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3화 〉13화 (13/44)



〈 13화 〉13화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황제는 빈말이 아니었는지 결혼을 밀어붙이려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거처를 리엘라의 궁으로 옮기게 되었다.
덕분에 알음알음 소문이  뻔 했지만 황제가 입막음을 한 것인지  소동은 없었다.

이 호화스러운 궁에서 생활한 소감을 짧게 표현하면, 존나 힘들었다.
황녀와 결혼은 그냥 식만 올리고 땡, 이라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품위. 예법. 역사. 이딴 것들을 배워야 해서 공부의 연속이었다. 무조건 해야 하는 일이라는 걸 나도 이해하고 있어서 열심히 했다. 익숙해지지가 않을 뿐이지.

사실 분에 넘치는 생활이라 투정은 말도  되는 것이었다. 나를 가르치는 일은 리엘라가 직접 했다.

“많이 나아졌네요.”
“열심히 하긴 했지.”
“그래도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 건 알고 있죠?”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길이 멀었다.

“어제 폐하께서 무슨 말을 했나요?”
“아 그거. 일단은 나도 뭔가 일을 하긴 해야 한다더라. 황실의 일원이 되어서 마냥 놀기만 하고 있을 거냐고. 하고 싶은 일은 없느냐. 내 생각을 물어보셨지.”
“대답은요?”
“알겠다고 하고 생각을 좀 해본다 말씀드렸어.”
“잘했어요.”

어제 황제에게 갑작스럽게 불려나갔다.
당황스럽긴 했는데 막상 가보니 좋은 내용이라 생각돼 다행이었다.

“폐하께서 그래도 딸이랑 결혼할 사위라고. 챙겨주시려 하는 거 아닐까?”
“그러진 않을 거예요. 비난의 화살을 나눠서 받으려는 거겠죠.”
“응?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리엘라는  반문에 조목조목 설명 해주기 시작했다.
황제가 그런 말을 한 이유는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 나를 사실은 능력 있는 놈이라고 포장을 해버릴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이를테면 당장 반발을 억제하고 나중에 욕을 먹어도 같이 먹자는 뜻이었다.

“그럼... 폐하도 손해 보는 거 아니야? 어쨌든 나를 능력 있는 사람으로 만들었잖아.”
“손해날게 있나요? 애초에 책임은 원래 폐하가 전부 감당해야 했잖아요? 은근슬쩍 당신한테 당근을 주면서 훗날 책임을 떠밀려 하는 거죠.”

시발 놈이네.
장인어른 될 사람이 사위에게 뒤통수를 치려고 해?
리엘라의 말은 틀린 게 하나 없었다.
황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결혼을 밀어붙여 준다 했으니까. 달리 말하면 비난도 황제가 감당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리엘라를 슬며시 쳐다봤다.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는 게  대답을 기대하는 낌새였다.

“음... 그럼 어떡하지.”
“글쎄요? 어쩌면 좋을까. 잘 생각이 나질 않네요.”

아무래도 딴청을 피우는 게, 리엘라는 먼저 알려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러면 내 생각을 먼저 말하긴 해야지.
여러모로 생각을 넓혀갔다.
결론은 받아들이는 편이 낫지 않겠나 싶었다.

“받아들이는 게 좋아 보여.”
“흐음, 이유는요?”
“뭐가됐던 기회가 될 수 있잖아.”
“30점짜리 대답이네요.”

그럼 70점이 모자란 건가. 정치는 너무 어려웠다. 감각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생각은 드는데 딱 거기까지였다.

리엘라의 작은 입술이 달싹였다.

“당신이 주도적으로 움직여야 해요. 이왕이면 폐하가 내려주는 자리보다는 당신이 정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폐하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건 동의하는 거지?”
“네. 그래서 당신은 무슨 일을 할지 생각을 좀 해봐야 해요. 저녁까지 제게 답을 들려주세요.”
“알겠어.”

리엘라는 나한테 정치 식견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아직 본적 없는 1황녀, 골빈 3황녀랑 다르게 리엘라는 정말 똑똑했다.
그녀가 내준 숙제를 해야 하니 열심히 생각을 해봐야겠다.

