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22화
“백작각하. 시키신 대로 알아왔습니다!”
이현성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정확히 10일을 채우고 나서야 보고를 하는 모습이 영 아니꼽긴 했지만 내용에 문제만 없으면 용서해 줄 의향은 있다.
태도를 보니 쓸 만한 내용을 가져온 모양이니까.
“그래. 읊어봐.”
“우선, 저와 바일런 상단과의 관계를 정리한 것부터 보시죠. 저도 부려지는 입장이라 많은 걸 알고 있진 않지만, 아는 한 빠짐없이 적었습니다.”
나는 이현성이 준 서류를 휙휙 건성으로 훑어보고 릴리아에게 넘겨버렸다.
릴리아가 꼼꼼하게 읽어보고 간략히 요약해서 내게 들려줄 거다.
몇 분간 쉴 새 없이 서류를 읽어보던 릴리아는 이현성을 쓰레기 보듯 혐오스런 눈길로 쳐다봤다.
“바일런 상단은 생각보다 악질이네요. 각하, 이자를 고문 기술자에게 맡기면 안 되겠습니까?”
“왜?”
“바일런 상단은 불법노예거래를 중심으로 성장한 쓰레기예요. 바일런 상단이란 이름도 최근에서야 바꾼 것이고요.”
흐음.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이현성을 바라보았다. 그는 면목이 없다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시선을 땅바닥에 처박고 있었다.
“그.... 저는 노예거래에 동조하진 않았습니다...”
“너는 지금까지 얼마나 받아 처먹었어.”
“다 합해서 말입니까..?”
머뭇거리는 이현성에게 얼른 말하라고 턱짓을 했다. 이현성이 눈을 질끈 감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4천 골드 가량 됩니다...”
“많이 해 먹었네.”
“용서해 주십시오! 숨기는 것 없이 말씀 드린 겁니다....”
그보다 노예거래라.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이세계는 노예가 있다. 나도 김준석, 이지혜를 노예의 신분으로 만들려 계획하고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둘은 나를 죽이려 했던 놈들이고. 불법노예거래라 하면 합법적인 절차로 노예가 된 게 아닌 사람들을 주로 다뤄왔겠지.
내 침묵이 스스로를 죽일 방법을 고민하고 있나 짐작했을까? 이현성은 떨리는 목소리로 간청했다.
“저.... 각하. 제 재산 대부분을 이번 일을 알아오는데 사용했습니다. 그러니 한번만 용서를..”
“암흑가와 거래를 했나 보네요.”
“맞습니다!”
릴리아의 추측에 이현성이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한 번도 암흑가를 이용해 본 적이 없는데 실제로 큰돈이 드나 보다.
“알아 온건?”
“제 생각이 맞았습니다. 바일런 상단은 복지부의 자금을 세탁해 줍니다.”
“그게 다야?”
“아닙니다. 빌라스 자작을 포함한 3명의 귀족이 상단과 연관이 있습니다. 한명은 복지부의 보틀러스 남작이고, 다른 한명은 카엘로스 백작입니다. 이걸 알아오는 데 대부분의 돈을 다 썼습니다.”
보틀러스 남작이면 그 돼지 새끼를 말하는 거구나. 간간히 마주칠 때마다 릴리아를 탐욕스러운 눈으로 보던 게 떠올랐다.
카엘로스 백작은 이름을 들어본 기억은 있었다.
“카엘로스 백작이면 만만한 귀족이 아니군요.”
“누군지 알아?”
“1황자 파벌 귀족 중 하나입니다. 중앙 정계의 입지도 얕지 않고 영지도 부유한 편입니다.”
그럼 빌라스 자작이 저 백작 놈을 믿고 나대는 거였나. 그런데 릴리아의 말대로라면 카엘로스 백작이 굳이? 라는 의문이 든다.
“카엘로스 백작은 뒷돈을 받기 보다는 일종의 후원자 관계에 가깝습니다.”
이현성이 덧붙여 말했다.
후원자?
지금 상황에서는 누가 봐도 수상하다.
“어차피 카엘로스 백작도 바일런 상단이 더러운 짓을 일삼는 곳이라는 걸 알고 있을 거잖아.”
“모를 수가 없습니다.”
릴리아가 내 말에 긍정했다.
대체 무슨 관계 길래 바일런 상단의 뒤를 봐줄까. 이현성에게 물어봤지만 아쉽게도 그것까진 모르는 모양이었다.
하긴, 백작의 정보인데 암흑가에서 이현성에게 더 자세히 알려줄 리 없을 만도 하지.
“지금이 기회이긴 한데....”
내가 이 일을 빌미잡으면 빌라스나 보틀러스가 할 수 있는 일은 카엘로스 백작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
‘그러면 일이 좀 많이 힘들어 지겠는데.’
갑자기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냥 가만히 있어봐야 죽도 밥도 안 되는 상황인데. 움직이기는 해야겠고.
내가 침묵을 유지하자 릴리아가 이현성에게 말을 걸었다.
