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20화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A급 용병은 오르지 못할 나무였다.
이현성은 A급 용병에만 머물지 않고 간부 자리까지 맡고 있으니 고작 D급 용병이었던 내겐 천외천의 존재였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어도 너무 바뀌었다.
“오셨습니까. 하하....”
제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밀집돼 있는 아르카나에서, 부유한 사람만 드나들 수 있는 고급스러운 카페에, 안절부절 눈치만 보고 있는 이현성의 앞에 마주 앉았다.
데룩데룩 눈을 굴리는 게 흡사 누군가를 찾고 있는 눈치다. 설마 그때 봤던 로아나를 찾고 있는 건가. 그녀는 곁에 없는데.
로아나가 없어도 이현성은 감히 위해를 가할 입장이 못 되긴 해서 걱정은 안 되지만.
“우리 얼굴 안본지 꽤 됐지? 그동안 네 생각이 많이 나더라고.”
“영광입니다...”
커피 맛이
확실히 비싼 이유가 있다니까. 5층의 테라스에서 커피를 음미하며 거리를 구경했다.
괜히 그러는 건 아니고 내가 계속 여유를 부릴수록 이현성의 속이 점점 타들어가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왜 나를 만나자 했지? 도대체 무슨 용건이지? 이런 생각들이 이현성의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섞여서 뇌에 과부하가 일겠지.
“저.... 김준석과 이지혜라는 용병의 최근 행적들을 보고 하겠습니다.”
그 일에 대해서도 물어봤었지.
이현성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우선 내가 시킨 일의 동향부터 보고하기로 결정했나보다.
그 둘의 일은 지금에서야 딱히 의미가 없는데. 독안에 든 쥐, 그렇게 밖에 생각이 안 됐으니까.
“시키신 대로 둘에겐 어떤 의뢰도 맡을 수 없게 조치해 놨습니다. 모아둔 돈도 다 쓴 건지 길바닥을 전전하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계속 눈을 붙여두고 있으니 도망갈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르카나의 거리는 참 활기가 넘친다. 저 아름다운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 틈에 끼지 못하고 비참한 생활을 전전하고 있다니.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입 꼬리가 만족스럽게 올라갔다.
내 기분이 좋아진 걸 파악했는지 이현성이 조금은 자신감을 되찾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놈들을 데려올까요? 말씀만 하시면 두 연놈들을 즉시 앞에 대령하겠습니다.”
“주제넘은 말은 삼가세요. 그대는 각하께서 시키신 일만 하면 되는 겁니다.”
옆에 시립해 있던 릴리아가 냉정한 목소리로 일갈했다. 이현성은 빠르게 눈을 내리깔고 입을 다물었다.
‘만족스럽군.’
이현성을 부른 이유는 빌라스 자작의 일 때문. 그래도 비참한 두 사람의 일을 귀로 직접 들으니까 좀 더 악질의 장난을 치고 싶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두 쌍놈에게 사형선고를 내려야겠다.
“그 둘. 돈이 없어가지고 길바닥을 전전한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빌려줘.”
“네?”
“용병. 제대로 못들은 겁니까? 각하께서 두 번 말씀하게 하지 마세요.”
“아, 알겠습니다.”
이현성은 한동안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곧 그는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으레 나한테 협박하려던 행실 덕분에 내가 무슨 짓을 시키려는지 눈치를 챈 것이다.
나는 그에게 주문을 하나 더 했다.
“걔들과 가까운 사이인 사람이 돈을 빌려주는 편이 더 재밌겠네.”
오히려 그쪽이 더 재밌을 것 같다.
자신들을 도와준 동아줄이 사실은 지금보다 비참한 밑바닥으로 떨어뜨리기 위한 수단이라니. 그들의 마지막 말로는 합법적인 노예가 되는 길 뿐이다.
“두 놈들의 인간관계는 이미 파악하고 있으니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두 사람의 비참한 말로는 묵혀뒀다가 보기로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바일런 상단의 일. 기억하지?”
“넵.”
이현성은 경직된 자세로 내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고 말했다.
“내가 지금 제국의 복지부에 임관됐어.”
“축하드립니다!”
