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화 〉8화 (8/44)



〈 8화 〉8화

‎‎

로아나가 들어오고 나서, 나를 찢어발길 이현성의 살기가 걷어졌다. 이현성이 석상처럼 우뚝 멈춰 섰다.
그의 분노로 일그러졌던 얼굴은 점차 경악으로 뒤덮였고.  눈에 이현성의 이마에 땀이 맺혀 흐르는 게 보였다.

또각또각.

로아나가  곁으로 걸어올 때 까지, 이현성은 눈을 데구루루 굴려 지켜보기만 했다. 처음 날 죽이려던 기세와 달리 너무나 무기력한 자세였다.

내가 느꼈던 기분을 그도 똑같이 느끼고 있다 생각하니,  몸에서 희열감이 넘쳤다. 강자는 이런 기분을 매 순간 느끼고 사는 건가.

이현성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십니까...”

이빨이 부딪히며 딱딱 거리는 소리까지 났다. 이현성이 느끼고 있을 공포가 이해가 갔다.

상식으로 이해할  없는 초인, 로아나는 그런 사람이니까.
이현성이 수십, 수백 명이 있어도 감히 닿을 수 없는 강자.

사람이란... 상황에 따라 이리도 나약하지 않은가.

로아나는 의문에 대답해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그는 데려가겠다.”
“잠깐... 잠깐만요! 귀인이 대단한 힘을 가진 분이란  알겠지만 이건 협회 내부의 일입니다!”
“그대보다 약한 자를 핍박하는 것이  일이란 말인가?”
“그건..... 그것은....”

이현성의 입이 달싹거렸다. 뭐라도 변명하고 싶지만 생각나는 말이 없는지 달아오른 얼굴을 푹 숙여 감췄다.

나는 그런 이현성에게 말했다.

“대체 바일런 상단이 뭐 길래 그렇게까지 하는 거냐? 왜 나를 죽이려 했지? 시발 말을  보라고!”

이현성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힘으론 이현성의 몸이 꿈쩍도 안했기에 그가 입은 옷만 찢어졌다.
반항하지 않는 이현성의 얼굴을 주먹으로  대 쳤다. 그는 수치심이 가득해진 얼굴로 말했다.

“최대한 보상을 해주도록 하겠다.”
“하겠다?”
“하겠습니다....”
“조만간 부를 테니까 발에 땀나도록 뛰어와.”
“예...”

협회를 나서고 한숨을 쉬었다.

방금 전까지 희열감에 몸이 달아올랐는데 지금은 착잡한 기분이었다. 날씨도  기분을 대변하는지 우중충했다.

“왜 그런 표정이지?”
“제 힘이 아니라 로아나님의 힘이잖아요.”
“그대는 힘을 갖고 싶은 건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상념은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내 귀에 로아나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

“음... 마나가 없는 그대가 보기엔 내가 한없이 강해보이겠지.”
“실제로도 그러지 않아요?  로아나님보다 강한 사람은 본적이 없는데요.”
“내 입으로 말하긴 부끄럽다만, 이길 수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몇 안 되긴 하는군.”

로아나는 그게 몇 명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 했다. 내가 생각나는 사람은 일단 5명 정도다.
진짜... 말도 안 되게 강한 사람이긴 하구나. 로아나는 언젠가 그들도 뛰어넘을지 모른다.

로아나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힘을 갖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내 삶의 대부분은 검을 휘두르는 일이 전부였지. 하지만, 원하던 힘을 가져보니 세상은 힘만으로 되는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거 혹시 절 위로해주려 하는 말입니까?”
“그렇게 들렸던가? 그냥...  푸념일 뿐이다.”

그래도 나는 힘을 갖고 싶다.
내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권력이라는 힘을.
어쩌면 로아나의 깨달음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 번도 힘을 가져본 적 없는 나한테는  닿는 말이 아니었다.

“전 권력을 가질 겁니다. 황제폐하랑 아주  쩌는 담판을 지을 테니 기대하세요.”
“나는 백성들이 뒤에선 폐하의 욕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그대는 폐하의 앞에서 언행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건.. 당연하죠.”

그 정도는 기본이다.

*

이현성은 200골드의 보상을 해주면 되겠냐는 제안을 했다. 기존 보수의 20배. 대신 이번일은 입을 다물어 달라는 뜻도 있었다.

“이 새끼가 바일런  뒷배였나?”

나는 빈 용지에 글을 채워나갔다.

[야. 좆밥 새끼야. 200골드 먹고 떨어지라고? 아직 정신  차린 거 같은데,  두 개를 빼먹은 거지? 3시간 준다. 발바닥에 불나도록 뛰어와라. 아 그리고 김준석 이지혜 두 명도 같이 데려오고. 그때 왜, 생존자 둘 있다고 했잖아. 고분고분하다던. 아참, 올  메로나.]