“빌라스 자작과 보틀러스 남작이 뒷돈을 받는 증거는 알아왔겠죠?”
“그것은 아직...”
“쓸모없네요.”
“하지만, 자작의 동선에 의심스러운 점은 파악했습니다.”
이현성은 빌라스 자작이 이틀에 한 번씩 바일런 상단의 안내를 받아 수도 외곽의 저택으로 향하는 걸 얘기해주었다.
“그건 별로 쓸모없어 보여. 돈을 먹였다는 장부 같은 게 있으면 확실할 텐데.”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딴 곳을 덮쳐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어. 명분도 없고, 괜한 짓거리일 뿐이라 생각된다.
“각하. 그래도 라이먼 백작은 연관이 없어 보여서 다행입니다.”
릴리아의 말에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라이먼까지 관련이 있다면 존나 암울했을 거다.
“직접 나서봐야겠어.”
무언가 명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건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
“이봐 용병 놈. 내가 분명 시키는 대로 하라지 않았나?”
화가 머리끝까지 난 빌라스 자작의 목소리가 귀에 박히듯 쏘아졌다. 그의 손에는 내가 작성한 예산안이 잔뜩 구겨져있었다.
“배움이 짧아서 이젠 숫자까지 모르는 것이냐! 왜 5천 골드로 기입되어야 할 것이 2천 골드로 기입돼 있는 거지?”
“언성이 너무 높다고 생각 안 해? 아무리 부관이어도 나는 백작이다. 네가 그렇게 함부로 대할 위치가 아닐 텐데.”
“당장은 내 부관이지. 그리고 시키는 일도 제대로 못하는 머저리기도 하고.”
“대체 뭘 믿고 그렇게 뻗대는 거야?”
“그건 네가 알 바 아니다. 어차피 귀족 사회에서 제대로 대접도 못 받을 용병 놈이.”
빌라스 자작은 분노를 억누른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자작은 구겨진 예산안을 내 발치에다 집어 던지고 말했다.
“다시 써와. 이번엔 제대로 5천 골드로. 알겠나?”
“아니, 너도 읽어봤겠지만 내 의견은 합리적이야. 그리고 생각해보면 내가 자작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할 이유도 없잖아? 존중이 없잖아 존중이.”
발밑에 구겨진 종이를 툭 발로 차면서 말했다. 저 예산안도 릴리아가 합리적으로 작성한 문서다.
바일런 상단에 올릴 금액을 낮추고 다른 곳들에 지원을 하면 더 효율이 좋다는 주석도 여러 문단으로 달려있다.
보기에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오히려 더 효율적인 방법인 것이다.
“시키는 대로 하라고!”
빌라스 자작이 고함을 질렀다.
“그냥... 시키는 대로 해. 일을 한지 한 달도 안 되는 놈이 뭘 안다고 지껄이는 거야. 천한 용병 놈이 뭘 알기나 해!”
나는 분노에 이성을 잃은 빌라스 자작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그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키가 작은 편인 빌라스 자작은 나랑 체구가 제법 차이난다. 거기에 나는 용병생활도 해왔던 사람이라 몸에 근육도 꽤 붙은 편이다.
힘을 주니까 그의 몸이 딸려왔다.
“적당히 해, 시발 새끼야. 과거야 어쨌든 나는 황녀의 남편이다. 네가 계속 이따위로 대하면 2황녀가 가만히 있을 거 같아?”
빌라스 자작은 힘으로 손을 떨쳐내려 했지만 내 악력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아등바등 하는 모양새가 퍽이나 우습다.
타악.
나는 거칠게 멱살을 풀어주고 구겨진 자작의 옷을 툭툭 털어줬다. 빌라스 자작이 내 손길을 쳐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자작에게 차분히 말했다.
“그래. 시키는 대로 할 수도 있지. 근데 내 생각이 더 맞는 거 같으니까 그러는 거잖아. 내가 보기엔 비효율적으로 보인다고.”
“그래서 뭐 어쩌라는 것이냐.”
코웃음 치는 빌라스 자작에게 말했다.
“당장 2천 골드를 급하게 올려서 지원해야 할 이유가 없어. 그동안 바일런 상단은 3천 골드를 가지고도 잘 해왔잖아. 정 네 말대로 하고 싶으면 내가 직접 확인을 해 보고 싶은데.”
그러자 빌라스 자작이 웃기 시작했다. 그는 잠시간 끅끅 거리면서 몸을 들썩이다가 웃음이 멎어들자 말했다.
“네가 봐서 뭘 알기는 하는 거냐? 용병 주제에? 평생 D급 용병을 전전했다 하던데, 대체 가가지고 뭘 확인하겠다는 거냐.”
“그건 네 알바 아니고.”
“가든지 말든지 네 마음대로 해라. 다만 5천 골드의 값어치를 한다면 앞으로는 내 말에 토를 달지 마라.”
“그래, 나중에 내가 네 상관이 되면 아주 행복하게 해줄게.”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네놈 밑에서 일하게 될 바에야 관직을 내려놓고 말지.”
