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화 〉9화 (9/44)



〈 9화 〉9화


“아저씨!”
“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빨리 괴물놀이 해요!”

10살 남짓한 어린아이가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이름이.... 아마 아이라. 그래, 그런 이름이었다.

아이라의 작은 머리를, 거칠어져 투박해진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런데 아저씨라니. 기분이 살짝 울적해질 단어를 들은  같은데. 다시금 정정해주도록 해야겠다.

“오빠는 체력이 좀 떨어져서 쉬고 있었던 거야. 아까 너희들이랑 놀아주면서 힘이  빠져버렸거든.”
“아저씨는 남자인데 언니보다 약하네요. 히히.”

 로아나는 언니고 나는 아저씨지? 막말로 그녀가 나보다 나이가 10살 가까이 많은데. 이 꼬마의 시력이 의심된다.

“그렇게까지 도발한다면 아저씨의 체력이 얼마나 좋은지 보여주지.”

어흥!
바보 같은 흉내를 내면서 아이라를 놀래자 꺄르르 웃으며 도망갔다.
아이라가 아이들 쪽으로 피신하니, 모여 있던 애들도 괴물이다! 소리 지르며 흩어져버렸다.

“로아나 언니! 괴물을 막아줘!”
“그래. 언니가 막을 테니 얼른 도망가렴.”

크윽... 괴물이라니 시밤. 눈물이 찔끔했다. 진정한 괴물이 뭔지 보여줘야겠다! 로아나를 요리조리 피하면서 아이들을 열심히 쫒았다.
괴물놀이에 너무 심취해버렸나. 나를 열심히 가로막는 로아나에게 외쳤다.

“자꾸  앞길을 막는다면 너부터 잡아먹겠다!”

로아나에게 달려들었고 우리는 뒤엉켜서 풀밭을 굴렀다. 괴물에게 잡혀버린 로아나가 소리 질렀다.

“꺄아악. 얘들아 언니  도와줘!”
“에잇 못된 괴물.”
“죽어라! 누나한테 떨어져.”

작은 손들이 머리  발 구분하지 않고 퍽퍽 두들겼다.
진짜 아프다... 엄살이 아니라 아이들의 손은 맵구나.

“크아아악. 얘들아 그만 때려 괴물 죽는다. 으어어어.”

 한 번의 소동이 지나고, 이제야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한참 성장할 아이들이라 금세 잠이 들었다.
괴물역할은 나였지만, 정작 괴물은 아이들이었다.
지치지도 않고 놀아 달라 졸라대니 원.

마지막 날.
로아나가 가고 싶은 장소가 이곳이었다.

그녀는 항상 입던 제복과 검을 내려놓고, 여성스러운  원피스를 입고서 나를 ‘아르카나의 쉼터’라는 고아원으로 데려왔다.
나를 고아원으로 데려온 것보다는, 처음으로  여성스러운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자꾸 옆에 있으면 괜히 이상한 생각이 들까봐 잠시 도망 온 상태다.
햇볕을 쬐면서 누워있으니 잠이 솔솔 몰려왔다. 하품도 간간히 나오는 게 아무래도 한숨 자야겠다.

“으악! 진짜 귀신입니까? 기척이라도 내고 오시지. 깜짝 놀랐잖아요.”
“1시간 전에 이미 곁에 있었다. 코까지 골고 잘도 자더군.”
“제가 잠을 잤다고요?”
“그래. 아무리 불러도 대답하지 않기에 죽은 줄 알았지 뭔가. 아이들에게 괴물을 처치했다고 자랑해야겠군.”

로아나는 입을 가리며 작게 웃었다.  모습이 너무 예뻐서, 나도 모르게 멍하니 쳐다보았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는가?”
“음..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자세히 봐야 알 거 같네요.”

