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15화
결혼식은 큰 문제없이 진행되었다.
황실의 위엄에 비해 조촐한 편이었지만 불만은 없었다. 오히려 성대했으면 불편했을 거다.
하객은 대공을 필두로 한 반대파벌 귀족의 핵심 인사들과 황제파벌의 핵심 귀족들.
리엘라의 가족들도 처음 보게 됐는데 역시나 호의적인 시선은 아니었다.
황제는 전과 같은 무덤덤한 얼굴로, 황비는 나를 쳐다보기도 싫은 기색이었다.
처음 본 1황녀는 3황녀보다야 낫지만 비슷한 권위주의적 모습이 엿보였다.
아무래도 친하게 지내기는 글렀다고 봐야했다.
‘저놈이 1황자....’
아르칸 제국은 아직 황태자를 임명하지 않은 상태였다.
1황자는 죽은 1황비의 적자다. 1황녀의 친남매기도 했다. 2황비의 자녀인 2황자와 리엘라 그리고 3황녀랑은 배다른 남매인 셈이다.
같은 황족이어도 정통성을 자세히 따지면 1황비 소생의 첫째인 1황자가 앞선다.
정세로도 2황자보다 앞서고 있다.
‘유일하게 호의적이네.’
그는 다른 황족과 다르게 사람 좋은 웃음으로 반겨주고 있었다.
그간 리엘라에게 단련되어, 그가 보이는 웃음이 마냥 좋은 뜻이 아닐 거란 의심을 했다.
“이상으로 둘은 부부가 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한다. 오늘 부마가 탄생했으니 연회를 열겠다. 많은 귀족들이 참석하여 둘을 축하해줬으면 좋겠군.”
길었던 절차가 끝나고 박수소리가 들렸다.
리엘라와 마주잡은 손에서 악력이 느껴졌다. 나도 가녀린 손을 강하게 잡아주었다.
*
클럽이라면 신날지 모르겠는데 귀족들의 연회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잔잔한 오케스트라 음악..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중앙에서 리엘라와 춤을 춰야 했을 때는 고역이었다.
사교춤을 배울 때는 몰랐는데 실전은 녹녹하지 않았다. 어렵다고 느끼기 보단 창피한 쪽으로.
근처에 깔린 많은 음식들이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리엘라는 황비가 불러 잠시 자리를 비웠다. 나를 빼고 리엘라만 데려가는 행동은 무언의 압박이나 다름없었다.
너는 내 사위가 아니니 겸상할 생각은 하지마라, 대충 그런 뜻.
최대한 품위를 지키면서 음식을 먹고 있었는데 1황자가 다가왔다.
“하하. 어머니가 좀 극성이지? 너무 서운해 하지 말게.”
“괜찮습니다. 2황비님의 마음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내 어깨를 두드려주는 1황자에게 최대한 예를 갖춰서 대했다. 1황자는 내 행동에서 딱히 문제를 삼지 않고 호탕한 웃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악수를 권하면서 말했다.
“알테온 아르카옌일세. 다른 형제들은 몰라도 나는 매부가 그리 싫지 않아. 아무렴 내 여동생의 남편인데 반기지 않을까. 편하게 형님이라 불러줬으면 좋겠어. 나도 편하게 대할테니.”
“안 그래도 그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동생에게 소개시켜줄 자들을 데려왔어.”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알테온이 데려온 귀족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며 안면을 익혔다. 알테온이 옆에 있어서 그런지 다들 예의바른 몸짓이었다.
‘음.... 1황자의 가장 큰 뒷배인 대미어 공작은 안 보인다.’
알테온 아르카옌이 소개해준 무리에는 없었다.
공작을 대동하지 않은 것은 아직 1황자는 나를 쓸 만한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은 건가.
어느새 정치 쪽으로 자연스레 머리를 굴리게 됐다.
“동생은 왜 복지부의 일을 하려 하는가? 흠.. 좀 더 근사한 일을 해도 될 터인데.”
“근사한 일이라면 무엇을 말하시는 겁니까?”
“요즘 마도공학이 워낙 유망하잖나. 게다가 동생은 마도공학을 발전시키는 이들과 동향 사람이라면서! 그들을 지휘하는 건 참 매력적이지 않겠나?”
확실히 매력적인 말이었다.
마도공학은 발전 속도가 가파른 상태다. 가치가 점점 더 급상승할게 분명한 코인이다.
