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19화
“마커스. 여기는 원래 청소를 잘 안하나?”
“각하, 그게....”
쯧.
쩔쩔 매고 있는 마커스를 보니 대충 상황이 파악됐다. 빌라스 자작 이거 생각보다 더 치졸한 새끼였네. 이런 장난을 다 치고.
얘는 중간에 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로 보였다.
“사람을 불러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곧 마커스가 데려온 사람들을 동원해 청소부터 시작했다. 한동안 쓰지 않고 관리도 하지 않아서 케케묵은 냄새를 빼는데 고생을 했다.
‘이제야 좀 낫네.’
빌라스 자작은 한동안이 아니라 쭉 비협조적으로 나올 거 같다.
원활하게 활동하려면 그 새끼부터 밟아버리는 일을 첫 순위로 둬야겠어.
“백작 각하. 이건 그간 자작님의 밑에서 일 해온걸 요약한 자료입니다.”
“고생했다.”
“오늘은 이걸 읽어보시고 실무는 내일부터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그만 나가보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고 보면 마커스도 어찌 보면 불쌍한 놈이야. 내가 부관으로 부임됐으니 마커스는 직장을 잃은 거나 마찬가지다.
직위가 올라가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낮아졌으니 일할 맛이 영 나지 않을 거다.
귀족이 아닌 마커스가 온갖 고생을 해서 올라온 빌라스 자작의 부관이란 자리를 그냥 빼앗아버리다니.
역시 권력이 짱이긴 해.
어디 보자.
마커스가 갖다 준 서류를 쭉 정독하기 시작했다. 우선은 복지부의 구조부터 파악하는 게 좋겠지.
대가리인 라이먼 백작 밑으로 3명의 부서장이 있고, 빌라스 자작이 부서장 중 한명이네. 그것도 예산을 담당하는.
“아... 조졌네..”
아무리 봐도 빌라스 자작을 포함한 3명의 부서장은 서로 사이가 좋을 느낌이다. 상부상조 하겠지? 그래도 놈들이랑 라이먼 백작이랑 사이가 안 좋으면 나한테는 희소식인데.
일단 이 문제는 나중에 생각해야겠다.
빌라스가 복지부 내에서 예산을 담당하고 있어서 그 부관이었던 마커스가 하는 일은 대개 예산에 관련돼 있었다.
황실에서 매년마다 책정해주는 금액이 5만 골드. 복지부는 매년 5만 골드의 예산을 가지고 운영을 해왔다.
‘5만 골드면 엄청난 액수이긴 한데 한 관리처가 사용하기엔 좀 적은 양 아닌가.’
개인이 가지기엔 꿈도 꾸지 못할 금액이지만 제국 전체의 복지를 아우르기엔 너무 터무니없는 액수가 아닌가싶다.
다행히 나한테는 상담할 역할인 리엘라가 붙여준 시녀가 있었다.
릴리아는 시녀지만 꽤 똑똑하기도 한 유능한 인재였다.
“릴리아, 보통 영지에서 한해 걷는 세금이 얼마나 돼?”
“평범한 남작의 영지 수준으로 따지면 통계적으로 40만 골드의 세금을 걷습니다.”
“뭐? 그렇게나 많이?”
“많지는 않습니다. 제국 법에 의하면 남작은 아무리 영주여도 세금을 30%이상 매길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 법도 있었어?”
“세율을 제한 없이 부과할 수 있는 귀족은 백작 이상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너무 심한 수준의 세율을 부과할 수는 없지만요.”
백작 씹 사기잖아.
똑같은 귀족인데 왜 백작부터 각하의 칭호가 붙는지 이제 이해가 되네. 잠깐만, 그러면 영지를 갖고 있는 백작이 버는 돈이 얼마라는 거야.
내 궁금증은 릴리아가 해결해주었다.
“변경백인 브룬달 가문이 한해 500만 골드 정도의 세금을 걷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곳은 국경이니 황실에서도 어느 정도 눈을 감아주는 편이기도 하고요. 편차가 있으나 보통 200만 골드 이상으로 알고 있습니다.”
“돼지 새끼들이네.”
릴리아가 피식 웃었다.
“5만 정말 말도 안 되게 적은 거 맞지?”
“네. 이런 상황이라면 매년 실적이 없는 이유가 납득이 갑니다.”
어쩐지 복지부로 임관되는 길이 너무 순탄한 이유가 다 있었다.
이런 쓰레기 부서를 알아서 지원해줬는데 빌라스 자작의 부관으로 가라니. 클레이튼 대공도 너무한 거 아닌가.
“일단 이거부터 좀 봐줘. 사실 나는 이런 거 봐도 아직 잘 모르잖아.”
