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화
제이크 일행이 던전에서 죽인 몬 스터들은 아쉽게도 던전에 파묻혀 버려,건질 게 없었다.
그나마 두더지 몬스터에게서 여 러 가지 부산물을 얻은 것으로 위
안을 삼았다.
일행은 두더지 몬스터의 가죽과 마석을 일행의 몫으로 챙기고,고 기와 뼈는 잘게 잘라서 던전 밖으 로 운반했다.
던전을 공개할 생각이 없던 제이크로 인해,일행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고기와 뼈를 나르느라 상당히 고생을 했다.
아무리 제이크가 마법으로 무너 진 굴을 연결하고 고기의 무게도 줄였다 해도 지상까지 그것들을 나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지하에 있는 몬스터를 잡았다는 증거와 두려움에 떤 사 람들을 위로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지상으로 옮긴 고기는 바로 성의 마당에 만든 화롯불에 구워졌고, 사람들은 두더지 몬스터의 고기로 바비큐 파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지하의 몬스터를 제거해서인지, 아니면 식재료를 잡아 온 덕분인 지 모르겠지만,제이크 일행은 그 저녁 이후로 다른 사람들과 조금 은 친해질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미리 적 정찰을 위해 영지를 나 섰던 레인저들이 레이첼 성으로 들어섰다.
버려진 성에 사람들이 임시로 공 녀의 이름을 붙여,레이첼 성이라 부르고 있었다.
그들은 이틀 거리에 히베루니아 왕국의 병력이 도착했다는 것을 공녀에게 알렸고, 공녀는 바로 회 의를 소집했다.
레이첼 성의 이 층에 위치한 낡 은 회의실.
그곳에 제이크 일행과 공녀를 따 라온 니콜라스 레인저 부대장과 레인저들,그리고 용병대 대장들 이 모였다.
회의실 중앙의 돌 탁자에는 이 버려진 영지가 그려진 오래된 지 도가 펼쳐져 있었다.
루레티아 영주성의 문서실에 이 곳의 지도가 남아 있는 것을 발견 한 공녀가 바로 챙겨 왔던 것이다.
물론 버려진 영지가 멀쩡했을 때
만들어진 지도라,지금과는 식생 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아무 정보 없이 진격하 고 있는 적들에 비하면 이런 지도 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모두 모인 것을 확인한 공녀는 정찰을 하고 온 레인저에게 다시 설명을 부탁했다.
밤새 달려 도착한 레인저는 무척 이나 지친 기색이었음에도,공녀 의 말에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금 지도를 짚으며 적의 위치를 설명 했다.
"지금부터 12시간 전,여기 평야
남쪽 지역에서 3천 명 정도로 추 산되는 히베루니아 병력이 북상하 고 있었습니다. 이동 속도는 빠르 지 않으니 아마 이틀 정도 후에 이 성에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을 지나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의 설명에 지도를 확인하니, 군대가 있는 곳과 이 성 사이에 낮은 구릉이 계속 이어져 있었다.
대수림처럼 험준한 지역은 아니 지만 대규모 병력이 이동하기에 쉬워 보이는 곳도 아니었다.
"3천 명? 정보에 의하면 히베루 니아에서 출발하는 병력이 5천이
라고 알고 있는데요?"
공녀의 질문에, 레인저는 조금 전 짚은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손가락을 짚었다.
"서쪽으로 2만 걸음 떨어진 곳에 2천 명 정도의 병력이 북서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방면은 이슈 비 공자님 부대가 지키고 있어 그 쪽으로 연락을 보냈습니다."
"둘로 갈라졌군요. 거기다 이쪽 이 주력인 것 같고……
레인저의 설명에 레이첼 공녀는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출발하기 전의 예상대로 적이 둘
로 갈라지긴 했지만,이쪽으로 오 는 적의 수가 천 명 정도 더 많은 점이 아쉬웠다.
"흠,사백 대 삼천이라…… 거의 여덟 배 차이군요."
날카로운 인상의 블랙타이거 용 병대 대장이 작게 신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병력 차가 많이 날 것이라고 예 상하기는 했지만,너무 큰 차이가 꽤 암담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우린 지연작전을 펼 뿐입니다. 인원은 많이 차이 나지만 어려움 없이 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을 겁
니다."
공녀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가라앉은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지금 회의는 출발하기 전에 여 러분의 조언을 듣기 위한 자리입 니다. 작전 계획을 듣고 가감 없 는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사람들 얼굴을 한 명씩 마주 본 공녀는 지도를 짚으며 그동안 만 들어 온 계획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오는 적이 주력 병력 이면 부대를 지휘하는 장군은 호 전적인 것으로 유명한 로메이 장
군일 테니……
공녀는 제이크를 슬쩍 바라보았 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작전명은 게릴라. 치고 빠 지기 입니다."