“축하는 무슨. 너도 거기가 별 볼일 없는 데라는 건 알고 있잖아.”
“하하.... 아닙니다, 그... 축하드립니다.”
“축하는 됐고. 말이 복지부지 그냥 기부단체 더라고? 너도 한국에서 살다 와서 알잖아. 사실 여기에 복지라는 게 있긴 하나?”
“전혀 없지요.”
이현성도 복지엔 전혀 신경도 안 써 왔을 거다. 이미 준수한 A급 용병이고 협회의 간부까지 맡았는데 그딴 걱정을 왜 한단 말인가.
본인의 위치를 더 올리는 게 중요하지, 못 먹고 사는 어려운 사람의 일을 신경 쓸 여력은 전혀 없을 터였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아무튼, 복지부는 거의 유사 기부단체나 다름이 없는데. 바일런 상단에게도 돈이 들어갔더라고? 대체 왜일까. 나보다는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거 같은데.”
“어... 음.. 그게 뭐라 얘기를 해야 할지...”
“잘 생각이 안나나 보네.”
“죄송합니다. 며칠의 시간을 주신다면 자세히 정리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시간을 달라고? 그러면 안 되지.
분명 이현성은 바일런 상단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게 확실하다. 더 나아가서 바일런 상단에게 예산을 할애해준 빌라스 자작도 엮여 있을 수 있겠지.
아니면 아쉽겠지만 파헤쳐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 마침 이현성이 내 눈앞에 빌빌 기고 있는데 이런 기회를 놓치면 아쉽지.
릴리아는 내 생각과 동일했는지 이현성을 몰아붙였다.
“각하. 아무래도 이자를 심문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명분은 각하를 위협했었던 죄목이면 되겠죠.”
“네? 저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억울합니다!”
“사실이잖아. 처음 만났을 때 날 죽이려고 했었던 거 기억 안나?”
“아니... 그때는..”
“위협이 아니라 살해하려 했군요? 귀족, 특히 앞에 계신 각하를 살해하려는 죄는 무척 무겁습니다. 당신은 특급 수용소에 갇혀 평생을 고문 받으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네. 평생 고문 받으면 미쳐버릴 거 같은데. 다 인과응보야, 네가 잘못한 걸 어쩌겠어. 그러니 사람을 보면서 덤벼야지.”
이현성의 안색이 시퍼레졌다.
빠져나갈 명분이 전혀 없을 테니까. 죽이려고 했던 게 사실이고 그걸 증명해줄 로아나도 있다.
나름 용병협회의 간부라 해도 너무 정황증거가 뚜렷해서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이다.
“각하, 살려주십쇼! 제발... 한번만 살려주십쇼! 같은 동향 사람 아닙니까...”
“다들 왜 이럴 때만 한국 들먹이면서 동정심을 사는지 모르겠네.”
“제발....”
이현성은 이제 무릎까지 꿇고 자비를 베풀어 달라 빌고 있다. 죽일 생각은 전혀 없다. 나중에 라면 몰라도.
“됐고, 일어나. 그냥 질문에 대답만 하면 되는데 왜 자꾸 사람을 피곤하게 해.”
“바일런 상단의 일.. 말씀입니까.”
“그래.”
“눈깔 굴리지 마세요. 각하께서 기회를 주셨을 때 처신을 잘 하는 게 좋을 겁니다. 평생 빛을 보기 싫으면 말이죠.”
귀족이 연관돼 있구나.
이현성의 태도를 보니까 딱 직감이 왔다. 그러지 않으면 목숨을 쥐고 있는 내 앞에서 망설이지 않았을 테니까.
“현성아 줄 잘 서라.”
빌라스 자작은 연관이 있을까? 이거 참 기대가 되기 시작한다. 확실한 건 바일런 상단은 복지부의 귀족과 연관이 있다.
“제가 아는 걸 빠짐없이 말씀드리면... 살려주시는 겁니까?”
“아무래도 정신을 못 차린 듯 보입니다. 고문기술자에게 하루만 맡기는 게 어떨까요?”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도 문다 하지 않았던가.
이현성은 쥐는커녕 개미만도 못한 차이가 났지만 살길을 열어주는 게 서로가 편하겠지.
