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2화 〉12화 (12/44)



〈 12화 〉12화

“아바마마께선 제가 그자와 결혼하는 것이 마음에 드시지 않는 겁니까?”

루시우스 아르카옌은 딸을 앞에 두고 두통이 생기는  했다.
아무리 소원이어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미래라고는 전혀 기대되지 않아 보이던 놈을 딸과 결혼 시켜야 한다니.

‘후... 내 꾀에 내가 당해버렸군. 대충 작위를 던져주면 될 일이라 생각했거늘. 정말 그놈은 행운의 여신이 보살펴 주는 것인가.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나오는군.’

지금 상황은 루시우스로서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소중한 딸과 동시에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황녀. 그중 한명을 오늘 웬 놈팡이에게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가 보기에, 리엘라는 뜻을 굽힐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가 보지 못한 것을 너는 보았단 말이냐?”

리엘라의 대답을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에게 있기는 뭐가 있다는 말인가.
루시우스가 노망이 났어도 이지훈을 바라보는 시선은 달라지지 않았을 거다. 몇 번을 생각해도 그럴 리가 없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군주의 약속은 천금과도 같다. 이미 한번 어겼는데 이이상 억지 부릴 수는 없었다.

“좋다. 일전에 그와 약조한 바가 있었지. 네가 그리 결심했다면 나로서도 도리가 없구나. 허락하겠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후회해도, 그 또한 너의 몫이다.”

결혼을 했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이혼이라는 꼬리표는 황녀에겐 치명적이다. 가치가 사라진다는 뜻이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누가 떠민 것도 아닌 오롯이 제 결정이니까요.”
“그래.... 언제쯤이 좋을 것 같으냐.”
“이왕 해야 할 일 최대한 빠른 편이 좋겠지요.”
“그렇게 해주도록 하마.”

루시우스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는 방금까지 겸상하던 딸을 떠올렸다.
아까운 아이. 훨씬 좋은 혼처와 맺어졌다면, 자신에게도 딸에게도 좋은 결과가 있었을 텐데.
혹여 결혼을 반대할 신하들이 생각나자 또 두통이 시작되는 기분이었다.
귀족들이 눈치 채기 전에 빠르게 밀어붙이는 수밖에 없었다.


*


해가 쨍쨍한 정오.

“으아... 시발 존나 떨리네.”

5년.
그 짧은 시간 안에 이룬 엄청난 신분상승. 2황녀는 어떤 사람일까. 분명 3황녀 보다는 착한 사람일거다.
그 빌어 처먹을 년보다 성질이 더러우면.... 끔찍한데?

“아니야.. 그랬으면 나랑 결혼한다고 했겠어?”

재수 없는 상상은 하지 말자.
샤워로 몸을 깨끗이 하고 옷을 골랐다. 전부 궁에서 일하는 시종들이 채워준 옷들이었다. 척 봐도 값이 나가 보이는 것들.

“음.... 이건 별로다. 너무 과해 보이는데.”

확실히 메이드는 센스가 있었다. 도움을 받으면 좋겠는데 그녀는 첫날 이후로 마주치지 못했다.
괜히 어설프게 화려한 옷을 고르지 말고 적당한 걸로 선택하기로 했다.

“이제야 좀 무난해 보이기는 하네.”

이정도면 되겠다 싶었다.
밖에는 나를 기다리던 사람이 있었다. 어제 본 시종과 다른 사람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모시겠습니다.”
“아 예...”

이런 극진한 대우는 아직 어색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리엘라 황녀전하께서 머무는 궁입니다.”
“그렇군요. 여기서 일하려면 길 외우는데 반년은 걸리겠네요.”
“...”

분위기가 어색해서 아무 말이나 해봤는데 무시당했다. 더 어색해졌어. 젠장, 나도 말하기를 포기했다.

“이곳입니다.”

황제가 머무는 궁에 비해서 소박해 보이는, 그럼에도 궁전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는 곳이었다.
웅장하고 절로 경외심이 들던 황제의 궁과는 다른 느낌.

“아름답네요...”

방금 말은 시종에게도 좋게 들렸는지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시종을 따라서 궁의 내부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주변 곳곳을 지키는 기사들은 군기가 딱 잡혀있는  침입자를 신경 쓰지 않고  할 일만 묵묵히 했다.
햇빛이 잘 드는 정원으로 들어서고 나서 걸음을 멈췄다.

“와....”