잘 모르겠다.
저녁은 다 되가는데 아직 결론이 나질 않았다. 로아나도 못 본지  지났는데 뭐하고 있으려나. 잡생각만 가득차서 큰일이었다.

떠오르는 키워드는 권력의 중심부.

“아무리 낙하산이어도 대기업 임원급으로 바로 꽂히진 않을 텐데.”

내가 귀족무리였으면 목이 찢어져라 반대했겠다 싶었다.
리엘라에게 제국의 정치판이 돌아가는 상황은 어느 정도 배웠다. 크게 친 황제 파벌과 반 황제 파벌들.
내가 결정을 하지 않으면, 황제는 다루기 쉬운 자기 파벌에 나를 던져버릴 거 같다.

“그래, 일단 황제 파벌에서 권력을 야금야금 키울 수 있는 곳을 생각해 봐야지.”

나는 모르는 사람이 보면 황제 파벌로 생각되기 최적의 위치다. 일단은 사위니까.
다른 귀족의 무리보다는 녹아드는 난이도가 낮아 보인다.

정치는 인맥 아니겠는가. 아랫사람 뒤를 봐주고 윗사람 똥을 닦아주면서. 배신도 때리고 그러다 당하고. 서로 오물 묻혀가며 살아남아 가는 곳.
무리에 어울리기는 황제파가 더 쉬울 가능성이 높다.

“감찰부.... 괜찮을  같은데?”

감찰부는 황제가 장악하고 있었다.
지분율로 따지면 7할 정도 황제파벌 귀족들이 활개치고 있었다.
쪽수로 밀리다보니 감찰부 내에서 반 황제파가 힘쓰기 어려운, 쉽게 말해 황제의 수중에  권력기관이었다.

우선 여기로 들어가서 반대파벌 귀족들 좀 다져주면서 입지를 다지는  베스트 같은데?
상황을 가정하고 점점 넓혀가다 보니 가능성이 보였다.

“이거다!”

고민이 해결되었다.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저녁이 되길 기다렸다.

궁에서 가장 기대되는 순간을 꼽으라면 밥을 먹는 시간이 첫 번째였다.
결혼식 후에는 리엘라와 잠자리가 제일 행복하겠지만, 지금은 식사시간이 가장 행복하다 느꼈다.

일반인은 꿈도 못 꿀 산해진미들을 원하는 만큼 구애받지 않고 먹을 수 있다. 항상 리엘라가 겸상하고 있어서 심심하지도 않았다.
티타늄 수저와 가정을 이루는 건 정말 최고였다.

“나이프를 쓸 때는 접시에 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이건 몇 번을 해도 아직 익숙해지지 않아서.”

대체 고기를   어떻게 소리가 나지 않도록 하라는 거지.
리엘라의 우아한 손놀림을 보면 말이 안 되는 행위는 아닌데. 존나 어려웠다.
이런 생산적이지 않은 일에도 귀족들은 트집을 잡는다 하니까 어쩔 도리는 없었다.

“생각은 해보셨나요?”
“응. 이번엔 80점은 될  같은데?”

리엘라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는 자신감을 얻고 생각했던 바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감찰부 쪽을 생각했어. 여기가 제일 적합할 것 같아.”
“그래요?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이유를 들려줄 수 있겠죠?”
“감찰부는 황제파벌이 장악하고 있잖아. 나는 이래봬도 사위니까 누가 봐도 황제파벌이라 생각할 수 있지. 그럼 거기서 녹아들기도 쉬울 테고 반대파 귀족들을 좀 조져대면 황제의 신임도 사지 않을까? 권력도 점점 생길 거고.”
“언행에 주의를 해야겠어요. 조져댄다니 그런 상스러운 말은 쓰지 말아요. 당신도 점점 귀족의 품위에 익숙해져야 해요.”
“넵....”