관직을 내려놓을 때 감옥에 처넣어버려 줄 테니 그때까지 자작은 몸 성히 있었으면 좋겠다.
*
“백작님. 카엘로스는 아직 엮기엔 시기상조입니다.”
바일런 상단으로 향하는 길에, 릴리아는 옆에서 걱정스런 어조로 말했다. 릴리아의 걱정도 이해는 된다.
알테온 황자의 파벌인데다가 정치 입지도 탄탄한 편이니 여러모로 나랑 체급차이가 있는 상대다.
“만약 카엘로스 백작과 충돌해야 한다면, 라이먼 백작이나 2황자를 이용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좋은 생각 같은데, 일이 너무 커지진 않을까?”
굉장히 효율적으로 보이는 방법이기는 했다. 일이 너무 커지진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을 뿐이지.
오늘 바일런 상단에 가서 해야 할 일은 하나다. 장부를 빼내오는 것. 그건 이현성이 맡기로 합의를 했다.
정확히는 그가 고용한 암흑가의 사람을 써가지고.
그 덕에 이현성은 파산을 면치 못해서 대출까지 낀 상황이 되어버렸다. 전부 옆에 있는 릴리아가 벌인 일이었다.
채권자는 그녀였으니.
아무튼, 내가 상단에 가면 책임자든 누구든 높은 인물이 튀어나와서 맞이해야한다. 거기에다가 내가 행패를 좀 더 부려서 상단을 헤집어 놓는 사이에 장부를 빼내온다.
‘다른 건 몰라도 자작새끼랑 돼지새끼의 증거는 꼭 찾아야 돼.’
그러면 내가 칼자루를 쥐는 상황이니까 두 놈을 입맛대로 다룰 수 있다.
“곧 도착하겠네요.”
“감회가 새롭네. 바일런 상단 때문에 죽을 뻔 했던 적도 있었거든.”
“백작님이 바일런 상단을 지목한 이유가 그 일 때문이었어요?”
“그렇지.”
그때 오우거를 처음 마주했을 때, 내가 먼저 튀었으면 나뭇가지에 대가리가 깨지지 않았을까.
실소가 나왔다. 다리가 얼어붙어서 곧바로 도망가지 못했던 거였는데.
“오. 건물 좋네?”
“역겹네요. 더러운 노예상인들.”
바일런 상단의 것이 분명한 건물 앞에서 릴리아는 혐오스런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말했다.
그녀는 유난히 노예상인을 싫어하는 눈치였다.
평민 출신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는데 언젠가 기회가 되면 그녀의 과거도 물어보고 싶다.
“어, 저 새끼!”
“아는 얼굴 인가요?”
“응. 아주 시발새끼지.”
처음 아르카나로 올 때 내가 맡았던 의뢰주인 상단 대행자였다. 그가 내 앞으로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백작각하. 상단의 부대표인 서인혁입니다.”
서인혁은 으레 고위귀족에게 보이는 예법을 취하면서 인사를 했다. 서인혁, 그런 이름이었구나.
이 시발 놈.
나를 미끼로 던져버리고 데려온 B급 용병이랑 몸을 내 뺀, 아주 악질인 놈이다. 게다가 노예거래를 해왔다는 걸 알게 돼서 더 좋게 보이지 않았다.
‘그중에는 한국인도 있었겠지?’
노예상인이 사람을 가리겠는가. 돈이 되는 노예라면 누구든 팔아치울 군상들인데. 서인혁의 손에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들의 환영이 보이는 듯 했다.
내가 대답이 없자 서인혁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각하?”
“그래. 바일런 상단의 대표는 어디 있지? 그자도 데려왔으면 좋겠는데.”
“하하. 제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짜악!
곧바로 서인혁의 머리가 돌아갔다. 릴리아의 손찌검에 그의 뺨이 붉게 물들어버렸다.
“건방지게 말 돌리지 마세요. 질문이 뭐였죠?”
“상단의 대표가 어디 있는 지였습니다.”
“그럼 당신이 해야 할 대답은?”
“데려오겠습니다.”
퍼억.
릴리아는 곧장 서인혁의 반대쪽 뺨도 때려버렸다. 전보다 더 강한 힘이 실렸는지 소리도 다르고 서인혁의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앞으로 언행에 주의를 해야 할 거예요. 두 번은 없어요. 그랬다간 당신은 저기 뒤, 기사들에게 끌려가서 하루 종일 매질을 당하게 될 테니까.”
“명심하겠습니다.”
“데려와요.”
서인혁이 상단의 대표를 데려오기 위해 건물로 뛰어 들어갔다. 나는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릴리아를 쳐다봤다.
‘내가 무조건 진다....’
내가 좆밥이었지만 칼을 써본 짬이 있다. 직감적으로, 릴리아가 나보다 더 강하다는 게 느껴졌다.
뺨 한 대 올려친다고 건장한 체격의 서인혁이 휘청거릴 리가 없다.
“각하, 제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아... 아니?”
“다행이네요. 실례를 범할 뻔 했습니다.”
나는 조금 떨떠름해진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생각보다 성깔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