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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급 서기관의 회귀-100화 (100/222)

100화

밤늦은 시각.

이슈비는 홀로 집무실 책상에 앉 아 서류에 사인을 하고 있었다.

하나씩 사인하는 서류들에는 감 옥에 가둬야 할 형과 누나 편의

귀족들,그리고 끌어들여야 할 상 인들과 용병들 명단이 적혀 있었다.

"의외군. 레이첼 누나 편인 귀족 이 있다니……

이슈비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서류를 쳐다보고는 바로 사인을 했다.

"아버지가 전투에 한 번 참가하 게 했다고 바로 우르르 달려가다 니. 그래 봤자 버림받은 파혼녀에 불과한데."

"여태 그렇게만 생각했었던 거 니?"

홀로 중얼거리던 이슈비는 앞에 서 들려온 대답에 고개를 번쩍 들 어 올렸다.

언제부터였던 걸까.

집무실 문 앞에는 그의 누나,레 이첼 공녀가 슬픈 눈으로 그를 바 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봤는데,반갑다고 말 하기는 힘드네."

공녀의 한숨을 토하듯 내뱉는 말 에 이슈비는 눈을 크게 떴다.

"누나?"

그는 눈으로는 그녀를 바라보면 서도 조용히 책상 옆에 놓은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여기는 왜 왔지? 영주 대리의 명령을 어기면 직권 처형도 가능 하다는 것을 몰랐나?"

"몰랐을 리가 없잖아. 하지만,영 주에게 상해를 입힌 사람을 영주 대리로 세울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지."

공녀의 말에 이슈비는 움찔 몸을 떨었다.

그는 지그시 공녀를 노려보다가 결국 어깨를 으쏙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변 명으로 의미가 없겠어. 누나가 그

런 표정을 하고 있으면 거짓말은 먹히지 않겠지."

이슈비는 자신의 검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어디까지 알고 온 거야? 더구나 몰래 여기까지 잠입할 정도면 이 성에 제대로 세력을 만들어 놓은 모양이야. 확실히 황성에서 제대 로 배워 오긴 했나 보네."

레이첼 공녀가 누구와 함께 온 것인지 알지 못하는 이슈비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랬니? 적어도 네 입에서 진실을 듣고 싶어."

이슈비의 비웃음에도 공녀는 조 용히 질문했다.

그녀의 질문에 이슈비는 검을 잡 은 손에 힘을 주었다. 동시에 얼 굴을 일그러뜨렸다.

"칫,도대체 뭘 듣고 싶은 거지? 어차피 흔한 이야기잖아? 형제들 을 제치고 아버지에게 영주 직위 를 물려받으려는 평범한 막내아들 이야기지."

그는 결국 검집에서 검을 뽑아 손에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나도 어차피 영주 자리를 노

리는 거잖아. 귀족이면 귀족답게 가식을 버려. 여기 몰래 온 것도 나를 제압하고 자기가 후계자 자 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거잖아. 안 그래?"

이슈비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서 집무실을 쩡쩡 울릴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공녀는 그의 외침을 신 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표 정과 검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자 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확실히 그 검이 이상하구나. 사 람을 좀먹는 마검이야."

-마검보다는 요검에 가깝지만, 뭐 사용자에게 좋지 않는 물건인 건 마찬가지겠지.

"아,이 검? 뭐 평범한 마법 검 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어. 그래서 뭐가 어때서? 위선과 거짓으로 감싼 구속을 모두 벗어 버리고 진정한 자유를 느끼게 해 주는 검인데!"

-확실히 그의 말이 맞긴 해. 제 어를 풀고 본성으로 드러나게 하 는 마법이 심겨 있으니.

"그게 나쁜 겁니다. 그러면 짐승 과 다를 바 없어요."

공녀의 대답에 이슈비가 분노를 토해 냈다.

"짐승이라고? 그동안 내가 얼마 나 죽을 것같이 답답했던 줄 알아? 잘난 아버지에 잘난 형,거기 다가 차기 황제와 결혼할 예정인 누나까지. 그런 사이에 평범한 내 가 어떻게 버텨 낸 줄 알아?"

-상당한 자격지심이네. 저 나이 에 기사라면 상당한 재능인데 말 이야.

"나를 비웃는 레인저들과 용병 들,거기다가 지나가는 시녀와 하 녀들까지 나를 깔보고…… 몰래

몇 놈 죽여서 그 입에서 살려 달 라는 말이 나오게 만들기도 했지 만,다른 놈들은 여전히 비웃고 있었단 말이야!"

계속되는 이슈비의 말에 에고 검 은 할 말을 잃었는지 더 이상 말 을 걸어오지 않았고, 공녀는 자 기도 모르게 검에 마나를 밀어 넣 었다.

"그게 정말이니?"

