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화
한편,공녀와 그녀의 군대가 성 을 출발한 아침.
제이크는 성의 지하 광장 중앙에 서서 던전을 만들고 있었다.
쿠루루릉!
무너진 벽이 스스로 복구되고, 바닥에 떨어진 암석이 다시 위로 올라갔다.
스스숙-
쏟아진 토사가 스스로 메워지고, 묻혔던 통로가 다시 뚫렸다.
전날 전투로 반쯤 무너진 지하 광장은 마치 시간을 거꾸로 돌리 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모든 일은 제이크가 마석의 힘을 사용해 벌이는 기적이었다.
던전 중앙에는 주먹만 한 마석이 아름다운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마석 주변에는 여러
개의 작은 마석들이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툭.
돌고 있는 마석 가운데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미 바닥에는 여러 개의 작은 마석들이 흩어져 있었다.
-아까운데요. 이렇게 마구 써야 할 마석이 아니란 말이에요.
제이크의 손에 들린 파티마가 아 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쩔 수 없지. 평범하게 외부의 마나를 모아서 던전을 구축하려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어."
-그래도 아쉽네요. 그동안 모아 온 마석 태반이 쓸모없는 돌로 변 해 버렸으니.
"이 버려진 성을 기반으로 삼으 려면 이 성에서 힘을 보여 줘야 해. 단지 들렀다 가는 곳으로 끝 나면 이곳을 던전으로 삼기 힘들어."
물론 마도 제국 때,사람이 없는 외진 곳에 던전을 만들었던 마법 사도 있었다.
하지만,마법적인 실력뿐만 아니 라 사회적인 위치도 생각해야 하 는 제이크로서는 인간 사회를 벗
어날 수 없었다.
이 버려진 성에 다시 사람들이 살게 하려면 이 성 주변은 안전하 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 줘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다른 마법 기술자들에게 마법사인 게 들키지 않을까요?
"어차피 앰버 님과 레이첼 공녀 님을 방패로 세울 거니까. 두 분 이서 잘 막아 주겠지."
제이크는 다른 생각이 있는지 조 금은 어설퍼 보이는 방책을 내세 웠다.
잠시 파티마와 말을 나누던 제이크는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물론 파티마가 조금 도와주기는 했다.
하지만 이번 던전은 최대한 직접 만들 생각이었다.
이미 죽은 두더지 몬스터가 만들 어 놓은 던전을 사용하게 된 덕분 에 제이크는 던전 전체를 한눈에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실험실이나 창고 자리는 잘 잡 아 놓고."
제이크의 손이 바닥을 향해 펼쳐 졌다.
지하 광장 아래쪽 땅이 마나에 의해 단단히 다져졌다.
실험실이나 창고는 우선순위에 밀려서 지금은 만들지 못했지만, 던전에서 제일 중요한 설비였다.
"성 전체에 마나를 흐르게 하고."
이어 제이크가 손을 하늘로 들어 올렸다.
동시에 던전을 타고 흐르던 마나 가 지면을 뚫고 성을 타고 치솟아 올랐다.
마나는 성벽과 바닥,그리고 성 광장에 빛나는 선을 만들었다.
성 전체를 던전과 일치시키는 마 법진이 만들어진 것이다.
갑자기 성벽이 빛나자,성을 지 키던 병사들이 깜짝 놀라고 말았다.
"레인저님! 성벽이 빛나고 있어 요!"
"성 중앙 홀 바닥에도 빛나는 선 이 그려지고 있답니다!"
"설마! 귀신?"
병사들은 레인저에게 달려와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마법사님이 마법진을 만드시는 거다! 모두 자기 자리를 지켜!"
레인저는 제이크에게 미리 들어 알고 있었기에,병사들을 다그쳐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도록 했다.
병사들은 그제야 호들갑을 떠는 것은 그만뒀지만,마법사가 벌이 는 일이라는 말에 다른 의미로 겁 을 먹게 되었다.
그런데 병사들의 놀람은 이게 끝 이 아니었다.
그 뒤로도 갑자기 땅의 모양이 바뀌고,성의 구조가 변해 버렸다.
마지막으로 이틀 뒤에는 병사들 옆으로 돌로 이루어진 골렘들이 지나갔다.
쿵,쿵,쿵-
"제발 살려 주세요…… 신이시 여."
병사들은 반쯤 넋이 나가 버렸 고,일부 병사는 엎드려서 신에게 빌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요격을 떠났던 용병들과 병사들이 성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먼저 돌아온 사람들의 얼굴은 모 두 지쳐 있었다.