특급으로 보냈다. 비용은 당연히 착불로.

로아나의 휘하 기사가 손님이 3명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주었다. 편지를 받고 죽어라 달려왔는지 2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기사에게 내 방으로 데리고 와 달라 부탁했다.
좆밥 새끼랑, 꼭 얼굴을 보고 싶었던 두 배신자 새끼가 왔다.

“들어와. 시발 새끼들아. 메로나는 사 왔냐?”

침대에 누워서 발을 까딱 거리면서 세 놈을 맞이했다. 김준석과 이지혜는 내가 살아있을 줄 꿈에도 몰랐던 표정이었다.

이현성이 아이스크림을 내게 건넸다.

“에라이 시발 놈아. 이게 메로나야?”
“그... 메로나는 팔지 않는 아이스크림이라...”
“그럼 너나 처먹어 씹새야.”

이현성의 얼굴에 던져버렸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시발 새끼들.

“잘 있었지?”
“어... 어?”

지금 상황이 둘은 이해가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얼어붙은 둘에게 차갑게 말했다.

“날 오우거 밥으로 던져놓고 잘 지냈냐고. 현성아, 잠깐 꺼져봐. 얘들이랑 얘기 좀 하게.”

이현성이 나가고, 나는 둘에게 말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빌어. 그럼 최악은 면하게 해줄 테니까.”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김준석이 착잡한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떻게 거기서 살았는지 모르겠다. 그때 일은...  후회하고 있어.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우린 다 죽었을 거다. 다시 돌아간다 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야. 그래도 미안하다... 이건 진심이야.”
“오빠, 내가 그래도 오빠를 죽이려고 찌른 게 아니었잖아? 어떻게 보면 오빠는 나때매 살 수 있었던 거야.”
“시발! 그건 내가 거기서 바로 뒤지면 오우거가 너희 씹새끼들을 쫒을 테니까 그랬던 거고 쌍년아.”
“뭐... 결과적으론 서로 잘  거 아냐? 솔직히 흔한 일이잖아! 그냥... 누가 먼저 빨리 판단했냐. 단지 그 차이뿐이야. 오빠라고  그랬겠어?”

이지혜가 뱀처럼 징그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의 말투와 표정을 보니, 기가 차는 심정이 되었다.

내가 살아서 돌아왔잖아!
너희는 지금 희생시켰던 사람 앞에 서 있는 거고. 그 사람이 속죄할 기회를 주는 거잖아.
최소한 인간이라면, 앞에서라도 미안한 척은 해야 하는  맞는 거 아니야?

“너.... 원래 그런 년이었냐?”
“오빠 맘대로 생각해. 아무튼 미안, 앞으로 서로 보는 일 없었으면 좋겠어. 자기도 대충 사과하고 끝내.”
“그... 미안하다.”
“너희 상황 파악이 전혀 안되는구나. 믿는 구석이라도 있나 봐?”

이지혜는 반성의 눈치가 없다.
김준석은 겉보기엔 반성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 질문했다.

“준석아. 난 솔직히 사람이 끼리끼리 만난다는 말.  생각 없었거든? 근데 저 걸레 같은 년 하는 꼬라지 보니까 존나 신용이 가네.  간부가 빌빌 기는 거 보니까 사과하는 거지?”
“그런 거 아니야. 진심으로 사과한다.. 정말 미안하다.”
“새끼. 맞구만.”

이지혜를 걸레라고 욕보였을 때 김준석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은데 뭘.

“하는 행동이 걸레 맞잖아. 시발 년.”
“좆도 작은 새끼가 아까부터 짜증나게, 시발. 지난 일이잖아  이렇게 찌질 하게 굴어? 사과했잖아.”

이지혜가 발끈해서 끼어들었다.
나는 그녀를 흘깃 쳐다보고 차갑게 말했다.

“상황파악 안 되면 짜져있어. 멍청한 거 티 내지 말고.”
“시발 새끼가!”

김준석이 이지혜의 손을 잡았다.
흥분한 그녀를 다독거리고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후... 그래. 네 말이 맞아. 간부님이 너한테 쩔쩔 매는 거 보고 뭔가 있나 싶어서. 근데 지훈아. 깔끔하게 여기서 서로 잊자.  생각보다 인맥 없지 않아. 서로 피곤한일 만들지 말자. 무릎이라도 한번 꿇으라 하면 해줄 테니까.”
“혹시  인맥, 저년 대줘가면서 만들었냐?”
“이지훈!”

김준석이 크게 소리쳤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담담히 내뱉었다.

