼.’
나는 옆에 있는 릴리아에게 눈치를 보냈다. 그녀가 이현성과 주고받기로 약속한, 일이 마무리 되었다는 사인을 확인했냐는 의미의 뜻이었다.
릴리아는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아직 인가.
이 트롤 새끼들을 더 데리고 다녀야 한다니.
“야, 대표.”
“넵! 각하.”
“너희가 지급한다는 물품들. 그것도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어.”
“알겠습니다.”
100명의 상단 인원들을 내 입맛대로 이끌어 마음 가는 장소로 향했다. 가는 곳마다 변명. 김혁수의 입에서는 죄송하다, 시정하겠다, 온갖 변명만 늘어놓았다.
마음 같아서는 상단 전체 회계 기록이라도 보고 싶은데 이건 적법한 절차를 벗어나는 일이었다.
이현성이 암흑가 인물과 거래를 할 때 바일런 상단의 회계장부도 같이 빼오라 할 걸 그랬다.
아쉬운 마음에 괜한 입맛을 다셨다.
“각하.”
릴리아의 부름에 그녀를 바라봤다. 고개를 끄덕이는 행동이 일을 마무리 지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제야 나는 이 100명으로 구성된 행렬을 멈춰 세우고 그들의 대표인 김혁수에게 말했다.
“이만하면 됐다. 예산은 내가 빌라스 자작과 깊은 얘기를 나눠 보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다름이 아니고, 이것도 인연인데 각하께 술을 대접해도 되겠습니까? 좋은 곳을 알고 있습니다.”
김혁수는 은근하게 그런 제안을 해왔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났다. 얘가 말하는 좋은 장소가 어딘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지 마세요. 각하께선 바쁘신 몸입니다.”
릴리아는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대답했다. 그것도 아주 냉랭한 목소리로.
장부를 빼냈으니 나도 더는 이들에게 볼 일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