한데 그들은 성에 들어와 모두 의아한 얼굴로 바뀌었다.
성에 남아 있던 병사들의 얼굴이 훨씬 좋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 눌 시간은 없었다.
타다다다-
그들은 급하게 내성 안으로 들어 가 지하로 내려갔다.
그들이 향한 곳은 제이크 일행이 갔었던 지하 와인 저장고.
제이크 일행이 강제로 열었던 비 밀 통로는 지금도 활짝 열려 있었다.
"이곳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쭉
직진하면 성 뒤쪽에 있는 언덕이 나올 겁니다. 그 뒤로는 전에 말 한 대로 준비해 주십시오."
열린 오크통 앞에는 어느새 돌아 온 루이가 사람들을 안내하고 있 었다.
"이상하네. 이런 데에 비밀 통로 가 있었나?"
"아,여기 성에 모여 있다고 생 각하게 하고 후퇴하는 거였군."
용병들과 병사들은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비밀 통로로 들어갔다.
"통로가 마치 새로 만든 것 같은 데요?"
용병들은 비밀 통로를 걷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게. 성이 낡은 것을 생각하 면 엉망이어야 할 텐데."
제이크의 마법 덕분인 것임을 알 지 못했던 그들로서는 의아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중간에 나 있던,던전으로 향하는 동굴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동굴은 전에 막혀 있던 부분이 뻥 뚫려서 성의 뒤쪽 언덕까지 연 결되어 있었다.
그렇게 차례로 성으로 돌아온 용
병들과 병사들은 지하의 비밀 통 로를 통해 성을 빠져나갔다.
귀환하는 자들 중에는 부상당한 병사도 있었고,혹은 아예 돌아오 지 못하는 조도 있어 남아 있던 이들이 슬퍼했다.
하지만,공녀와 앰버,그리고 대 부분의 병력은 살아서 성에 도착 했다.
"우리가 마지막이죠?"
마지막 용병들 뒤로,제시카가 성문 안으로 들어섰다.
"다행히 무사히 돌아왔군요."
"용병 아저씨들이 힘들었죠,뭐."
공녀의 말에 제시카가 손을 저었다.
그녀의 칭찬에도 바닥에 널브러 진 용병들은 숨을 헐떡일 뿐이었다.
"헉,헉,마나 사용자하고 다시 같이 움직이나 봐라."
"핵,핵,그보다 대원들에게 비는 게 먼저입니다."
고참 용병의 말에 숨을 헐떡이던 용병 대장은 인상을 팍 찡그렸다.
"헉,헉,좀 비밀로 해 줘. 이번 에 새로 내기해서 전부 갚을 테니 까."
대장의 말에 엎드리고 있던 고참 용병이 다시금 검을 뽑아 들었고, 숨을 헐떡이던 대장은 급하게 네 발로 성 지하를 향해 달려갔다.
난데없는 촌극에 고개를 흔들던 제시카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틀 사이에 많이 달라졌네요. 준비는 끝난 건가요?"
"글쎄요. 저와 공녀님도 온 지 얼마 안 됐어요."
자신들도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공녀와 엠버로 인해 제시카는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그때 였다.
"대충 준비는 끝났습니다." 옆에서 제이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세 여성이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등장이었다.
"깜짝이야!"
세 여성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세 분도 수고하셨습니다. 제대 로 꼬리를 달고 오셨네요."
이미 성 주변에 감시망을 완성한 제이크였다.
몰래 성을 바라보는 적들의 눈길 을,그는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적을 맞이할 준비는 끝났습니
다. 여러분도 빨리 성을 빠져나가 세요."
"싫어. 나도 남을 거야. 혼자서는 무리잖아."
"저도 남겠습니다. 제가 이끌고 온 사람들이고,저에게 떨어진 명 령이니까요."
"공녀님이 남으면 저도 남아야 죠. 더구나 던전이 가동되는 것도 보고 싶고요."
원래는 제이크 혼자 남기로 한 계획이었지만,세 사람은 저마다 의 이유를 대며 성에 남고자 했다.
"위험할 텐데……
싸움이 시작되면 성에 남은 사람 들은 무척이나 위험해질게 분명했다.
하지만,제이크는 그들이 남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확실히 그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 러 온 것이었다.
목숨이 아깝다고 싸움을 피할 수 는 없었다.
그리고 마나 사용자와 마법사가 도와주는 것은 평범한 병사들이 돕는 것과 차원이 달랐다.
공녀는 더 쓰임새가 많았고,앞
에 있는 세 명은 마나를 다룰 수 있어,살아남을 확률도 일반인보 다 훨씬 높았다.