신분이 깡패라고 부마인 내가 그쪽 계열에서도 한자리 해먹을 수 있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물론 형님의 말이 맞습니다. 그래도.... 제가 그런 일을 맡기엔 눈치가 좀 보이지 않습니까. 하하..”
“요컨대 동생은 눈치가 보여 복지에 관심을 뒀단 말인가?”
“그런 셈이지요.”
“그렇군.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하게. 술 상대라도 해주겠네.”
“빨리 형님을 보러 갈 일이 생겼으면 좋겠네요.”
알테온과 따르는 무리들이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연회는 인맥을 쌓거나 돈독히 하는 의미가 짙어서 그들도 바쁠 터였다.
정작 만나보고 싶은 상대는 언제쯤 다가올까. 내가 기다리는 귀족은 이모르트 백작이었다. 리엘라는 분명 그가 접촉해올 거라 예상했었다.
내 생각도 그녀와 다르지 않았었고.
‘양키 새끼라 그런지 알아보기가 힘드네.’
한국인이거나 아시안 계열이었으면 어렵지 않게 찾을 텐데. 이계인은 서양인과 비슷해서 이모르트 백작을 특정하기 어려웠다.
리엘라는 그가 접촉할거라 예상했으니 기다리면 오겠지. 리엘라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헬로.”
익숙한 영어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술잔을 들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제임스 이모르트?”
“오 쉣. 꼰대처럼 딱딱하게 그러지 말고 그냥 제임스라고 불러.”
“그러지.”
잔을 들어서 제임스와 건배를 했다.
목에 알싸한 알코올이 넘어가니 절로 인상이 써졌다. 제임스는 술을 즐기는지 탄성을 질렀다.
“크으.... 술맛 하나는 지구보다 나아. 아까부터 널 보고 있었는데 전혀 눈치를 못 채다니. 역시 넌 평범해.”
“마나를 다룰 줄 모르니 당연한 거지.”
“와.. 정말 황녀랑 어떻게 결혼한 거야?”
제임스는 내 이곳저곳을 살펴보다가 다리사이로 시선이 멈췄다.
“보기보다 대단한 놈일지 모르겠어.”
제임스의 시선이 달갑지는 않았으나 양놈한테 꿀리지 않을 정도는 된다고 생각한다.
오늘밤 사용예정이고. 아무튼 제임스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 좋았다.
“찾고 있었는데 다행이야 제임스.”
“나를?”
“응. 같은 지구잖아? 내가 용병생활을 할 때만 해도 네 얘기를 얼마나 부러워했는데.”
“내가 성공한 삶의 표본이긴 하지. 지금은 네가 존나 부럽지만.”
“너는.... 조금 부족해 보이는데?”
나는 제임스의 다리사이를 보면서 말했다. 농담의 의도였고, 제임스는 이해했는지 웃음이 터져버렸다.
“아... 역시 동향 사람이라 그런지 고리타분하고 깐깐한 늙은이들과 달라. 아무튼 왜 찾았어? 아직도 내가 부러운 건 아닐 거고.”
제임스 이모르트는 웃음이 멎자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대했다.
신병인 나와 달리 제임스는 귀족사회 물을 먹은 상병. 나는 솔직함으로 무장하고 말을 꺼냈다.
“뭐겠어. 서로 돕고 살자는 거지. 내가 적응하기 빡세다는 거 너도 알고 있을 거 아냐.”
“흐음... 서로 도울 일이 있을까?”
“뭘 그렇게 빼? 야, 솔직히 혹시 모르잖아. 나 부마라니까?”
“그런 것치고 사이가 막 좋아 보이진 않던데...”
“넌 결혼 안했지?”
내가 알기로 제임스는 미혼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제임스에게 이어서 말했다.
“만약 네가 결혼을 했어. 그리고 딸이 태어났어. 그 딸이 웬 남자랑 결혼한다고 생각해봐. 기분이 어떻겠어?”
“존나 엿 같을 거 같아.”
“그런 거야. 내 말 이해해?”
“어.. 그러니까 점점 괜찮아질 거다 그런 의미?”
나는 제임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긍정해주었다. 일리는 있네, 라고 제임스가 중얼거리며 턱을 쓸었다.
“네 말대로 돕고 사는 건 몰라도 나랑 좋은 사이를 유지하는 정도는 너도 바라는 일 아니야?”
“그건 그렇지.”
“그러다보면 서로 도울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
“뭐, 늙다리 귀족 보다는 네가 더 편해 보이긴 해.”
“당연하지. 넌 내가 꼰대로 보이냐?”
