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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급 서기관의 회귀-151화 (151/222)

151 화

기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 로 무너져 내렸다.

"내가 이토록 허망하게 당하다 니……

히베루니아 왕국의 자랑스러운

기사가 이런 외진 영지의 여기사 에게 패하다니,기사는 도무지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상대의 검을 제대로 보지 도 못했다.

마지막 숨이 넘어가는 그 순간 까지,기사는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레이첼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주 업무를 하느라 검을 소홀 히 했는데도 실력이 더 늘어난 것 같았다.

'검을 멀리하면 검이 다가온다.'

그런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기 사들 간에 전해 오기는 했지만, 레이첼은 그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일할 때도 계속 나를 차고 있 었으니,이제 슬슬 내가 손에 익 었다는 거겠지.

그녀의 검,칼레드불크가 대신 그럴듯한 이유를 설명했다.

"다른 이유가 없다면 그 이유겠 죠."

-그것밖에는 없으니까. 인정하 긴 싫지만,영주가 천재라서 그 런 게 더 크긴 하겠지.

에고 검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 셨다.

-마나를 각성시킨 뒤로 알려 줄 게 없는 주인은 처음이라니 까. 알아서 성장하니 정말 내가 쓸모가 없는 기분이야.

"그래도 도움이 많이 되고 있어요."

-엎드려 절 받기야. 아무튼,오 랜만에 제대로 움직이니 나도 기 분이 좋군.

사람을 죽인 뒤 기분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으니,레이첼은 씁쓸 한 느낌이 들었다.

검 실력이 늘어나는 것은 좋지 만,에고 검과 달리 그녀는 사람 을 죽이는 것이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래도 해야 할 때는 해야 한다 는 것을 알고 있었다.

레이첼은 집무실을 향해 계속 걸어갔다.

영주성의 성문이 무너진 뒤,적 들은 빠르게 정리됐다.

일부 병사들이 앞을 막아서긴

했지만,레이첼의 검을 막을 자 는 없었다.

병사는 물론이고 기사들까지도 그녀의 검 한 번에 모두 쓰러졌다.

그리고 이제,레이첼의 앞에는 집무실 앞을 지키는 중년의 기사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전 황태자비가 이토록 검을 잘 쓰는 줄은 미처 알지 못했군요."

중년의 기사는 이슈비를 지원하 는 히베루니아 군의 실질적인 책 임자였다.

"이슈비 공자는 안에 있나요?"

동생에게 굳이 공자라고 지칭하 는 그녀의 모습에 의아한 표정을 짓던 그는 곧 묘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건 직접 알아보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그 말과 함께 기사는 검을 치켜 들고 레이첼을 향해 달려들었다.

잠시 뒤.

레이첼이 집무실 문을 열고 안 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집무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디에 있지?'

레이첼은 찬찬히 내부를 둘러봤다.

깨끗했던 아버지의 집무실은 어 수선하게 변해 있었다.

아버지가 늘 앉아 업무를 보던 책상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그 위에 놓여 있어야 할 서류들 은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레이첼은 그중 하나를 집어 들 었다.

"체포 목록 상인,귀족,유 지……

종이에는 감옥에 갇혀 있는 사

람들의 목록이 쭉 적혀 있었다.

"설마……

레이첼이 종이를 던져 버리고 집무실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정신없이 복도를 달려 성 지하로 향했다.

그녀가 도착한 영주성 지하의 감옥은 피 냄새로 가득했다.

복도에는 간수로 보이는 병사들 의 시체가 흩어져 있었고,각 방 마다 시체가 놓여 있었다.

귀족으로 보이는 시체,또는 상 인으로 보이는 시체.

모두 루테리아 시의 유지들의

시체였다.

그녀는 그 사이를 지나 마지막 감옥 앞에 멈추어 섰다.

그 안에는 쓰러진 시체 하나와 그녀의 동생이 피범벅이 된 채로 침대에 앉아 있었다.

"어서 와,누나. 그런데 너무 늦 었어."

이슈비는 그녀를 보며 빙긋 웃 었다.

"이게 무슨…… 정말…… 미쳤 구나,너."

레이첼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동생을 바라보았다.

"하,하하…… 더는 달아날 곳 이 없다고 생각하니,혼자 죽기 억울하더라고. 그래서 영주 영주

가 된 기분이라도 좀 내기로 했어."

"뭐라고?"

