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6화
여자였다.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여자는 등을 보이고 당당히 서서 오우거의 주먹을 고작 한 손으로 막고 있었다.
곱게 묶은 긴 금발이 흔들렸지만, 힘을 정면에서 받아냈을 몸은 미동도 안했다.
“아....”
하얀 바탕의 황실 문양이 새겨진 기사정복. 허리춤에 걸려있는 검.
미관상 아름다움만을 강조한 예식용 제복이지만 그녀가 기사라는 걸 숨기지 못했다.
크르르르르.
오우거는 빠르게 거리를 벌리고 여자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시선을 떼지 않으면서 슬금슬금 반대편으로 몸을 돌리는 게 도망갈 구석을 찾는 눈치였다.
여자는 천천히 검을 뽑았다.
번쩍.
내 눈이 부릅떠졌다. 줄곧 그녀의 움직임만 바라보고 있었다.
느닷없이 푸른빛이 번쩍이나 싶더니 오우거의 머리통은 잘려서 바닥에 굴러다녔다.
바닥을 쓸고 있는 오우거의 표정은 경계하는 태세 그대로였다.
나도, 저 괴물 같은 오우거도, 목이 잘린 순간을 몰랐다는 증거다.
‘이게...... 사람의 힘이라고?’
저 가냘픈 몸은 전략병기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많이 다치진 않았군.”
그제야 마주하게 된 그녀는 정말로 아름다웠다. 기사랑 어울리지 않을 새하얀 피부, 무뚝뚝한 말투와 달리 상냥한 눈매도.
나를 뚜렷이 담고 있는 순수한 눈동자는 선한 사람이란 이유모를 느낌을 주었다.
“일어날 수 있겠나?”
그녀는 손을 건네며 말했다. 힘들면 잡아주겠단 뜻이겠으나 약해보이기 싫었다.
고장 난 몸을 느릿하게 일으키다 입에 머금고 있던 피가 새어나왔다. 긴장이 풀려선지 잊고 있던 고통이 몸을 쑤셨다.
겨드랑이 사이로 하얀 손이 쑥 들어오더니 몸이 일으켜졌다. 그 때매 제복에는 피가 묻었지만 정작 그녀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마주서니까 키가 제법 큰 편이다. 175cm정도인가. 나보다 머리 하나가 작았다.
등을 보이고 주먹을 막아냈을 땐 나보다 한참은 커 보였는데.
“고맙습니다...”
“괜찮다. 오우거와 싸울 때는 입이 험해보였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군.”
“귀하신 분... 아니십니까?”
“되었다. 나는 그런 걸 별로 따지는 사람은 아니니.”
그녀는 조금은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그... 음... 기사님은.”
“로아나 크로이츠다.”
“예. 로아나.... 예-?!”
“뭘 그렇게 놀라나. 내 이름이 놀랠 정도로 이상한가?”
콜록콜록.
진짜 존나 깜짝 놀라서 피 섞인 기침을 해버렸다. 미안하게도, 날 부축해 주는 로아나의 제복에 빨간 물감을 더 칠해버렸다.
“아뇨. 예쁜 이름이라 생각합니다.”
“그냥 어디에도 있는 흔한 이름이다.”
그건 맞는데, 내가 아는 그녀는 제국의 유명인사다. 직접 보는 건 처음이지만 소문은 누구나 들을 수 있으니까.
이 넓은 제국에서 강함으로 따지면 열 손가락에 꼽힌다는 여자. 최연소 기사단장. 방금 무위를 떠올리니 소문의 주인공이 확실했다.
‘저 얼굴이 33살이라고? 아무리 봐도 20대 초반인데.’
30대에 10성 기사를 바라보는 로아나는 천재라는 말로도 부족한 괴물이었다.
“로아나님이 어째서... 이런 곳에 있는 겁니까?”
“그게 무슨 말이지? 마치 내가 못 올 곳에 왔다는 말인가.”
“아니... 그런 게 아니고요.”
“농담이다. 그대가 너무 긴장한 듯 보여 해본 소리였다. 나는 그리 권위적인 사람이 아니니 너무 눈치 볼 필요는 없다.”
“알겠습니다...”