리엘라는 이런 부분에서 깐깐한 선생님이었다. 그런 것치곤 자기 아버지를 황제라니 하는 언행에 주의를 주진 않았지만.
그녀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정치에 발을 들인지 얼마 안 된 사람치고는 괜찮은 생각을 했어요. 누구라도 생각할법한 방법이지만 당신처럼 배움이 없던 사람에겐 그럴듯한 대답이죠.”
“어.... 혹시 딱 생각한 만큼의 대답이었어?”
“네.”
“나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그럼 그렇게 할래요? 당신은 내 남편이니 얼마든지 의견을 존중해 줄 수 있어요. 물론 감찰부로 간다면 쉽지는 않을 테지만.”
“쉽지는 않다니?”
“당신이 저와 결혼한다고 해서, 황제 파벌의 귀족들이 반길 거라는 생각은 오산이에요. 어쩌면 다른 귀족들보다 당신을 더 싫어할 가능성이 크죠. 게다가 당신이 감찰부로 가겠다면 반대가 굉장히 거셀 거예요.”
“그런가...”
“괜찮아요. 점점 나아지면 되는 거니까. 너무 시무룩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생각한대로 해볼래요? 아니면 제 생각대로 할래요?”
“알려줘. 더 좋은 방법으로 가야지.”
“그래도 괜찮겠어요?”

리엘라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괜찮아. 효율적인 방법으로 가야지. 나도 아내를 존중해야 하고. 어쨌든 그.. 우린 이제 가족이잖아...”

괜히 부끄러운 감정이 들어서 뒷말을 좀 얼버무렸다.
나는 리엘라를 믿기로 결정했다. 나한텐 리엘라 하나뿐이지만 반대의 입장도 동일했다. 게다가 리엘라는 나를 충분히 존중하고 있었다.

꼭두각시처럼 부려질 줄 알았는데 정 반대였다. 그녀는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정치를  이해하고 귀족들을 대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지도했다.

“맞아요.  당신의 아내니까 소중하게 생각해야죠.”

리엘라는 내 이런 부분을 무척 좋아했다. 여기는 가부장제가 만연한  마초적인 사회였으니까.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새삼 아름다워서 넋을 잃을 뻔했다.

“원래는 그런 세상에서 살다 왔으니까. 이젠 기억도 잘  나긴 한다만..”

조금 울적해져서 고기를 집어먹었다.
리엘라가 내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아주며 말했다.

“저는 당신이 복지부 쪽으로 갔으면 좋겠어요.”
“거긴 정말... 이름만 들어도 힘이 전혀 없어 보이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지구인들이 넘어오면서 세상이 많이 변했어요. 하지만 절대로 변하지 않는 부분이 있죠.”
“신분?”
“맞아요. 그건 변할 수도 없고 변해서도 안 되는 것이에요. 그래도.. 조금 정도는 좁혀져도 괜찮다고 생각하지만요.”

리엘라의 말대로, 내가 경험하지 못한 5년 전 세상은 지금보다  팍팍했을 거다.
나름의 복지가 생겼지만 지구에 비하면 1할도 채 될까한 여전히 절망적인 수준이다. 물론 그거로도 감지덕지 하며 사는 백성들이 많았다.

리엘라는 의구심이 어린 기색으로 말했다.

“복지는 확실히 효과를 보고 있어요. 체계적이지 않고 예산을 많이 편성하진 않았어도 지금보다는 분명 성과를 내야 하는데. 아마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확률이 높아요.”
“그러면 귀족이 해쳐먹었겠지 뭐.”

리엘라는 눈빛으로 나를 질책했다.
그녀 앞에서라도 언행에 신경을 쓰긴 해야겠다. 나는 입술을 살짝 두드려서 주의하겠다는 제스처를 했다.

“복지의 장점은 민심이에요. 그건  강력한 명분으로 이어지죠.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이 있어요.”
“가장 중요한 거?”
“지구인들. 그들은 제국에 불만이 많지 않을까요? 제가 당신이었다면 불만이 무척 많았을 텐데요? 특히, 신분 때문에요.  당신을 중심으로 그들을 뭉치게 만들 거예요. 복지는 그들에게 매력적인 기회가 되겠죠.”

리엘라는 그렇게 말하고 식사에 집중했다. 틀려도 좋으니 지금부터 스스로 생각하라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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