공녀가 작전명을 꺼내 놓는 순 간,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이런'
제이크는 손으로 얼굴을 짚었다.
공녀와 이야기하면서 꺼내 놓은 전생의 유격전을 공녀가 가감 없 이 작전명으로 붙여 버렸기 때문 이었다.
영지에서 부대가 출발하기 전. 공녀는 주위 사람들에게 부대 운 용에 대해 조언을 부탁했다.
병력의 배치와 전략 등 수도로 가기 전에 나름 제대로 배웠던 그 녀였지만,살아 숨 쉬는 경험을 듣길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공작도 레인저들도 그녀 에게 만족스러운 조언을 해 주지 못했다.
그들의 조언은 하나같이 그녀가
알고 있는 지식을 넘지 못했다.
각자 나름의 경험담을 그녀에게 늘어놓았지만,그녀가 필요한 적 과 싸울 전략은 구할 수 없었다.
담대해 보이는 마나 사용자이자 루테리아 영지의 하나밖에 없는 레이첼 공녀.
하지만 아직 그녀는 이제 겨우 스무 살에 들어선 풋내기였다.
몬스터 웨이브 때 공작 옆에서 레인저들을 지휘해 보긴 했지만, 혼자 수백 명의 병사를 지휘해 적 과 싸우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불안에 떠는 대신에 조언
을 구하러 다녔다.
그러나 대수림의 몬스터들과 싸 우던 레인저들에게서 전쟁에 대해 듣기는 무리였다.
그녀는 마지막으로,무관 출신은 아니었지만 오랜 경험을 가진 제이크에게 조언을 부탁했다.
그리고 뜻밖에도,레이첼 공녀는 제이크에게서 진정 원하던 조언을 얻을 수 있었다.
제이크가 공녀에게서 적들의 대 략적인 규모와 출전하는 장군들의 이름을 듣고,그 자리에서 몇 가 지 작전을 꺼내 놓은 것이다.
'숫자 차이가 심하다길래 전생에 들었던 베트남의 게릴라전이나 유 격전에 대해 설명한 것뿐인데.'
설명을 듣고는 마치 천재 전략가 를 보는 듯이 쳐다보는 공녀의 모 습이 떠올라,제이크는 지금도 얼 굴이 화끈거렸다.
아직은 기사들과 마법사들, 그리 고 병사들 간에 정석적인 교전만 있어 왔던 이 세계에서는,제대로 된 유격전은 새로운 이야기일지도 몰랐다.
'뭐,돌머리 기사들 때문에 복제
세상에서는 죽을 때까지도 제대로 된 유격전은 나오지 않았지.'
거기다 공녀가 평범한 기사였다 면,제이크의 말은 기사도를 지키 지 않는 쓰레기 같은 짓으로 욕을 먹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산악전을 위주로 하는 레인저이자 몬스터를 상대하 는 루테리아 영지의 공녀였다.
그랬기에 자신의 계획을 모두 폐 기하고 제이크의 작전을 채택하는 과감함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히 아는 장군들이었 기에 망정이지,영 어이없는 이야
기 취급을 받을 뻔했어.'
영지를 공격하는 부대의 장군들 이 마침 복제 세상에 제국을 공격 했던 히베루니아 왕국의 장군들이 었다.
모르는 장군들이었으면 작전은커 녕 입도 벙긋거릴 수 없었기에, 제이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어쨌든,그 일로 인해 공녀가 제이크를 보는 눈이,희귀한 고대 마법사에서 천재 지략가로 완전히 달라졌다.
또한 공녀는 제이크가 생각해 낸
것이니 모두에게 그의 이름으로 말하고자 했지만,제이크가 반대 했다.
잘난 척을 하고 싶지 않다는 그 런 이유가 아니라,공녀의 이름으 로 발표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 이 수긍하지 않을 게 분명했기 때 문이었다.
어차피 전쟁은 이제 시작이니까.
그런데 그 일을 마음에 담아 뒀 던 건지,아니면 제이크의 설명 중 이름이 마음에 들었는지 '게릴 라'라는 이름을 이번 작전명으로 삼은 것이다.
공녀는 제이크가 생각해 낸 작전 으로 모두에게 설명하고자 했지 만,제이크가 반대했다.
'다 좋은데,제발 게릴라는 빼 줬으면……. 이건 게릴라 전술이 라고 부르기는 애매하다고!'
회의 내내 불리는 게릴라라는 이 름 때문에 제이크의 낯이 계속 붉 어지고 있었다.
공녀가 설명한 '게릴라전',아니, 제이크의 방식으로는 '히트 앤 런' 작전은 용병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레인저들은 조금 애매한 표정을 보였지만,작전 자체는 그들도 상 당히 만족한 모양이었다.
회의를 마치고 징집병과 용병들 은 바로 성을 빠져나갔다.