나는 마커스가 준 서류들을 릴리아에게 건네줬다.
주로 복지부의 예산이 어떤 식으로 쓰여 왔는지 기록을 한 것인데, 릴리아가 먼저 보는 편이 좋겠지.
혹시나 빌라스 자작이 비리를 저지르고 있다면 내 눈보다 더 예리하게 잡아낼 거다.
“큰 문제는 없어 보이네요. 누락된 부분도 없고요. 보기에는 예산을 책정한 이유가 타당합니다. 다만, 예산을 책정한 이유가 타당하다는 거지 일을 잘 한다고 보기는 어렵지만요.”
뭐, 복지부는 터무니없는 예산이 큰 이유겠지만 이렇다 할 성과 자체가 거의 없는 곳이었으니까.
릴리아의 평가가 쓴 이유는 그 때문일 터.
“그래? 뭐가됐든 생각보다 빌라스 자작이 일은 똑바로 하고 있다고 봐야 하는 건가.”
“빌라스 자작과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릴리아가 궁금한 듯 물어왔다. 그녀는 말이 시녀지 비서라고 봐도 무방했다.
무엇보다 리엘라가 신용하는 사람이니 믿어도 된다.
“처음부터 반말을 하더라고. 용병이었느니 하면서 무시를 하기도 했고. 그래서 나도 한소리 했지. 앞으로 이런저런 시비가 많이 붙을 거 같아.”
“그랬군요. 참 잘 하셨어요.”
“무슨 소리야. 네가 좋은 의미로 그런 말을 한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
“잘 아시네요.”
너무 성급하긴 했다. 감정적으로 대할게 아니라 적당히 비위 맞춰주다가 제대로 한 대 후려치면 되는 거였다.
“그래도, 내가 굽히면 리엘라의 평판도 낮아지는 거니까. 빌라스 자작이 별로 대단한 귀족도 아니고.”
“네, 그러시겠죠. 덕분에 제 머리만 더 아파지겠네요.”
“어쩔 수 없어. 릴리아는 내 시녀잖아.”
“황녀전하의 시녀입니다.”
“그게 그거지.”
내 억지에 릴리아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저래보여도 의외로 정이 많은 사람이라 알아서 잘 해줄 거다. 릴리아는 귀족 출신이 아니라서 처음부터 편한 느낌이기도 했고.
‘나도 귀족이 되긴 했는데 아직까진 몸에 안 맞는 옷을 입은 느낌이야...’
좆같은 귀족들의 어투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차라리 용병시절의 사투리 느낌이 좋았었는데.
그립다 그때 시절도.
“부관의 일은 예산을 책정해서 빌라스 자작의 서명을 받는 일이 가장 크네요.”
다른 두 부서가 뭘 하겠다고 하면 내가 예산을 책정하고 빌라스 자작의 허가를 받으면 된다.
“결국 빌라스 자작의 허가가 없으면 예산이 책정되지 않습니다. 이걸 대체 어쩌시려고 하는 건지.”
릴리아가 한숨을 쉬었다.
골 때리긴 하네.
그 새끼가 대놓고 강짜를 부리면 좆도 안 되는 거니까.
그런데 어차피 그놈이랑 잘 지내든 아니든, 꼭두각시처럼 지내야 하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
황제는 시간이 지나면 체면상 보다 더 나은 직위를 내려주겠지만, 그렇게 무능하게 지금보다 높은 자리를 꿰 차봐야 의미가 없잖아.
“일단 빌라스 자작의 협조를 얻고 복지부 내의 입지를 다지는 방향을 우선으로 해야 할 거 같습니다. 방법은 제가 찾아보도록 하죠.”
“아니야.”
“그럼 달리 좋은 방법이 있습니까? 누가 처음부터 자작과 관계를 엉터리로 만들어버려서 저는 잘 생각이 안 나네요. 그 누구의 성이 이 씨라는 것만 알고 있는데 백작님은 혹시 아시나요? 아~ 황녀전하께 물어보면 되겠네요.”
“아... 그것만은 봐줘.”
한 시간 이상의 끔찍한 잔소리는 별로 듣고 싶지 않아.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말하는 릴리아에게, 내가 생각했던 바를 얘기했다.
“듣고 놀라지 마.”
“그럼요.”
“나는 자작을 협박할 생각이야.”
“네?”
“빌라스 자작을 협박할 생각이라고. 내가 볼 때 그 새끼 영 좋아 보이는 놈으로 안 보이거든.”
“백작님!”
“아 깜짝이야. 왜 그렇게 크게 불러. 놀랐잖아.”