사실 좀 더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능청스럽게 핑계를 대고 로아나의 얼굴을 요목조목 쳐다봤다.
아름다운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정말 묻은 게 있기는 한 건가?”
“아뇨. 장난이었어요. 눈치가 느리시네요.”
“괴물역할을 굉장히 자연스럽게 하더니 그대도 아이 같은 면이 있는 것 같군.”
“로아나님도 만만치 않으시던데....”

오늘 그녀는 그간 딱딱한 군인이 아닌 소녀 같은 얼굴이었다.
입은 옷과 아이들을 대하는 말투 등, 나만 알게 된 비밀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평소에도 자주 오나 봐요? 아이들이 너무 잘 따르던데요.”
“늘 자주 오겠다고 약속은 하는데 거짓말쟁이가 되는 기분이라 미안한 마음이다.”

하긴, 로아나는 바쁜 사람이니까.

“고맙다. 덕분에 아이들과 약속을 지킬 수 있었으니. 빚을 진 기분이군.”
“뭐.... 굳이 빚이랄 것 까지는 아니고요. 조금 놀라긴 했지만요.”
“놀라다니? 역시... 안 어울린다 생각 하는가?”

로아나가 입은 옷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생각 이상으로 당황한 몸짓이다. 나는 오해가 있음을 깨닫고 말을 고쳤다.

“아.. 그게 아니에요. 옷은 진짜 잘 어울려요.”
“그런데 왜 놀랐다 했는가.”
“아, 그건 로아나님 말투가 좀.. 생각지도 못했거든요.”

그간 겪은 로아나는 딱딱한 군인의 말투밖에 안 써서 아이들에게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다음에도 이런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저도 즐거웠거든요.”
“정말인가?”
“그럼요. 애들이 도망치는 거 못 봤어요? 거의 마왕 하수인 수준이었는데.”
“푸흣. 확실히 그대는 나도 무서울 만큼 괴물 같았다.”
“그건 좀.... 억지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즐거웠다는 건 진심이에요. 마치 한국에 있을 때 같은 분위기라서, 앞으로도 자주 생각날 것 같네요.”
“그대의 고향은 이곳과 많이 다른가?”
“네, 여기랑은 아예 정 반대예요. 그래서 처음엔 정말 적응하기 힘들었죠. 지구에 대해선 어느 정도 알지 않아요?”
“모른다. 가지도 못하는 곳을 관심 가질 일이 무엇이 있는가. 그래도 얘기해 준다면 경청하겠다.”

로아나는 맑은 눈망울로 나를 응시했다. 나는 알 수 없는 분위기에 이끌려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국이라고 제가 살던 곳이 있어요. 음.... 참 평화로운 곳이죠. 전 거기서 아무 걱정 없던 평범한 학생이었어요. 거긴 몬스터 같은 게 없었거든요.”

이야기는 어느덧 내가 이세계로 오게 된  순간까지 이어졌다.
말을 끊고 잠깐 로아나를 쳐다봤다. 그녀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용기를 얻고 지루한 모험담을 이어갔다.

5년.
짧지 않은 시간은 많은 걸 바꿨다.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죽을 고비. 동료의 배신. 내가 살기 위해 저지른 살인 등.
전부 평범했던 사람이 감당하기 힘든 일이다.
로아나는 지루했을 얘기를 묵묵히 들어주었다.

“매 순간이 두려워요. 살아남으려고 노력했을 뿐인데 점점 제가모를 중요한 뭔가를 잃어버리는 기분이 들거든요.”

로아나가 말없이 손을 잡아주었다.
따듯한 말이 아닌 온기로써 위로 받는 느낌이었다.

“제일 두려웠던 건. 저라는 사람은 언제 죽어도 아무렇지 않을 하찮은 사람이라 생각들 때예요. 여긴 한국과 다르게 지독한 신분제가 지배하고 있으니까요. 인정하긴 싫지만 하찮은 사람이었죠, 저는.”

더는 하찮은 사람이 되지 않도록 귀족이  거다.
로아나에게 털어놓는 건, 돌아보지 않고 앞을 나아가려는 다짐의 일환이다.
귀족이 가득한 상류사회는 더 치열한 곳일 테니까.