물론 싸가지 없는 놈들한테는 꼰대가 될 수도 있었다. 귀족들한테 적당히 갑질도 좀 해주고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나는 도움 될 정보가 있는지 캐물었다.
“지구인 출신 귀족들은 모임 같은 거 없어?”
“얼마 되지도 않는데 모임은 무슨. 가끔 술 한 잔 하기는 하지.”
“다음엔 나도 끼워 주냐?”
“걔들한테 물어봐야지. 좋다고 할 거 같긴 한데.”
제임스와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그가 작게 속삭였다. 이젠 내 부인이 된 리엘라가 오고 있다고.
6성 기사부터는 확실히 강자의 반열이어서 기감이 넓은 것 같았다. 제임스가 한쪽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했다.
“황녀전하를 뵙습니다.”
“그대가 이모르트 백작인가?”
“기억해주셔서 영광입니다.”
“앞으로 더욱 발전해 백작의 힘이 제국에 보탬이 되면 좋겠구나.”
“물론입니다.”
“일어나라.”
역시 신분이 깡패였다.
어지간한 귀족이 아니면 리엘라의 신분에 비빌 수가 없지.
“나는 제국의 황녀이기도 하지만 백작부인의 신분이기도 하다. 지금 하는 말은 부인으로서, 내 남편을 잘 부탁한다고 하고 싶구나.”
“물론입니다.”
제임스는 다음에 얘기하자는 눈빛을 주고 자리를 비켰다. 리엘라가 오고 나서 접근하는 귀족들이 더 많아졌다.
대부분 권세 있는 가문과는 거리가 먼 귀족들이었다.
소위 잔챙이들. 나한테 떨어질 콩고물은 전혀 없었으니 리엘라를 노리고 접근한 거였다.
오늘 유부녀가 되긴 했지만 여전히 건재한 2황비의 자녀였으니까.
그러고 보니 2황비는 리엘라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능숙하게 귀족을 상대하고 있는 리엘라에게 묻고 싶은 마음이 생겼지만, 물어볼 틈이 생기지 않았다.
“남편이 피곤한 듯 보이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서 쉬겠다.”
나는 리엘라의 손에 잡혀서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진한 향수냄새가 가득하던 실내를 벗어나 시원한 바람을 쐬니 답답한 가슴이 풀렸다.
“힘들었나요?”
“조금? 무슨 말이 그렇게 많은지.. 늙은이들 속이 다 보이던데.”
“점점 제 황녀로써 가치는 사라지겠지만 아직은 건재하니까요.”
나는 리엘라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내 것과 같은 모양의 반지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최근 2달간의 일은 정말이지.... 꿈만 같아. 너무 비현실적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야.”
리엘라의 대답은 없었다.
다만 그녀를 매만지던 손등이 꼬집혔다.
“후회 안하지?”
“당신이 아니었다면 귀족가문이나 다른 나라에 팔려가서 하루하루 시들어 갔을 거예요. 제가 선택해야 후회도 덜 하지 않겠어요? 전 후회를 하더라도 제 선택이 있는 삶이 좋아요.”
도도한 표정으로 말하는 리엘라는 아름다웠다. 로아나도 너무 아름다웠지만, 리엘라처럼 타고난 고귀함 그런 게 없었으니까.
“솔직히 그동안 많이 참았다고 생각해.”
똑똑한 그녀는 무슨 말인지 이해했을 거다. 그러니까 지금 리엘라는 눈을 감고 있지 않은가.
리엘라의 붉은 입술을 보다가 키스했다. 꾹 닫혀있는 말랑한 입술을 혀로 두드렸다. 그러자 조심스럽게 열리기 시작했다.
“흐읏.”
그녀의 입에 내 혀가 들어가자 놀랬는지 소리가 나왔다.
그간 그녀가 했던 스킨십이라곤 어린애 수준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긴장한 듯 굳은 리엘라의 등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혀를 움직였다.
츄읍 츕 츄으으읍.
리엘라도 술을 마셨는데 알코올 맛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런 걸 느낄 겨를보다, 가장 고귀한 여자가 내 것이라는 원초적 욕망이 머릿속을 가득 지배했다.
아기 새처럼 열심히 내 혀를 받아들이는 리엘라에게서 입술을 땠다.
“하아...”
내 가슴에 기대어진 아름다운 얼굴이 살짝 붉어져서 가쁜 숨을 내뱉었다. 나는 리엘라의 머릿결을 정리해주며 다시 입을 맞추려 했다.
“방으로....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