공녀의 에고 검이 희미하게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홍,거봐. 결국,싸우러 온 거잖아. 거기다가 사람들도 전부 주변

에서 치워 버렸군. 이렇게 고함을 쳤는데 아무도 오지 않는 것을 보 니 정말 제대로 준비한 모양이 지?"

"정말 말이 안 통하니…… 흠, 그래. 우선 오랜만에 널 혼을 내 줘야겠구나."

"흥,이제 막 마나를 각성해 놓고 뭘 그리 잘난 체야? 다른 기 사들이나 아버지가 그동안 봐준 사실을 몰랐던 거야?"

이슈비의 검이 붉게 타올랐다.

"쳇,어디서 마법 검을 얻어서 잘난 척하는지 모르겠지만,나도

같은 마법 검이니 이젠 그것도 끝 이야!"

이슈비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면 서 검을 크게 휘둘렀다.

웅-

검풍에 서류 뭉치들이 하늘로 치 솟았다.

동시에 공녀의 팔이 움직였다.

카앙! 캉! 캉!

검광이 집무실 중앙에서 계속 터 져 나왔다.

하늘을 날리던 서류들은 수십 개 로 나뉘어 눈처럼 흩날렸다.

쿠앙,캉!

퍼엉…… 쩍!

곧이어 장식장들마저 쩍쩍 갈라 지고,의자와 책상도 산산이 부서 졌다.

다음 순간.

퍽!

공녀의 다리에 걷어차인 이슈비 가 한쪽 벽에 처박혔다.

"객!"

쓴 물을 토해 낸 이슈비는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공녀를 쳐다보 았다.

"어째서? 왜! 내가 밀리는 거 지?"

그의 말에 레이첼은 한숨을 내쉬 었다.

"네가 한 번도 나하고 대련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야. 옛날에 는 네가 너무 어렸고,황도에서 돌아와서는 내가 마나를 얻지 못 했다고 상대해 주지 않았잖니."

"그 말이 아니잖아! 어째서 누나 가 나보다 강한 거지? 여태 황도 에서 황제에게 알짱거리기만 한 누나였잖아!"

공녀는 계속 자신을 모욕하는 동 생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 는 담담히 그가 들고 있는 검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 분노를 토해 내던 이슈비는 자신의 손이 가벼워진 것을 느끼고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터엉!

그의 검이 결국 반으로 잘려 아 래로 떨어져 내렸다.

"어떻게…… 왜…… 어떻게……

-그런 허접스러운 마법 검으로 나를 막을 생각을 하다니. 공녀가 봐주지 않았으면 한 번에 박살 났 을 거야.

머릿속에서는 에고 검의 투덜거

림을 들으며 공녀는 공황에 빠져 덜덜 떨고 있는 동생을 향해 입을 열었다.

"지금도 같은 생각이야? 네가 한 모든 일이 모두 가족들 때문이라고 생각해?"

공녀의 말에 눈을 이리저리 돌리 던 이슈비는 악을 쓰듯이 말을 토 해 냈다.

"젠장! 당연하잖아! 그럼 누구 때문인데!"

검이 부러졌지만,이슈비는 끝까 지 악을 썼다.

좀 전처럼 앞뒤 안 가리는 모습

은 아니었지만,떼쓰는 지금은 그 가 안쓰럽기까지 했다.

"그래서 날 죽일 생각인 건 아니 겠지? 난 영주 대리야. 날 죽이면 가신들이 모두 들고일어날 거야. 어차피 날 죽여도 누나가 영주가 되는 건 무리잖아. 그것보단 차라 리 우리 둘이 같이 힘을 합쳐서 형을 상대하는 게 어때?"

이제는 비굴한 협상까지 하려고 하는 동생의 모습에 공녀는 그만 질려 버리고 말았다.

레이첼은 동생을 빤히 내려다보 다 검을 치켜들었다.

"더는 넌 내 동생이 아니야. 지 금 이 순간부터 너와는 의절이다."

"안 돼! 살려 줘! 죽고 싶지 않 아!"

자신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검을 보고 이슈비는 비명을 질러 댔지 만,그녀의 검은 무심하게 그를 치고 지나갔다.

퍽!

"크억."

칼에 목을 얻어맞은 이슈비는 그 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칼등으로 치셨군요."

"지금 영주 대리를 죽일 수는 없 었어요. 영주 대리마저 죽으면 영 지는 엉망이 될 거예요."

뒤에서 나타난 제이크의 말에 공 녀는 변명하듯 대답했다.

물론 이슈비의 말처럼 영주 대리 를 함부로 죽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공녀의 침울한 표정에서 차마 동생을 죽일 수 없는 누나의 모습이 엿보였다.

제이크는 그런 그녀의 대답을 수 긍하고 넘어가 주었다.

"상황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

죠."

"그보다 아버지는 어떠세요?"

