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10화
처음 발을 디딘 황궁은 상상 이상이었다.
대체 얼마나 넓은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평생 여기서만 살아도 될 정도인데....’
단언컨대, 평생을 황궁에서 살아도 부족함은 없어 보였다. 입궁한지 1시간이 지나서야 황궁은 얼마나 넓은가를 생각하길 포기했다.
이곳은 하나의 도시라 봐도 모자람이 없었다.
점점 마음은 안정돼 가고 있었다.
그 증거로 메이드가 가르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사항들은 전부 숙지했다.
그녀도 짧은 시간이지만 내가 나아짐이 확연히 보이자 만족스럽게 웃었다.
끼이익.
마차가 멈춰서고 메이드를 따라 내렸다.
황궁에 걸맞은 넓고 화려한 건물이 보였다.
“주로 귀족가문의 자제분들이나 사용인들이 황궁에 머물 때 사용하는 곳입니다.”
그러기엔 너무 과하지 않나 싶었다.
건물 앞에선 나를 기다린 듯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을 따라서 또 한참을 걸었다.
이들은 너무 과묵했고 나도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어색한 침묵 속에 구둣발 소리만 울리기를 한참, 커다란 드레스 룸에 들어가서 의자에 앉혀졌다.
‘와... 시발 존나 부담된다. 그리고 좆같이 힘드네....’
나는 그들의 인형이었다.
한사람이 가져온 옷으로 갈아입혀지면 서로 평가를 하더니 다음 주자가 가져온 옷으로 갈아입혀졌다.
메이드는 팔짱을 끼고 그들을 능숙하게 지휘했다. 그녀의 사인이 떨어져야 옷 입히기 게임이 끝나는 눈치였다.
“이걸로 하죠. 제일 무난하고 괜찮네요. 마음에 들어요.”
산뜻한 색감의 무난한 정장이었다.
이보다 더 화려한 옷들도 입혀졌었는데 아무래도 그녀의 눈에는 내게 안 어울렸나 보다.
아무튼 갑자기 피로가 몰려오기도 해서 이제 끝나는가 싶은 기대를 했다.
“옷은 정했으니 이제 다음 할 일을 하러 가볼까요?”
“예? 뭘 더 해야 하는 거죠....”
메이드는 대답 없이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내게는 선택권 따위 없었기에, 하자는 대로 영문도 모른 채 따라갔다.
“어.... 혼자서는 안 되겠죠?”
“네. 안 돼요.”
“혹시나 해서 말인데.... 저분들도 동의하는 건가요? 제가 저분들이었으면 좀.. 싫었을 거 같습니다만. 저 청결한 사람이에요. 혼자서도 잘 씻습니다!”
메이드는 웃음이 빵 터져서 입가를 가리고 끅끅 대고 있었다.
내가 왜 아다 새끼마냥 이러고 있냐면. 사실 여기까지 오면서 눈치를 챘다. 아! 나는 이제 씻으러 가는구나. 그러다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메이드도 그렇고 주위 사람들이 죄다 예뻤으니까! 옷을 입고 씻길 수는 없었다. 자연스럽게 행복한 기대를 하고 있었다.
‘시발...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왜 꼬추 새끼들이 나타나는 거냐고!!’
절대 안 된다. 이럴 수는 없었다. 이건 있어선 안 되는 일이었다.
“어머. 혹시 무슨 기대라도 하셨나요? 아까부터 계속 웃고 있었잖아요.”
“그런 적 없습니다.... 그냥 제가 알아서 할 테니 부디 믿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으음.. 그럴 수는 없는데. 기대에 부응하려 준비해봤는데 아무래도 제가 착각을 했나 보네요.”
메이드는 아직 웃음이 가시지 않았는지 중간 중간 소리를 참으면서 말했다. 그녀의 곁에 있던 여인 한명이 작게 말했다.
“저.. 여유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얼른 준비를 하시는 게.”
“아~ 알겠어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여서 저도 모르게 그만.”
짝.
메이드가 손뼉을 쳤다.
그러자 남자들이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비켰다.
