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얼어붙어라! 아이스 폭풍!"
탑주가 다가오는 황제를 향해 주 문을 외웠다.
동시에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면 서 황제가 있는 문을 향해 살이
에일 듯한 바람이 밀어닥쳤다.
하지만 눈보라까지 포함된 폭풍 은 황제 앞에서 금세 수그러들었다.
황제의 왼손 새끼손가락에 끼워 진 반지가 마법을 막아 낸 것이다.
황제는 빛나는 반지를 확인하더 니 피식 웃었다.
"여기 탑주는 확실히 약하네. 아 이힌테일이었으면 막기가 쉽지 않 았을 텐데."
탑주는 황제의 손을 보고는 표정 이 어두워졌다.
황제의 손가락에는 각각 반지가 두 개씩 끼워져 있었다.
모두 마법 아이템이 분명했다.
다른 귀족들이 차는 몸을 따뜻하 게 해 주는 것에 그친 아이템과 다른,제대로 된 마법 아이템이 분명했다.
"도대체 왜 우리를 공격한 건가요?"
탑주의 물음에 황제는 걸음을 멈 추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움직임을 멈춘 이는 황제 하나뿐이었다.
그의 뒤를 따라 문을 넘어온 기
사들은 황제를 지나 탑주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실드!"
탑주가 놀라서 방어벽을 쳤지만, 마나를 품은 기사들의 검을 모두 막는 건 어려웠다.
여러 차례의 공격에 실드가 버티 지 못하고 깨져 나갔고,기사들의 검이 어린 마법사들을 향해 휘둘 러 졌다.
"살려 주세요!"
"아악!"
탑주는 눈을 감았다.
실드가 깨진 이상,그녀로서는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손수 키웠던 아이 들의 비명을 묵묵히 받아들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비명조 차 더 이상 들려오지 않게 되었다.
탑주는 다시 눈을 떴고,바로 앞 에 다가온 황제를 볼 수 있었다.
"다른 게 아니고,뭘 좀 가져가 려고."
황제는 탑주를 지나 유적 깊숙이 들어갔다.
바닥에는 수습 마법사들의 시체 들이 있었지만,황제의 걸음은 거
침이 없었다.
그는 지하 광장 한쪽 벽에 서서 이리저리 만지기 시작했다.
"대충 여기쯤이었는데."
황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벽에 바둑판같은 문양이 떠올랐다.
제이크가 황도에 갇혔을 때 봤던 지하 통로의 입구와 비슷한 문양 이었다.
"그 벽에 그런 게 있었다니
탑주는 벽에 나타난 문양을 보고 는 눈이 커졌다.
"그러고 보니,유적의 문도 열었
고……. 어떻게 들어온 건가요?" 탑주의 물음에 황제는 그녀를 향 해 대답했다.
"유적의 문을 여는 방법은 탑주 그대가 알려 주었고,여기 비밀 입구는 같이 찾아낸 거지."
"그럴 리가…… 난 알려 준 적이 없어요!"
"아,물론 지금의 그대는 알려 준 적이 없겠지."
황제의 말에 탑주는 뭔가 떠오른 모양이었다. 그녀의 표정이 확 바 뀌었다.
"설마. 복제 세상이란 게 실재한
다는 이야기?"
"역시,고대 마법 쪽은 얼음 탑 탑주가 제일 잘 안다니까. 금방
알아차리잖아."
"전지의 황제란 역시 미래를 보
고 온 황제들을 일컫는 말이었군요."
탑주는 이제야 이해가 되는 모양 이었다.
궁금한 것이 풀리자,탑주는 슬 픈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억울한 표정으로 바닥에 누워 있 는 어린 마법사들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도대체 여기에 뭐가 있 길래,모두를 죽인단 말입니까? 그냥 달라고 했으면 줬을 텐데."
"그럼 너무 오래 걸리니까 그렇 지. 여기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 에 돌아갈 시간까지 생각하면 협 상하고 할 시간이 없어."
시간이 많았어도 그냥 쓸어버렸 을 게 분명했지만,오래전 인연을 생각해 그 나름대로는 좋게 이야 기를 한 황제였다.
거기까지 말한 황제는 다시 고개 를 돌려,벽에 나타난 문양을 두 들기기 시작했다.
"좌상,좌하,우상,우하……
그렇게 십여 차례 문양을 두들기 자 문양 옆의 벽이 소리 없이 아 래로 내려갔다.
"다행히 달라지지 않았군."
열린 문을 보고 황제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옆에 있는 기사 에게 손짓했다.