"다들 말만 영주라고 하면서 날

무시하잖아. 그래서 있지,그래도 내가 영지민의 생사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영주라는 것을 모두

에게 보여 준 거야. 봐,이들도 모두 죽을 때는 나를 인정했다 고! 덕분에 내 자존심을 겨우 찾

았어."

"왜 그랬지? 그냥 달아나면 됐 잖아. 네가 죽인 사람들은 모두 이웃이자 너를 귀여워해 준 어른 들이었어!"

"큭큭,바로 그 점이 재수가 없 었어. 뭐…… 누나랑 내가 그렇 게 깊게 얘기할 사이는 아니지 않나? 재미도 없는데. 그럼 슬슬 끝내 볼까."

-주인,안 된다. 이미 망가져 버렸다. 마검을 쓴 후유증 때문 인 것 같아.

에고 검은 그런 이슈비를 보며 부정적인 말을 던졌다.

"근데…… 누난 어차피 날 직접 죽이지도 못하잖아. 재판을 걸든 가. 아니면 부하에게 시키든가 해. 괜히 손을 더럽힐 필요는 없 잖아?"

이슈비는 마지막까지 레이첼을 향해 이죽댔다.

레이첼은 이슈비를 조용히 바라 보다가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 었다.

그리고.

서걱-

감옥의 벽에 길게 피가 뿌려졌다.

심장이 있는 자리를 정확히 베 어진 이슈비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누나만 깨끗하면 억울하 잖아. 이제 우리 형제는 모두 서 로를 향해 검을 휘두르게 된 거야. 같이 지옥에서 보자고."

이슈비는 만족한 얼굴로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레이첼의 얼굴은 일그 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다.

-정신 차려! 여기서 이성을 잃 으면 너도 마나에 먹힐 수 있어.

에고 검이 걱정하며 소리를 질 렸다.

다행히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아뇨. 정신은 멀쩡해요. 다만 화가 날 뿐이에요."

그녀는 얼굴을 쓸어내린 뒤, 감 옥을 나섰다.

"모두를 구하지 못한 나한테 화 가 났고."

그녀는 죽은 시체를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이 나라를 엉망으로 만든 황제 에게 화가 났어요."

그리고 복도에 쓰러져 있는 히 베루니아 왕국군을 바라보았다.

"거기다,가족을 이간질시키고, 마검을 쥐게 만들어 동생을 파괴 한 히베루니아는……. 절대 용서 할 수 없어요."

그녀는 굳은 얼굴로 지하 감옥 을 빠져나갔다.

"저도 이제 제이크처럼 목표가 생긴 것 같아요."

그녀가 쥐고 있는 검에서 아직 도 동생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영주 성 위로 새 문양의 깃발이

걸렸다.

신조가 그려진 깃발로, 루테리아가 원래의 주인 품에 돌아왔다 는 뜻이었다.

동쪽 거리를 청소하던 제시카 도,기사와의 싸움 덕에 다친 니 콜라스도 성에 걸린 깃발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공터에 멍하니 앉아 있 던 루이도 성에 걸린 깃발을 보 았다.

"지금 나가도 길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나."

루이는 난감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공터는 치열했던 싸움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주변을 막고 있던 벽들은 모두 허물어졌고,공터 바닥은 모두 파헤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공터 중앙에는 젊은 기사의 시체가 누워 있었다.

루이와의 대결 끝에 목숨을 잃 은 로럴드의 시체였다.

전에 모시던 기사를 상대로 루 이는 최선을 다해 싸웠고,결국 이길 수 있었다.

"근데 이제 어떻게 하지. 휴가

를 써야 하나?"

죽어 가는 로럴드에게 히베루니 아에 남은 백작의 아내와 딸 이 야기를 들은 루이였다.

죽는 와중에 마지막 양심이 움 직였는지,로럴드는 루이에게 그 의 가족 이야기를 꺼냈다.

물론 무시해도 그만이었지만, 안면이 있는 두 여성을 생각하면 그냥 무시하기도 쉽지 않았다.

백작 가문에서 백작 이외에 그 에게 도움을 준 사람은 두 여성 밖에 없었다.

백작 부인은 자기 아들 때문에

그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정도였 지만,딸은 그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했었다.

만약 남부 왕국에서 잘살고 있 었다면 신경 쓸 필요도 없었겠지 만,버림받은 두 여성의 이야기 를 들으니 그냥 넘기기가 어려웠다.