나는 재차 다짐하듯 내뱉었다.

“귀족이 되려는 건 오히려  확고해졌어요. 단지 점점 더 변해가지 않았으면...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대는 아마  이겨낼 것이다.”

로아나는 무언가 더 말을 하려고 우물쭈물 거리다 끝내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무척 궁금했다. 그런데 왠지 물어봐도 그녀는 대답해주지 않을 거란 느낌이 들었다.


*

드디어 황궁으로 가는 당일이 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황제가 보낸 게 확실한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가고 있다.

미친 듯이 심장이 벌렁거린다. 살면서 한번 대면할일 없는 사람을 만나다니. 긴장된 마음을 풀어야 했다.
나는 정말로 미친 짓을  거니까.

“황제 폐하를 대하실  묻는 말에만 대답해 주세요. 절대로 먼저 질문하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합니다.”

마차 안에서, 메이드가 교육을 하는 중이었는데 매우 부담이 되었다. 이 교육도 나를 긴장시키는 요인  하나였다.

“제대로 듣고 있는 건가요?”
“넵!”
“그럼 가장먼저 폐하를 알현할 때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제게 말해주실래요?”
“어.... 그러니까...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 죄송합니다. 한번만  가르쳐주세요.”

메이드는 눈웃음을 지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상냥한 미소라 생각할 거다. 내 눈에는, 그녀의 손에 회초리가 있었으면 분명 한 대 맞았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 무한한 영광에 무릎을 꿇으니 부디 태양께선 제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따라해 보세요.”

시발.... 존나 길다. 미친. 황제는 이딴 소리를 매번 만날 때마다 듣는 건가? 이건 뭐 인간계에 내려온 신 그 자체가 아닌가.
나는 메이드가 일러준 말을 열심히 따라했다.

“목소리는 좀 더 낮게. 그리고 지금보다 자신감 있게 말하세요. 너무 비굴해 보여서도  됩니다.”
“네....”

고통스러웠다. 엉덩이 무거운 영주들 마음이 이해가는 기분이다. 만날 때마다 이러면 못 참지!
속으로 불만은 있었어도 가르침은 열심히 배웠다. 그도 그럴게 어쩌면  장인어른이 될 지도 모르는 양반이었다.

나는 황녀랑 결혼을 하려는 미친놈이니까.

일생의 가장 중요한 도박이다.
어쩌면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다. 소원이라 해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제국의 황녀는 정치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니까.

내가 황제의 입장이라도 터무니없는 소원이라 치부할거다. 어떤 꾀를 내어서라도 거절할 명분을 만들 거다.

하지만  길 밖에 없다.

나는 특출한 구석이 없는 사람이다.
겨우 D급 용병을 전전한 인생이 귀족이 되어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물론 신분이 바뀌지만, 그것뿐이다.

다른 귀족들은 절대로 환영하지 않을 거다. 오히려 자기들과 맞지 않는 천한 놈이라고 배척할 가능성이 훨씬 크다.

그럼 귀족의 가장 큰 힘인 인맥을 쌓을 수가 없다. 영지를 가져도 마찬가지다. 그 누가 나를 따를까.

옆 동네 영주가 내가 가진  탈탈 털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몇 번을 고민해도 이 길 밖에 답이 없어.’

황녀는 그런 내게 가장 근사한 방패가 될 거다. 제국 황녀의 휘광을 등에 업어서 권력을 탐한다.

‘어정쩡한 귀족은 필요 없어. 기껏 귀족이 됐는데, 또 다른 귀족들에게 무시 받으라고? 그럴 거면 처음부터 귀족이 될 결심을 하면 안됐어.’

어차피  번밖에 없는 기회다.
어정쩡하게 귀족으로 만들어달라고 하기엔 너무 아깝지 않은가. 할  있는  가장 높은 위치를 노려야했다.
그래야 내가 원하는 권력의 힘도 얻기가  편해질 거다.

‘할 수 있다.’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속으로 계속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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