"필요 없어졌다. 죽여."
탑주는 황제의 말에 허탈한 얼굴 이 되었다.
자신을 살려 놓은 이유가 단지 저 비밀 문이 안 열릴 때를 대비 한 것이었다니.
기회를 노리며 버틴 것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그녀를 향해 기사들이 달려드는 것을 보며 탑주가 이를 악물었다.
"하,하…… 그래,같이 죽자. 모 두!"
탑주는 가지고 있는 가장 강한 마법을 터트렸다.
주변을 모두 얼려 버리는 마법. 본인까지 얼려 버리기 때문에 평 소라면 절대 사용하지 않을 마법.
아이스 필드가 유적에 펼쳐졌다. 쩌어어어억.
순식간에 지하 광장이 얼어붙었
다.
바닥에 누워 있는 수습 마법사들 의 시체도,탑주를 공격하던 기사 들도,그리고,탑주 본인까지도.
지하 유적도 모두 얼음에 뒤덮였 지만,단 하나,방금 만들어진 통 로와 그 앞에 서 있는 황제는 무 사했다.
지하 유적 전체를 뒤덮은 얼음도 황제의 일정 거리 이상으로는 다 가가지 못했다.
황제는 마력을 잃어 검게 변한 반지 하나를 빼내 바닥에 버렸다.
"어떻게 된 게 달라진 게 하나도
없냐."
복제 세상에서도 마지막 순간 자 폭 마법으로 일대를 얼려 버린 탑 주였다.
그때는 상당수의 기사단을 잃어 버렸던 황제였지만,이번에는 기 사 다섯으로 끝낼 수 있었다.
그것도 지저분한 일을 처리하는 다크울프 부대의 기사들이었다.
황제로서는 기사도를 찾는 근위 기사들보다 더 쓸 만한 놈들을 잃 은 것이 조금 아까웠지만,이 유 적 안에서 벌어진 일을 아는 놈은 없는 편이 좋았다.
반항하지 않는 어린 마법사들을 학살한 것도 비밀로 해야 했지만, 그보다 그가 이 유적 안에서 가지 고 나온 것을 들키지 않는 게 중 요했다.
황제는 다시 한번 주변을 살펴 본 뒤에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한 시간 뒤,황제는 탑을 빠져나 왔다.
탑 밖에는 마탑을 정리한 근위 기사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 얼음 마탑이 검은 몬 스터를 처리할 비책을 숨기고 있
다고 알고 있었다.
어찌 보면 의심을 할 수도 있을 법한 상황.
하지만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는 그들로서는 생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들은 지쳐 보이는 황제를 맞이 한 뒤에 황도를 향해 출발했다.
결국,볼로뉴 영지의 영주는 성 과 영지를 버리고 동쪽으로 피난 을 떠나기로 했다.
성에 있던 영지민들 중에는 남아 있겠다고 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영지병과 지원을 온 사람들이 모 두 떠나자 울며 겨자 먹기로 따라 나설 수밖에 없었다.
긴 행렬이 꼬리를 물고 성을 빠 져나갔다.
다행히 전날 싸움의 피해가 컸던 지,검은 몬스터들의 습격은 없었다.
영지민들이 영지를 빠져나가는 것을 본 뒤, 레이첼과 일행은 제이크의 공간 이동 마법으로 아스 굴론 영지로 돌아왔다.
영지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제시카의 잔소리가 시작되었지만,다 행히 오랜만에 만난 레이첼과 앰 버 덕분에 제이크는 잔소리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영지는 그동안 많이 달라져 있었다.
제이크가 없었음에도 두 번째 몬 스터 웨이브도 잘 막아 냈다.
완성된 장벽과 던전 에고 빈크루 의 지원 덕분이었다.
그 덕에 아스굴론 영지는 루테리아 영지 이상으로 안전하다는 소 문이 퍼졌다.
더구나 마나가 활성화되어,엄청 난 수확량을 자랑하는 농경지가 펼쳐져 있었다.
혼란한 다른 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지 않을 리가 없었다.
과거 천막과 대충 나무로 얼기설 기 만들었던 집들은 어느새 몇 층 짜리 건물로 바뀌어 있었다.
임시로 만들었던 신전은 석재로 제대로 만들어졌고,상가들이 늘 어서 있는 대로변은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번잡해 보였다.
거기다 용병들이 거리에 넘쳐났다. 새로 남쪽에 열린 대수림은
용병들에게도 신천지에 가까웠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네요."
"어쩔 수 없습니다. 밖의 소문은 이곳에도 들려오니까요."