그곳에는 여신이 있었다.

2황녀로 추정되는 여인은 뒷짐을 진채 기사들을 거느리며 걷고 있었다.
그녀의 소유인 정원을 감상하고 있었는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꽃을 쓰다듬기도 했다.
저런 행동들이 너무 품위 있어 보여서 멍하니 쳐다보게 되었다.

“흠흠.”
“아.. 죄송합니다.”

시종의 헛기침 덕분에 정신을 차렸다.
떨리는 마음을 붙잡고 황녀를 다시 바라보자, 눈이 마주쳤다.
황제를 빼닮은 붉은 눈. 그 눈동자가 시리도록 차갑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얼음장 같던 시선은  눈웃음으로 바뀌었다.

‘와... 빨려 들어가네..’
“가시죠.”
“아, 네.”

시종을 따라서 2황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나는 그와 단둘이 할 얘기가 있으니 그대들은 자리를 비켜라.”
“하지만... 전하 그것은.”

툭툭.
리엘라 아르카옌이 검지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 소리에 반론을 하던 기사가 입을 다물었다. 잠깐 고심한 그는 황녀를 홀로  수는 없었는지  의견을 다시 주장했다.

“황녀전하. 그래도 안 됩니다. 혹시나 전하의 신변에 변고가 생긴다면...”
“늘 하는 생각인데... 그대들은 왜 자꾸 같은 말을   하게끔 만드는지 모르겠군. 그는 내 남편이 될 자다.”
“예....?”

리엘라의 말에 기사는 얼이 빠져버렸다.
그녀를 모시고 있던 이들도, 나를 안내했던 시종의 얼굴에도.
충격적인 말을 들어서 그런지, 다들 입은 꾹 닫고 있어도 표정을 감추기 힘들어 보였다.

“그대들은 부부가 나누는 말을 훔쳐들을 생각인가? 내 기분이 더 나빠지기 전에 자리를 비켰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나와 리엘라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녀와 얼굴을 맞대고 앉아있고 방금  말을 직접 들으니까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내 앞에 놓인 차를 마시면서 어색함을 버티던 찰나였다.

“향이 좋죠?  차는 제가 직접 우려낸 거예요. 마음이 평온해져서 긴장을 풀어주는 효과가 있죠.”
“넵.. 너무 맛있습니다!”
“음. 효과가 없었나?”

경직된 상태로 딱딱하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효과는 전혀 없는  같습니다만. 향이 좋은지도 모르겠다. 그냥 준비돼 있으니까 마시는 거였다.
리엘라는 차를 음미하고 고개를 갸웃 거린 후 말했다.

“제 입맛엔 괜찮은데.... 아무튼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평생을 부부로 살아가게 될 텐데, 당신은 나를 딱딱하게 대할 건가요?”
“점점 익숙해지겠죠...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좋아요.”

그제야 나는 전보단 편한 마음으로 리엘라를   있었다.
리엘라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고운 목소리를 흥얼거리고 있는 게 정말 기분이 좋아 보이는 듯 했다.

“무엇 때문에 기분이 그리 좋으신 거죠?”
“맞춰보실래요?”

흠.. 어려운 문제다.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괜찮은 정답은 알고 있었다. 동그라미는 아닐지언정 세모 정도는 되는 대답을.

“혹시... 저한테 반하셨다 거나.”
“그럴 리가 없잖아요?”

리엘라는 그렇게 대답하고선 키득거리며 웃었다. 다행히 내가 원하는 반응이었다.
웃음이 멎어들고, 리엘라가 말했다.

“그래도 제 인생에 남자는 당신밖에 없을 거라는 건 제 명예를 걸고 맹세할 수 있어요. 반하지는 않았지만요.”
“그럼 왜....?”
“자유. 그리고.... 야망.”
“자유와 야망이요?”
“네.”

리엘라는 나를 보던 시선을 먼 곳으로 옮기고 말을 이었다.

“귀족이 왜 귀족인지 당신은 알고 있나요?”
“책임과 의무를 가졌기 때문 아닙니까?”

나는 한국의 정치인을 떠올리며 얘기했다.

“맞아요. 귀족들은 분명 책임과 의무를 가지고 있죠. 그걸 제대로 지키는 귀족은 그다지 보이지 않지만.”

다들 권리만 누리려고 하죠, 리엘라는 웨이브진 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중얼거렸다.