적이 가까이 온 만큼 지체할 시 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백 명 정도의 용병들과 그와 비슷한 수의 징집병,그리고 징집 병을 지휘하기 위한 레인저들과 마지막으로 제시카와 루이.
이렇게 총 사백여 명이 넘는 인 원이 성을 출발했다.
그러자 레이첼 성에는 성을 지킬 징집병 수십과 제이크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겉으로 보기에,이들의 인원은 징집병과 용병이 섞여 있는 오합 지졸 같았다.
하지만 징집병들은 몬스터들과의 싸움을 겪어 본 루테리아 영지민 들이었고,용병들은 대수림을 겪 은 관록 있는 용병들이었다.
정면 대결로는 히베루니아의 정 예병과 싸움이 되지 않겠지만,대 수림과 비슷한 이 버려진 영지에 서의 요격전은 해 볼 만했다.
더구나 회의실에서 들은 공녀의 작전은,한 가지 의아한 점을 제 외하고는 꽤 그럴듯해서 용병대장 들도 꽤 안심하게 만들었다.
"다 괜찮고 훌륭한데,마지막에 왜 레이첼 성으로 도망치는 것처 럼 보이라는 겁니까?"
부대장의 말에 블랙타이거의 용 병대장은 어깨를 으쏙였다.
"뭐,성으로 유인하라는 거겠지. 성에 마법사 한 명이 남아 있다니 까,마법 함정이라도 만들지 않을까?"
"엄청 어려 보이던데. 대마도사
가 어려지기라도 한 거랍니까? 마 법 함정이라니."
마법사의 마법이 원거리에서 대 량 학살이 가능하다고 하지만,그 런 강력한 마법사는 각국의 대마 도사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내가 알겠어? 우리야 그 게릴라 작전을 잘 하고 빠져 버리면 그만 이야. 우리 공녀님이 꽤 머리가 좋으신 것 같아."
"지휘도 잘하시는 것 같고. 찜, 여자만 아니었으면 차기 영주님감 이긴 하네요."
"뭐,어쩔 수 없지. 근데 또 몰
라. 황태자비를 내려와서 다른 곳 에 시집을 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거기다 이렇게 여자 몸으로 지휘도 하는 걸 보니."
"그래도 쉽게 되겠습니까? 역대 영주님 중에 여자는 한 분밖에는 없었어요."
부대장의 말에 그는 어깨를 으쓱 였다.
어차피 차기 영주가 누가 되든 용병인 그들로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
영주의 첫째 공자가 쓰레기라면 또 모르지만 그런 것도 아니어서,
이런 이야기는 행군 시에 지나가 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렇게 빠르게 적을 향해 나아가 는 사람들 사이에서,앰버는 아쉬 운 표정으로 자꾸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녀는 제이크와 같이 성에 남지 못한 것이 무척이나 아쉬웠던 것 이다.
사람들에게는 제이크도 성을 지 키기 위해 남는다고 말했지만,사 실은 성 지하에 던전을 구축하기 위해서 남는 거라고 살짝 귀띔받 았었다.
고대 마법사가 던전을 만드는 것 을 옆에서 볼 기회를 뒤에 두고 온 앰버로서는 발걸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아쉬우면 앰버도 남는 게 어때?"
계속 뒤돌아보는 모습에 공녀가 말을 꺼내 봤지만,앰버는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죠. 제이크 씨가 남아서 작업을 하는 것도 다 이번 작전을 위해서인데,제가 망칠 수 는 없는걸요. 더구나 제시카 씨와 루이 씨도 같이 움직이고 있고
요."
그랬다.
평상시 같으면 제이크와 같이 있 었겠지만,요격 전에는 한 명이라 도 더 많은 마나 사용자가 필요했다.
"제이크 님은 잘 하고 계시겠 죠?"
열심히 걸음을 옮기던 제시카는 옆에서 들려온 루이의 질문에 피 식 웃고 말았다.
"지금 신나서 작업하고 있을걸? 막 환호성을 치고 있을지도 몰 라."
같은 시각,레이첼 성의 지하.
제시카의 예상대로,반쯤 무너진 지하 광장 중앙에서 제이크는 큰 소리로 웃는 중이었다.
그의 손에서 주먹만 한 마석이 공중으로 떠올랐고,마석은 이내 광장 전체에 환한 빛을 뿌리기 시 작했다.
"크하하하,드디어 제대로 된 던 전이 만들어진다! 모두 기다려라. 고대 마도 제국의 부활이다!"
마치 어둠 속에서 세상을 집어삼 키려는 마법사처럼 외치는 제이크 의 모습에 파티마가 부들부들 떨 었다.
-엄청 오글거리는데요?
파티마의 말에 제이크도 짧게 한 숨을 내쉬었다.
"껍,난 중이병스러운 느낌은 무 리인가 보네. 일이나 하자."
제이크와 파티마는 버려진 성 지 하에 두 번째 던전을 구죽하기 시 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