여자 두 명이 다가와서 내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능숙한 그녀들의 손길에 나는 금방 알몸이 되었다.
‘오....’
내 눈은 속옷차림이 되어가는 시녀들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하나같이 몸매가 뛰어나서 보는 맛이 있었다.
“너무.. 이상한 생각은 하면 안돼요?”
존재감을 서서히 과시하고 있는 내 그곳을, 메이드는 요염한 눈웃음으로 훑어보며 말했다.
이윽고 메이드도 옷을 벗고 속옷 차림이 되자. 자지는 이미 반쯤 발기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메이드의 속옷은 다른 시녀들보다 훨씬 자극적이었다. 팬티는 망사로 되어있어 음모가 조금씩 엿보였다. 머리카락을 닮은 밝은 갈색...
‘참자...’
아무래도 지금보다 더 노골적으로 보는 건 무리였다.
나는 애써 눈을 돌려 메이드의 큰 가슴을 한 번 더 담고 어정쩡하게 위를 쳐다봤다.
그리고 속으로 애국가를 제창했다. 도움은 하나도 안됐지만.
“귀여운 맛이 있네요.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후후.”
메이드는 그렇게 말하고 시녀들에게 지시하기 시작했다.
정말로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표정과 말투였다.
‘생각해보니 그러네.’
나는 메이드의 몸을 대놓고 감상하기로 마음먹었다.
내 몸은 누워있지만 녀석만 유일하게 우뚝 일어서 있었다.
고자가 아니라면 당연한 것이다. 속옷차림의 미인들이 몸 곳곳을 마사지 해주고 있는데 안 서?
화룡정점은 내 두피를 마사지 해주는 메이드였다. 그녀의 가슴을 올려다보는 건 정말이지 절경이었다.
나만 알몸이라는 사실이 살짝 아쉬웠다.
부끄러움? 그런 건 처음부터 없었다.
용병생활 하다보면 노숙도 자주하고 다른 여자 용병들과 부대끼는 일도 번번한데 뭘.
귀족가문의 자제가 확실해 보이는 메이드의 눈치를 봐서 참으려 했던 것뿐이었다.
기분 좋은 시간은 항상 빨리 지나간다. 시각과 촉각이 행복했던 시간은 끝나버렸다. 준비된 옷을 입고 공들인 메이크업을 받았다.
드디어 모든 준비가 끝나고서, 거울에 비친 모습은 주관적인 입장에서도 상당히 괜찮아보였다.
“음... 만족스러워요. 처음 봤을 때랑 전혀 다른 사람 같네요.”
“첫인상이 영... 별로였나요?”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네요. 어땠더라?”
“괜찮아요. 왠지 알고 싶지 않아졌어요.”
나는 기억을 더듬으려는 메이드를 말렸다.
내 앞에서 걷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몸매가 아주 훌륭했다는 것만 기억하기로 했다.
*
텅 비어있는 넓은 방.
메이드는 나를 여기로 안내하고 기다리라 말했다.
문 앞에는 기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오기 전 기사 둘이서 이곳을 지키고 있었으니까.
혼자라서 눈치 볼 사람도 없어서 테이블에 놓인 다과를 맛보면서 메이드를 기다렸다.
잠시 후, 날 데리러 온 사람은 로아나였다.
반가운 기색에 살갑게 그녀를 맞이했다.
“로아나님이 여긴 어쩐 일로 왔어요?”
“메이드에게 부탁하였다.”
메이드도 친절한 사람이었지만 역시 내게는 로아나가 더 편한 사람이었다.
“정말 그대는 폐하께 그 부탁을 할 셈인가?”
“네. 그게 아마 최선 같아서요.”
로아나는 다소 복잡한 표정이었다.
나를 걱정해 주는 건가. 그래도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이제와 더 나은 방법을 찾겠다고 황제 앞에서 머리를 굴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괜찮아요. 잘 되겠죠. 죽기라도 하겠어요?”
“폐하는... 인자하신 분인 건 확실하다만 제국의 주인이다. 군주란 때론 자국의 이익을 생각해 냉정해질 때도 있는 법이다. 풀어 말하면.... 그대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뭐.. 돈이나 달라 해서 고아원장이라도 시켜주라 하죠.”