“저는 황족으로써 귀족들의 위에 서있죠. 그런 제가 권리만 누릴 수 있을까요? 아니죠, 권리를 누려온 만큼 책임과 의무를 행해야죠. 그 누구보다도 엄격하게.... 그래야만 했어요.”
“저와 결혼으로 의무를 다하신다는 겁니까? 폐하가 약속을 번복하지 않는 군주가 될 수 있게요?”

그런 거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리엘라가 3황녀와 다르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황족이라면 약속을 번복했던 황제를 꾸짖을 수도 있으니까.
아쉽게도  생각은 틀렸다.

“아뇨. 전 이기적이게도 저를 위해서 당신과 결혼을 결심했어요. 모순적이죠? 하지만 자유를 위해, 그리고 내 야망을 위해선 어쩔 수 없었어요. 마침 우연하게도 기회가 생겼잖아요? 누린 게 많다고, 욕망을 참아야 하는 건 아니죠. 원래 사람은 가진  많을수록, 더 많은 걸 갖고 싶으니까....”
“그게  황녀님을 위한 겁니까? 전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당신이 왜 아버지께 그런 소원을 빌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난 당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전부 알고 있으니까. 아마.. 나를 방패로 내세우려고 결혼을 선택한 것 같은데 내 생각이 틀렸나요?”

정곡이었다.
리엘라의 눈빛은 내 눈동자를 꿰뚫어서  너머의 것들을 숨김없이 헤집고 있었다.

“좋은 생각이에요.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강단도 있고, 나쁘지 않았어요.  몸에 흐르는 피는 하이에나 같은 귀족들을 상대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겠죠. 그런데 당신, 그거 알고 있어요?”
“뭘... 말입니까?”
“당신에게는 내가 전부야.”

번개가 내리쳐 정수리를 관통한 느낌이었다. 이걸 간과하고 있었다. 내 계획은 그럴듯했다.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었을 뿐.

나는 떨리는 눈으로 리엘라를 보게 되었다. 그녀의 만족스러운 웃음은 맛있는 먹이를 눈앞에 둔 사자 같았다.

“대답이 좀 됐나요? 내가  당신을 선택했는지. 멍청한 내 자매는 당신의 가치를 전혀 몰랐던 모양이지만. 생각해봐요. 황녀인 내가 혼처를 구한다면 어떤 쟁쟁한 가문들이 줄을 설지. 나보고 그 가문에 트로피가 되어 오라버니의 권력을 위해 희생되라는 건가요? 내가 왜? 하지만 당신은 다르죠. 의지할 데가 나밖에 없으니, 내 입맛대로 다루기 너무 수월하죠.”

리엘라가 다소 흥분한 건지 언성이 조금 높아졌다. 마주한 눈에는, 절제되어 보이지만 탐욕이 일렁이고 있었다.
리엘라는 이제 욕망을 숨기지 않은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붉은 눈동자가 더 짙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황제가  거예요.”

미쳤다.
이 여자는 미쳤어. 진심인가 싶었다. 담담한 목소리는 그 결심에 조금의 흔들림도 없어 보였다.
나는 침을 삼키며 말했다.

“이런 얘기를  저한테 하는 겁니까...”
“우린 이제 한배를 탔으니까? 당신이 날 위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요.”

정원에는 리엘라의 웃음소리만 가득했다.
시원하게 웃는 그녀와 다르게 나는 속이 시꺼메졌다. 호가호위 하려다가 토사구팽 당하게 생겼다. 만약 리엘라가 여황제가 된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시발.... 버림받는 거 아니야?’

뺨에 섬뜩한 감촉이 느껴졌다.
리엘라가 어느새 일어서서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엄지손가락이 입술을 쓰다듬기를  번.
그녀의 얼굴이 가까워진다 싶더니, 내 귀에 입술을 갖다 대고 속삭였다.

“네가 뭘 걱정하는지 느껴져. 하지만 당신도 권력을 원하고 있잖아? 나를 이용해서 권력을 손에 쥐어, 그리고 내게 바치는 거야. 난 기꺼이 당신이 그렇게 되도록 헌신할 테니까. 내가 황제가 되었을 때, 당신은 제국의  번째로 높은 자리에 앉게 될 거야.”

내 가슴을 툭 두들겨주고, 허리를 곧게 세운 리엘라가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

“그럼.  부탁드려요?”

나는 리엘라의 손을 잡는 선택지 외의 길을 생각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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