제이크도 도와주면 감사할 따름 이었다.
"그럼 세 분 모두 제 지시를 따 르셔야 합니다. 그리고 위험할 때 는 제가 돕기 힘듭니다. 알아서 살아남아 주세요."
제이크는 세 여성에게 단단히 주 의를 준 뒤에 그녀들이 할 일을 알려 주었다.
잠시 뒤,제이크의 설명을 들은 세 여성의 얼굴에 여러 가지 표정
이 지나갔다.
마법사가 직접 움직이는 던전을 보게 되어 앰버는 감동했고.
제이크의 계획에 의하면 발바닥 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니게 되어, 제시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레이첼 공녀는 뜻밖의 연 기를 하게 되어 얼굴이 벌겋게 변 했다.
"정말 이렇게 해야 해?"
"그래도 남아 주셔서 다행이었습 니다. 안 그러면 변신 마법으로 제가 흉내 내야 할 판이었거든요."
-그 연습을 다들 봤어야 했는데. 토 나올 뻔했어요.
제이크는 평상시처럼 파티마의 딴지를 무시했지만,그녀의 말에 귀가 솔깃한 사람,아니,에고 아 이템이 있었다.
-오! 나도 보여 줘!
바로 공녀의 에고 아이템이었다.
-나만 보기 아까웠는데 잘됐네요.
파티마는 뜻밖의 호응에,얼씨구 나 하고 자신의 기억을 전달해 줬다.
-크아아악,내눈... 내귀...어....
썩는다 썩어.
순간 에고 검의 비명이 제이크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공녀도 에고 검의 음성을 들었는 지 굳은 얼굴로 선언을 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가문에 먹칠 을 할 수는 없죠."
공녀의 결정을 마지막으로 일행 은 각자 마지막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뒤,히베루니아 왕 국군이 레이첼 성 앞에 도착했다.
"과연,버려진 성을 기지로 사용 했다는 건가."
아직도 튼튼해 보이는 성을 보며 시두스 장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성이면 시간을 벌기에는 충분하겠습니다. 우리는 기습을 당하는 게 무서워서 성을 버려둔 다는 생각을 하지 못할 테니까요."
"근데,완전 배수의 진인데. 저런 성 하나 달랑 있는 곳에 스스로 갇혀 버렸으니 모두 죽기를 각오 한 건가?"
"아니면 성에 숨은 것처럼 속이
고 도망쳤을 수도 있습니다."
"적들이 모두 성으로 들어가는 것은 확실히 확인했습니다."
파테르 참모의 말에 먼저 정찰대 를 보냈던 기사단장이 반박을 했다.
"뭐,확실히 한 명은 저곳에 있 네."
참모와 기사단장이 다투는 사이, 시두스는 버려진 성의 성벽 위를 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성벽 위에는 하늘로 솟구친 창들 과 레이첼 공녀의 모습이 보였다.
"설마,전 황태자비인가요? 죽었
다고 들었는데…… 그녀 때문에 이 전쟁이 시작된 거 아닙니까?"
참모가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리 자,시두스 장군이 피식 웃고 말 았다.
"뭐,제국이 하는 게 다 그렇지. 공녀를 어디다 숨겨 놓고 레타니 아 책임으로 뒤집어씌운 거겠지. 나중에 나타나서 기적적인 생환! 이렇게 영웅으로 만들면 더 좋고."
뭔가 세부적인 내용은 다 틀렸지 만,그래도 장군은 제국에서 벌어 진 일을 큰 틀에서는 전부 맞췄
다.
"좀 바보 같은 짓으로 보입니다 만……
"뭐,항의할 왕국이 사라져 버리 면 아무 상관없겠지."
장군은 굳은 표정으로 이쪽을 바 라보는 공녀를 향해 손을 흔들어 줬다.
"그리고 전 황태자비가 이곳에서 죽으면 따로 제국이 변명할 필요 가 없을 테고. 제국은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거야."
장군은 손을 내리고 크게 고함을 질렀다.
"모두 일어서라! 그동안 고생했 다! 얼른 저 성을 점령하고 쉬도 록 하자!"
장군의 고함에, 몇 시간을 달린 후에 늘어져 있던 병사들이 어기 적거리며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계속된 강행군으로 인해 지칠 대 로 지친 병사들이었지만,히베루 니아 병사들은 더한 훈련도 받은 강군이었다.
그들은 금방 진형을 갖추고 장군 의 말을 기다렸다.
정렬된 병사들의 모습을 확인한
시두스는 명령을 내렸다.
"전군 공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