“또 눈치를 보는군.”
“점점 편해지겠지요.”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인 로아나가 설명을 해주었다.
당첨자가 나온 이후로 수도 내의 경비를 엄중히 하라 황명을 내렸다. 정확히 누가 당첨자인지는 황제도 모르지만, 루트란에 있는 일개 평민인 사실은 알고 있었다.
불미스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황제가 조치를 취했고. 벌써 루트란에는 기사단이 파견돼 있을 거라 했다.
로아나는 제2 기사단장으로써 수도 경비를 강화하는 일에 파견되었고, 성문 근처에 있다가 오우거의 기척을 느끼고 왔다는 말이었다.
‘시발.... TV좀 보고 살걸.’
가만히 있었으면 해결 될 일이었다.
어쨌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하하. 누군지는 몰라도 당첨자는 운이 아주 좋겠네요.”
“음? 그대가 운이 좋다는 걸 돌려 말하는 것인가?”
“그게 무슨....”
“난 그대가 당첨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본인 입으로 떠들지 않았나.”
시발.
아니 그러면 내가 오우거랑 싸울 때 이미 다 지켜보고 있었다는 말이잖아. 쪽팔려서 괜스레 얼굴이 빨개지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입이 험하다는 둥 지켜봤다는 느낌이 들게 말을 하긴 했었지.’
정신을 좀 차려야겠다.
고개를 푹 숙인 나를 오해했는지 로아나가 말을 이었다.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겠다만 괜찮다. 나는 그런 파렴치한 자가 아니니까.”
“그런 거 아닙니다... 그냥 쪽팔려서 그랬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군.”
“거 오우거랑 싸울 때 했던 말들 있잖습니까. 그게 쪽팔린 다고요.”
“멋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대는 마나를 못 다루지 않나. 그럼에도 물러서지 않는 모습은 기사다웠다고 생각했다.”
“다 지켜보고 있었으면서.... 좀만 더 빨리 도와주지 그랬습니까.”
“그건 미안하게 됐군. 나로서도 그대에게 흥미가 생겨서 그랬던 것이니 이해해주길 바란다.”
로아나가 나를 부축해서 걷는 상황은 느릿하고 3자가 보기엔 이상한 모양새였다. 게다가 코에선 자꾸 좋은 향기가 났다.
부드러운 몸과 간간히 닿는 가슴의 감촉은 의미 없이 시선만 이리저리 돌리게 했다. 정작 로아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거 같았지만.
자꾸 쓸데없는 생각이 들어서 아무런 말이나 내뱉었다.
“무슨 흥미 말입니까?”
“폐하께선 아마 그대에게 원하는 바를 이루어 주시겠지. 그게 정말 터무니없는 이유가 아니라면 약속을 지키려 하실 거다. 황제란 그런 자리니까. 그래서 궁금했다, 그대란 사람의 됨됨이를.”
“정작 저는 원하는 게 뭔지 제대로 고민도 해본 적 없는데...”
“그건 본인도 궁금하군. 하지만 그대의 몫이니 참견할 일은 아니겠지.”
로아나는 내가 상상했던 기사의 이미지를 닮은 인물이었다. 아직 그녀를 잘 알지 못해도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란 게 느껴졌다.
내면 깊숙했던, 힘을 원하는 욕망이 잘못된 방식으로 표현된 것일까.
‘갖고 싶다.’
나는 아마 마나를 평생 동안 다루지 못하겠지. 대신 로아나가 나를 섬기는 기사가 됐으면 좋겠다.
오우거를 단번에 죽여 버리는 힘을 날 위해 썼으면 좋겠다. 기사라는 건 주군을 위해 검을 드는 존재가 아닌가.
‘내가 로아나의 주군이 되고 싶다 하면 황제는 그걸 허락해줄까.’
생각에 잠겨 걸음이 멈춘 걸 미처 느끼지 못했다. 그걸 알게 됐을 땐 로아나는 크게 웃고 있었다.
왜 저러지?
대체 뭐 길래, 무뚝뚝해 보이는 로아나를 웃게 만들었는지 궁금해서 물어볼까 고민 할 때였다.