“차라리 나한테 줄을 대. 그편이 너도 좋지 않겠어? 네 생각보다 내 힘이 그렇게 약하진 않은데.”
전후파악이 아직 안되긴 했어도 겨우 이현성이 줄을 댈 귀족이면 충분히 비벼볼만 하다.
내 뒤에는 2황녀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지 않은가. 수틀려도 나하나 살아남는 건 무척 쉬운 일이었다.
이현성은 계산을 끝마쳤는지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다른 귀족과 줄이 닿아 있다는 건 오해입니다. 저도 자세한 사정을 전부 알지는 못하지만 바일런 상단이 복지부와 연관이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저는 바일런 상단이 복지부의 예산을 세탁해 주고 있을 거라 짐작하고 있습니다.”
“뭐, 세탁? 그러면 그 돈은 뒷돈으로 다 들어가는 건가? 혹시 라이먼 백작도 연관이 돼 있나?”
“거기까지는.... 저도 모르는 일입니다.”
“정말 모르는 게 맞습니까? 저는 각하와 다르게 자비롭지가 않습니다. 가령 각하 몰래 당신을 고문 기술자에게 맡겨버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정말입니다!”
“흐음....”
릴리아가 이현성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본다. 고문 받는 미래를 떠올렸는지, 이현성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예상과 다르게 이현성은 귀족과 직접적인 연이 없는 건가. 그러면 바일런 상단과 연관이 있는 귀족의 눈치를 보는 거라고 생각해야겠다.
그게 누군지는 몰라도 이현성은 바일런 상단의 눈치를 보고 있었던 거겠지.
“그만.”
이현성을 계속 추궁하는 릴리아를 그만두게 하고 생각을 거듭했다. 내 촉은, 라이먼 백작은 모르겠고 빌라스 자작은 연관돼 있을 거란 의심이 강하게 든다.
어쨌든 예산을 할애해 준건 자작 본인 아닌가.
이유야 어떻든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모를 수도 있지. 하지만 계속 모르면 안 되지. 그러니까 네가 알아와. 그리고 전에 왜 바일런 상단을 두둔해줬는지도 빠짐없이 얘기해야 될 거야.”
“그건... 그쪽에서 일방적으로 지시한 거라... 아무튼 명심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빌라스 자작이라고 들어 봤어?”
이현성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들어본 기억은 있습니다만 빌라스 자작의 자세한 정보는 알고 있는 게 없습니다.”
“그럼 그것도 알아오고.”
“귀족의 뒤를 캐라는 말씀입니까...?”
“그 놈이랑 바일런 상단이랑 관련이 있는 거 같으니까.”
이현성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한다는 선택지 외에는 길이 없다. 당장 죽거나 나중에 죽거나 둘 중 하나인데. 후자를 선택하고 나한테 잘 보여서 살아남는 길을 찾아야겠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얼마나?”
“아무래도 한 달 정도는 주셔야..”
“너무 길어. 10일 이상은 안 돼.”
“10일은 너무 짧습니다.... 제발 자비를..”
이현성의 얼굴은 절망적으로 변했다.
그가 느끼는 심정이 눈에 보였다.
그래도 한 달 씩이나 기다려줄 생각은 없다. 목에 칼이 들이밀어지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해내겠지.
“릴리아, 얘한테 감시할 기사를 붙여둬. 허튼짓 못하게.”
“네. 만약 수상한 행동을 하면 그 자리에서 죽이라고 일러두겠습니다.”
릴리아가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면서 대답했다.
보통 A급 용병이 5성 기사 수준이니까, 비슷한 경지의 기사 대여섯 명을 붙이면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할 거다.
게다가 다른 소속의 기사들도 아니고 황실의 기사니까 더욱 딴 생각을 못 하겠지.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마. 나랑 좋은 관계를 쌓아가는 일이라 생각해. 설마 내가 그렇게 정이 없어 보이진 않겠지?”
“네, 꼭 만족할 성과를 가져오겠습니다!”
“그런데 쓸데없는 내용을 가져온다면 알지?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마.”
“넵...”
이현성에게 맡겨두고 나는 나름대로의 일을 하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