귀청 떨어지는 줄 알았다. 저 가녀린 체구에서 어떻게 저런 큰 목소리가 나오는지 원. 내가 못할 말을 했나.
암만 봐도 빌라스 자작은 비리 잘 저지르게 생긴 귀족인데.
‘오만하고. 딱 봐도 지밖에 몰라 보이는데 그런 놈이 비리를 안 저지르면 그거야말로 이상하지.’
여기는 비리를 저지르기에 최적화되지 않았나.
존나 아무도 관심 없는 그런 곳이니까. 5만 골드도 다른 귀족에겐 푼돈일지 몰라도 솔직히 적은 금액은 절대 아니다.
애초에 영주가 세금을 걷어도 영지를 운영하는 비용도 꽤 나가지 않을까?
적어도 빌라스 자작은 영지가 없으니 그런 일은 없잖아. 꽁치면 죄다 자기 주머니에 들어가겠지.
짝짝짝짝.
상념에 잠겨있었는데 박수소리가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다. 여기는 나랑 릴리아 뿐이니 박수소리는 그녀의 것이다.
옆을 돌아보니까, 릴리아는 한쪽 입 꼬리를 말아 올리고 있었다.
“백작님. 그걸 말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당연히 말이라고 하지.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릴지도 모른다니까?”
릴리아는 가늘게 뜬 눈으로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그녀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 방법인가 보다.
내 생각에는 정말 괜찮은 방법인데, 마침 뒤탈 없이 해줄 친구도 있지 않은가.
“한 번만 믿어봐. 마침 그런 일을 뒤탈 없이 잘 해줄 사람도 있어서.”
“뒤탈이 없다는 건 실력이 좋다는 건가요? 아니면...”
“네가 생각하는 게 맞아.”
뭣하면 쓰고 버리기에 적합한 패라는 뜻이었다.
이현성에겐 비참한 처지겠지만 그도 나를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었으니 피차일반이다.
“그리고 그놈은 공짜거든. 돈이 안 들어.”
“참 쓸모 있는 사람이네요.”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아무튼 그거 줘봐. 나도 읽어보긴 해야지.”
아무리 내 시녀고 옆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줄 사람이어도 주체는 내가 되어야 한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무능력한 사람이 될 수는 없잖아.
“릴리아, 가서 마커스에게 외출 좀 하겠다고 말하고 와. 어차피 오늘은 할 일도 없다고 했으니까 상관없겠지.”
“알겠습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오랜만에 따까리 이현성을 만나야겠다.
겸사겸사 퍽킹 코리아 듀오가 잘 지내는지 확인도 해야지. 광산에 팔아버리기로 약속했는데 남자가 돼서 내뱉은 말은 지켜야 하지 않은가.
“이건 뭐 마커스가 일을 잘하는 건지 자작 새끼가 일을 잘하는 건지 구분이 안가네.”
아마도 전자겠지.
빌라스 자작은 거의 결제를 해주는 입장이니까 대부분의 실무는 마커스가 담당하고 있을 거다.
내 눈에도 별 이상한 부분은 없다, 없는데 이건 순 기부단체잖아.
무슨 이런 식으로 운영을 했지? 보면 죄다 돈을 기부한 내역의 예산을 책정해 준 꼴이다.
“복지부는 기부 천산가.”
복지부가 아니라 장학재단이라고 해야 더 옳은 표현이 아닌가 싶다. 이러니까 효율이 없지. 이건 복지가 아니다.
“이건 뭐 국민연금 하나만 만들어도 애들은 좋아서 죽을 판인데. 얘들은 정책은 신경도 안 쓰고 죄다 기부만 하고 다녔네.”
한국에서 가장 대표적이었던 복지 중 하나가 국민연금이었다.
나야 그간 용병으로 발버둥 쳐서 그깟 복지 따위야 신경도 못쓸 신세였지만, 다른 사람들은 한번쯤 생각해볼 법 한데.
“복지부엔 한국인이나 다른 지구 사람들이 없나.”
아마도 그럴 거라 생각된다. 아니면 있어도 존나 푸대접을 받아서 뭘 할 수 있는 위치가 안 되거나.
“어쨌든 나만 개꿀 빠는 거지.”
우매한 제국의 백성들에게 선진국의 복지 수준을 보여주고 나를 찬양하게 만들어야지. 역시 리엘라의 선택은 옳은 거 같다.
정치의 힘은 명분. 그 명분에 가장 큰 힘을 보태주는 게 제국을 이루는 수많은 백성들이니까.
‘음? 이게 뭐야. 익숙한 이름이 보이네?’
꽤 합리적으로 잘 책정된 예산들 중에 꽤 재밌는 걸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