로아나는 웃음을 멈추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만약 그런 부탁을 한다면 나는 그대를 위해 검을 휘두르지도, 목숨을 맞바꿔 수호하지도, 명예를 위해 싸우지도 않겠지.”
“갑자기 그게 무슨..”
“기사에게 충성을 강제할 수는 없네. 폐하에게 그런 부탁을 청해도, 내가 그대를 섬길 일은 없다는 뜻이지.”
수도로 갈 때까지 우리는 서로 말없이 걷기만 했다.
*
나는 부상자의 신분으로 병실에 누워 있었다. 로아나의 배려였다.
그녀는 수도로 들어오고 나서 곧장 날 치료소로 데려갔다. 로또 용지는 이미 그녀에게 맡겼다.
로아나는 황제에게 보고를 하고 돌아온다 했다.
‘이런 곳일 줄 알았으면 간간히 들릴걸 그랬어.’
5년간 아르칸 제국에 살면서, 귀족과 마주치지 않으려는 이유로 루트란에 틀어박혀 생활했는데.
막상 수도인 아르카나는 루트란보다 살기가 더 좋아보였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간호사가 들어왔다.
그녀는 능숙하게 붕대를 벗겨주고 새것으로 교체해줬다.
“흉터는 조금 남을 거예요.”
“그 정도는 괜찮수다.”
“푸흡. 처음부터 생각했는데. 그쪽도 한국인 아니에요? 말투가 왜 그래요?”
“그.. 용병생활을 좀 하다 보니. 잘 모르는 사람한텐 이렇게 돼 버렸소. 그래도 귀족나리 한 테는 안 그러니 걱정하지 마쇼.”
“얼굴은 멀쩡한데 대체 왜 그런 말투를 쓰는 거예요.”
간호사는 내 이마에 손을 얹어보더니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열도 없고 정신에 이상도 없는 것 같은데, 라고 중얼거리는 게 다 들린다.
“아니... 내 말투가 그리 이상해요?”
“네. 지금이 훨씬 낫네요.”
“음. 노력해 보겠수.... 아니 노력해볼게요.”
간호사와 이런저런 얘기를 떠들었다. 그녀는 말이 많은 편이라서 어쩌다 간호사가 됐는지 구구절절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끊임없는 조잘거림을 흘려들으면서 창밖을 보았다.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내가 너무 바쁘고 여유 없이 살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안색이 확실히 좋아졌군.”
간호사는 목례를 하고 병실을 나갔다.
로아나는 코트를 옷걸이에 걸고 의자에 앉았다. 제복은 갈아입었는지 말끔했다.
“일주일내로 황궁에 가 폐하를 알현하게 될 거다. 날은 그대가 정하면 된다. 다친 그대를 위해 폐하께서 배려를 해주셨으니.”
“딱 일주일째 되는 날 가고 싶다면 그동안 전 뭘 하고 있죠?”
“달리 하고 싶은 일이라도 있나?”
“아무래도.. 생각을 좀 해봐야 할 거 같아서요. 해야 할 일도 있고.”
아직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곧장 황제를 만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로아나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황궁에 가기 전까지 그대의 경호는 내가 맡게 되었다. 가고 싶은 장소가 생긴다면 내게 말하도록.”
“정말입니까?”
“그래.”
아예 일주일을 꼬박 채우고 나서 황제를 만나러 가야겠다. 로아나랑 함께 수도를 다닐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지금 당장이라도 움직이고 싶네요.”
“왜 그리 들떠있는지 전혀 모르겠군. 오늘까지는 안정을 취하는 게 좋아 보인다.”
“수도는 처음이라, 저도 모르게 들떴나보네요. 그럼 내일 바로 움직이죠. 가고 싶은 장소는 생각해 둘 게요.”
“그럼 그리 알고 내일 다시 오겠다.”
그녀가 돌아가고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우선 일주일간 천천히 생각해보고 황제를 만나자. 그리고 속물적이지만 로아나와 인연도 만들어두자.
‘김준석, 이지혜 두 놈도 조져야지. 시발 새끼들.’
배신이야 충분히 할 수 있다. 나도 그 상황에서 직접적인 배신은 아니더라도,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나.
다만 행동을 했으면 책임은 져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