“난 너네랑 같이 살아보려고 그때 최선을 다했었다. 배신한건 너희였고 진심으로 속죄할 기회도 줬어. 다 너희가 자초한 거야.”
“후회할거다. 어차피 우린 결국 D급이야. 네가 무슨 약점을 잡아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항상 그 사실을 명심해.”

김준석은 조언이랍시고 비꼬았다. 예전이었으면 카운터를 허용하는 말이었겠지. 아주 기분이 비참했을 거다.
나는 되레 둘을 비웃으며 말했다.

“아니. 너희만 D급이겠지. 나는 달라, 귀족이 될 거다.”

내 말이 떨어지자 잠깐의 정적이 생겼다.

푸하하하하.
깔깔깔깔깔.

메아리가 울릴 정도로, 둘은 아주 배꼽이 빠져라 비웃었다. 덩달아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오빠가? 아하하하! 살면서 가장 재밌었어. 고마워, 웃겨줘서.”
“매사에 진지하던 네가 그런 개소리를 할 줄 꿈에도 몰랐다. 푸흐흐흡.”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전에 말했던 거 기억나? 누군지 몰라도 로또 1등  놈 썰어버리고 먹고 싶다고.”
“또 무슨 개소리를...?”
“그거 나야. 내가 1등이라고 병신들아. 너네둘이서 1등 되면 귀족이 되네 마네 했던 거 내가 속으로 얼마나 비웃은지 아냐?”

아직도 전혀 이해를 못하고 있는 둘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나 내일모레 황제 만난다고 병신들아. 너넨 이제 좆  거야.”

김준석이 나를 뚫어져라 살피면서 말했다.

“농담이지.....?”
“아니? 진짠데. 이제 와서 내가 구라칠 이유가 없잖아. 표정 보니까 그때 말 안하길 잘했네. 너희는 날 죽이고 뺏어갔을 놈들이야.”

옆에 있던 이지혜의 눈이 기이하게 변했다. 욕망이 짙게 투영됐지만 확신하지는 못하는 눈이었다.
나는 멍청한 둘을 비웃으며 말했다.

“진짜야. 황제한테 이미 보고가 다 올라갔다니까? 아직도  믿겨?”

김준석이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얼굴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김준석은 한참을 그러다가 추리하듯 말했다.

“왜 수도로 온다  거지? 한 번도 관심을 안 갖던 놈이 갑자기 수도를 간다 했을 때 그러려니 했는데...”

그는 여전히 의문스런 얼굴로 추론을 이어갔다.
그간 있었던 일을 되짚어보는 눈치였다. 김준석이 갑자기 뭔가 깨달은 듯 말했다.

“너.... 진짜구나? 어쩐지 그때 반응이 존나 이상했어. 그땐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네가 당첨돼서 그런 거였어. 기어코 수도로 오려고 했던 것도 그렇고.”
“딩동댕. 정답이야.”

나는 김준석의 추리에 박수를 쳤다. 내 익살스러운 태도와 달리 김준석의 낯은 심각하게 변해갔다.
이지혜가 그런 김준석에게 말했다.

“오빠... 왜 그래? 그럴 리가 없잖아.”
“맞는  같아. 지금 생각해보니 행동이 수상했어.”

김준석의 목소리가 갈수록 떨려갔다.

“그럼.... 지금이라도 죽여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네, 무조건 죽여야겠네. 그러면 우리 인생이 피는 거잖아.”

이지혜가 결심한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김준석이 이지혜에게 일갈했다.

“멍청한 소리 하지 마! 시발.... 시발... 어떻게... 그런 말도  되는..”

이윽고, 김준석이 재빠르게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지훈아... 미안하다, 아니 죄송합니다. 제발.. 우리 5년간 정이 있잖아요.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오빠.  그래? 그냥 죽이면 되는 거잖아.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아냐, 못하겠다면 내가 할게.”

김준석이 그녀를 강제로 무릎 꿇리며 소리쳤다.

“시발! 상황 파악을 하라고 멍청한 년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제발.. 지혜야, 빨리 빌라고!”
“준석이가 뭘 좀 아네. 황제가  호위하라고 로아나 크로이츠를 붙여줬어. 누군지 당연히 알겠지?”
“뭐...?”

이지혜가 나를 홱 돌아봤다. 믿기지 않는다는 경악스러운 표정이었다.
나는 이제야 상황파악이 확실히 된 둘에게 차갑게 내뱉었다.

“이미 속죄할 기회는 끝났어. 너희가 아무리 빌어도, 내 마음은 변하지 않을 거야. 다음에 만날 때까지 몸 관리 잘 하고 있어. 어떤 일이 벌어지든 상상 이상일 테니까.”

나는 기사를 불러서 둘을 끌고 가 달라고 부탁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