내 농담 같은 진담에 로아나도 못 말리겠다는 듯 웃어버렸다.
뭐가됐든 앞으로 용병은 더 하지 않을 생각이니 수틀리면 정말로 그럴지도.
“가자. 시간이 다 되었다.”
“잘 될 거예요. 저만 믿고 있으세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믿음이 가는군.”
“아 무조건 잘 된다니까요.”
“그러면 다음에 쉼터로 갈 때에는 그대가 나보다 높은 신분이겠군.”
“사실 저도 신분 같은 거 안 따지는 성격이긴 해요. 애초에 한국은 왕이니 귀족이니 그딴 게 없었다니까요.”
“민주주의란 것 말인가?”
로아나는 민주주의를 설명해 줬을 때 정말로 신기해하고 눈이 반짝반짝 했었다.
지구도 잘 생각해보면 보이지 않는 신분이 있었다. 정말로 모두가 평등하지는 않았다.
‘뭐 그래도 여기에 비하면 존나 순한 맛이긴 하지.’
다 왔다.
직감적으로 저 문 너머에 황제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경비가 그 어떤 곳보다 살벌했다.
“행운을.... 빌겠습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로아나를 쳐다보았다.
로아나는 잔잔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제 혼자서 걸어가야 한다는 뜻이리라.
황제와의 독대는 내게만 허락된 일이었다.
“고마워요.”
문 너머로, 메이드에게 배운 대로 시선을 살짝 내린 채 걸었다. 눈은 다른 곳을 두리번거리지 않아야 했다.
열 걸음. 여기까지 걷고 나면 한쪽 무릎을 꿇어야 하고.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만나 뵙게 되어....”
“되었다. 짐은 네게 귀족과 같은 품위를 바라는 자비 없는 군주가 아니다. 괜찮으니 고개를 들라.”
메이드가 가르쳐준 지식에는 이런 돌발 상황의 대처법은 없었는데.
메이드가 알려준 주의사항, 황제가 시키는 대로 해라를 떠올렸다. 명령대로 고개를 들어 황제를 쳐다봤다.
‘저게... 제국의 황제.’
높은 위치에 마련된 권좌에서, 그는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이제 노년의 나이를 바라보는 주름진 얼굴. 황가의 상징이라 들은바 있는 청은색 머리칼.
황제는 약간 붉은 기가 도는 눈동자로 나를 내려 보고 있었다.
그저 그랬을 뿐인데 권위가 몸을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황제가 웃었다. 입가가 호선을 그렸으나, 내겐 전혀 웃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다 관찰 하였는가? 네가 보기엔 짐은 어떻지?”
“처음엔 권위가 마치 몸을 짓누르는 듯 했습니다. 그리고 웃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일러준 대로 황제의 질문에 솔직한 대답을 했다. 불경한 생각은 하지 않았으니까 굳이 미사여구를 붙여 돌려 말할 필요도 없었다.
“짐이 로또를 제국에 퍼뜨리긴 했으나 설마 지구인이 당첨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사실 1등은 시간이 한참은 더 흘러야 나올 것이라 생각했었거든. 듣기로는 있을 수 없는 확률이라 하더니 미래는 참.. 알 수 없군.”
대답을 바라는 말이 아니라서 가만히 듣고 있었다.
“네가 느낀 짐의 권위는 말에서 나오는 것이다. 군주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 누가 짐의 권위를 인정할까. 말해라. 너는 어떤 바람을 원하지? 너는 짐의 백성이 틀림없지만 제국에서 나고 자란 것은 아니잖나. 네 바람이 무엇인지는 나도 참 궁금하구나.”
황제의 말에는 짙은 호기심이 묻어있었다.
자신이 예상한 범위에 말일까 아니면 상상도 못했던 말일까. 황제는 아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전자든 후자든 상관없었다.
내 대답은 정해졌으니.
“저는.. 황실의 일원이 되고 싶습니다. 황녀님과 결혼을 원합니다.”
황제는 다시금 웃었다. 가짜 웃음이 아닌 진짜 웃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