제이크는 영주의 집무실 주변에 방음 마법을 쳐 놓고 영주가 잠들 어 있는 침실에 다녀왔었다.

"아쉽게도 제 마법이나 포션으로 는 치료할 수 없는 독입니다."

공작을 찌른 검은 에고 검에 반 으로 잘렸지만,그래도 몇 개 있 지 않은 마법 검 중 하나였다.

포션이나 마법으로 해독될 수 있 다면 고대 마도 제국에서부터 유 물로 내려올 리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독이 마나를 잡

아먹어서 결국 공작도 죽고 말겠 죠.

파티마의 말처럼 누워 있는 공작 의 목숨도 그리 길지 않아 보였지 만,제이크는 방금 의절한 공녀에 게 그 말까지 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늦은 밤이라고 해도 영 주성 안이었다. 방음 마법을 걸었 다지만,경비병에게 안 걸리리라 는 보장은 없었다.

똑,똑,똑.

"당직 기사입니다. 경비병들에게 집무실의 불이 꺼졌다는 말을 듣

고 왔습니다. 별일 없으십니까?" 불이 꺼지고 얼마 뒤 찾아온 기 사는 대답 없는 집무실의 문을 강 제로 열어젖혔다.

"억! 영주 대리님……

그 안에서 홀로 기절해 있는 이 슈비를 발견했다.

당연히 영주성은 비상이 걸렸다. 그사이,제이크와 공녀는 한발 먼저 영주성을 빠져나와 도망 가 는 중이었다.

"아차 하면 못 빠져나올 뻔했네요. 영주성의 감시가 보통이 아니 에요."

"성을 마구 헤집고 나온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죠."

속은 엉망일 텐데도 공녀는 억지 로 담담한 척 제이크의 말에 대답 했다.

"공녀님이 샛길을 다 알려 주셔 서 쉽게 다닌 거죠. 지금도 공녀 님 덕분에 이런 뒷길로 빠져나온 거잖아요."

제이크가 마나를 가진 이가 집무 실로 다가오는 기척을 알아차리고 는 공녀와 급히 몸을 피한 것이었다.

공녀가 알려 준 샛길은 중간에

높은 성벽과 방책으로 막혀 있었 지만,마법사인 제이크에게는 문 제 없었다.

"그런데 아쉽네요. 남작님이 같 이 갔으면 도움이 되었을 텐데."

"남작이야,공작의 대를 이을 것 은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다른 귀족들도 대부분 같은 생각이고요. 그대가 이상한 거예요."

어두운 주택가를 빠르게 이동하 면서 공녀는 제이크를 힐끔 쳐다 보았다.

제이크에게서 그동안의 이야기를

들은 공녀는 제이크가 그녀를 돕고 있는 것을 고마워하면서도 의 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제약이 있겠지만,제이크는 마법사로서의 실력만으로 도 충분히 제대로 된 '남자' 계승 귀족에게 의탁할 수 있었기 때문 이었다.

'뭐,지금의 공녀는 자신의 정치 력을 잘 모를 테니까,'

황제가 죽은 뒤 내란과 적국의 침입에 홀로 버틴 그녀의 모습과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들이 따랐던 그녀의 행적을 기억하는 제이크로

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뭐,기사로서도 이렇게 대단하리 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물론,군주가 보여야 할 냉혹하고 냉철한 모습은 많이 부족하기 는 했다.

하지만 냉혹하기만 한 황제가 벌 인 일을 너무도 아는 제이크로서 는 지금 그녀의 모습이 오히려 마 음에 들었다.

"흠,아무래도 기절했던 영주 대 리가 깨어난 것 같네요. 추척대가 나설 모양인데요?"

불이 환하게 밝혀진 영주성을 돌

아보며 제이크는 태평하게 말했다.

"그런데 루테리아 시를 벗어날 방법은 있겠죠? 거기다 남작도 아 직 시 밖으로 나가지 못했을 텐 데……

"뭐,남작 쪽은 지금 도와주면 될 것 같고요……

제이크는 멀리 남쪽 성문 쪽을 향해 손에 든 완드를 털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과앙!

루테리아 시의 남쪽 성문이 폭음 을 일으키며 터져 나갔다.

수리하기 위해 쌓아 놓은 방책들 이 무너져 내렸고,문을 지키던 레인저와 병사들이 허둥지둥 사방 으로 흩어졌다.

그 사이로 말에 탄 남작이 쏜살 같이 달려 나갔다.

미리 제이크가 남작에게 말한 대 로 제이크의 신호에 맞춰 남작이 시를 빠져나간 것이었다.

"그럼 우리도 돌아갈까요?"

검은 하늘로 불꽃과 연기가 솟구 치는 것을 보며,제이크는 공녀와 함께 하녀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향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영주성에서 기사와 병사들이 쏟 아져 나와 시 곳곳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수가 바로 제이크와 공녀가 향한 집으로 달 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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