두 손 가득 든 서류를 내려놓으 며 알프렛이 제이크의 말에 대답 했다.
수북이 쌓여 가는 서류에 제이크 는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
"아니,그동안 알프렛이 잘 처리 했다고 하던데요."
"저는 집사입니다. 집을 나선 주
인을 대신해 일을 처리하긴 했지 만,본업을 망각할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바로 연맹군이 있는 곳 으로 가야 하는데..
"그럼,그때까지 최대한 처리해 주십시오. 어차피 그동안 일도 주 인님의 지시대로 처리한 것입니다."
"아니,영주님이나 앰버 마법사 님에게 좀 나누어 주면……
"그분들에게도 이미 잘 분배해 드렸습니다. 그분들 또한 매번 자 리를 비우시니 미리 준비를 해 두
었지요."
제이크가 없는 동안 알프렛은 영 지의 실무까지도 잘 처리해 주었다.
덕분에 레이첼 영주와 앰버마저 도 알프렛을 믿고 영지를 비우게 되었고,이제는 알프렛이 영지의 실세로 불릴 정도였다.
제시카는 벌써 그의 고난을 놀린 뒤,술 마시러 떠나 버렸고,제이크는 꼼짝없이 잡혀서 일해야 했다.
그렇게 서류에 파묻힌 지 이틀.
제이크는 다시 연맹군이 있는 곳
으로 떠나게 되었다.
원래 레이첼은 볼로뉴 영지의 일 이 끝난 뒤 바로 연맹군으로 갈 생각이었지만,제이크가 나타난 덕분에 공간 이동 마법을 쓸 수 있게 되어 시간이 남은 것이었다.
제이크와 레이첼,제시카와 두 사제. 이렇게 다섯 명이 던전 광 장 가운데 서 있었다.
그동안 레이첼과 같이 다니던 앰 버는 광장 구석에 서서 일행을 바 라보았다.
제이크가 돌아왔으니 영지 마법 사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올 필요
가 있었다.
그런데 전쟁터로 가지 않게 된 그녀의 표정은 의외로 그리 좋지 않았다.
전쟁터로 가지 않는 대신,수많 은 서류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 기 때문이었다.
"빈크루."
제이크가 나지막이 던전 에고의 이름을 불렀다.
[네. 부르셨나요.]
지하 광장에서 아름다운 음성이 들려왔다.
이윽고 바닥에서 반투명한 여성,
빈크루가 솟아올랐다.
빈크루의 모습도 전과 달라져 있 었다.
여전히 아름다웠지만,아직 어려 보였던 요정이 이제는 완연한 성 인으로 변해 있었다.
물론 나이로 따지면 몇 살 되지 않은 에고였지만,모습과 행동과 말은 어엿한 성인처럼 보였다.
-주인님,저 많이 컸죠? 주인님 을 위해 힘냈어요.
하지만 제이크에게만 들리는 음 성은 아직 어린 에고 그대로였다.
파티마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 지만,곱게 차려입은 던전 에고의 모습은 제이크가 보기에도 꽤 괜 잖았다.
"결국,저런 취향이야?"
빈크루를 보며 미소를 짓는 제이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제시카가 바로 한마디를 했고,레이첼 도 빈크루와 제이크를 번갈아 가 며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이네트는 알리바의 발을 밟았다.
"침 흘리며 보지 마."
놀란 알리바가 손으로 입을 훔쳤
지만,침은 보이지 않았다.
"침 안 흘렸어."
"흥!"
알리바의 변명에 이네트는 코웃 음을 쳤다.
그렇게 한바탕 소란이 일었지만, 빈크루는 착실하게 자신이 할 일 을 했다.
[공간 이동을 시작하겠습니다. 주인님 준비되었습니다.]
빈크루의 말에 제이크는 목걸이 의 마나를 뽑아 바닥에 펼쳐진 마 법진에 불어넣었다.
그러자 마법진이 환하게 빛을 뿌
렸다.
연맹군이 있는 곳은 이곳에서 영 지 여러 개를 뛰어넘어야 하는 먼 곳이었다.
전 같으면 엄두도 나지 않을 곳 이었지만,마법 목걸이를 지닌 제이크에게는 충분히 가능한 거리였다.
화아아악!
빛이 홀 전체를 감쌌고 잠시 뒤, 홀에서 제이크 일행의 모습이 사 라졌다.
[다녀오세요,주인님.]
일행이 사라진 뒤,빈크루는 제
이크가 있던 자리를 향해 깊게 고 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