하지만,그는 머리를 흔들어 걱 정되는 마음을 털어 버렸다.

"지금은 그걸 생각할 때가 아니 지."

아직 할 일이 많았다.

개인적인 일 때문에 주인과 영

지의 일을 그르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누워 있는 로럴드에 게 고개를 숙인 그는 공터 밖으 로 향하는 길을 걸었다.

그리고 잠시 뒤.

"여긴 또 어디야?"

그는 또 다른 뒷골목을 헤매기 시작했다.

이슈비가 장악했던 짧은 기간, 루레티아 영지의 피해는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다음 날부터 이루어진 복구 작 업은 수많은 난관에 부딪혔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을 담당해야 하는 제이크는 눈앞에 쌓인 수많 은 서류에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아스굴론 영지의 서기관인 제이크가 루테리아의 복구에 참여할 이유는 없었지만,문제는 제이크 말고 일할 사람이 없었다.

이슈비가 죽인 사람 중에 영지 의 실무를 담당한 사람들도 상당 수가 껴 있었던 것이었다.

더구나 전쟁을 피해 숨어든 사

람들도 많아서,모든 업무가 제이크에게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를 도와줄 유일한 사람인 레 이첼은 그녀를 찾아온 루테리아 의 유지들을 만나느라 정신이 없었다.

감옥에서 많은 유지가 죽었지만 숨은 자들도 많았다.

그런 그들이 레이첼의 손에 의 해 영지가 회복되자,한걸음에 찾아왔던 것이다.

"빨리 영주로 취임하시고,새로 가신을 임명하십시오."

"황제 페하께 허락을 받아야 하

지 않을까요?"

"비상사태이니,우선 영주 선포 를 하고 후에 허락을 받아도 될 겁니다."

"그럼 가신을 뽑는 기준은 어떻 게 할까요?"

"그보다 레인저들을 다시 모집 하는 일이 우선입니다. 치안이 엉망이에요."

"가둔 놈들도 매달아야죠."

레이첼은 가만히 있는데 몰려온 사람들은 마음대로 신나게 떠들 고 있었다.

"그냥 두고 볼 거예요?"

한심한 모습에 제시카가 레이첼 에게 속삭이자 레이첼은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 두고 봤으면 됐죠. 이 제 정리를 하고 제이크를 도와야 해요. 그를 저대로 놔두다가는 아스굴론으로 도망갈지도 몰라요."

레이첼의 말에 제시카가 옆에 서 있는 루이를 바라보며 눈짓을 했다.

원래는 니콜라스가 해야 할 일 이었지만,그가 다친 지금,영지 의 기사인 루이가 해야 했다.

다행히 루이는 일을 제대로 했다.

쿠우웅!

그가 들고 있던 방패를 땅에 두 드리자,마나가 실린 방패가 접 견실 전체를 울렸다.

한참 떠들던 사람들이 놀라 레 이첼이 앉은 상석을 바라봤다.

"이제 할 말이 없으신가요?"

레이첼의 말에 유지들은 어리둥 절한 표정이 되었다.

과거 들어왔던,온화한 그녀의 말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저도 한마디 하겠습니다.

나 레이첼은 아스굴론의 영주입 니다."

유지들의 표정은 더욱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루테리아의 마지막 후계자가 이 상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이미 루테리아 가문을 떠 나 독립했고,이제 루테리아 가 문은 사라졌습니다."

그 말에 사람들은 넋이 나간 채 멍하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이 루테리아는 나 아 스굴론 영주에 의해 합병이 된 상태입니다. 이제 루테리아는 영

주전에 패해 아스굴론 영지의 하 위 영지로 편입됩니다."

황제와 귀족들의 동의가 있어야 하겠지만,이미 벌어진 일에 반 대하기는 쉽지 않을 게 분명했다.

더구나 유지들의 말대로 그녀는 공식적으로 루테리아 영지의 후 계자였다.

루테리아가 아스굴론을 먹든, 아스굴론이 루테리아를 먹든 그 들에게는 별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그런 신생 영지보다는 루테리아가……

"아버지를 생각하세요,공녀. 영 지를 버리신다면……

다만 루테리아의 유지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하지만,그들은 어떤 대답도 듣 지 못했다.

대신 그들의 눈에 신조를 어깨 에 얹은 초대 공작의 벽화와 그 앞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레이첼 과 작은 새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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