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화
"설마 공녀님도 써 보신 건가요?"
제시카가 깜짝 놀라 공녀를 돌아 보며 물었다.
하지만 창백하게 질린 공녀의 얼
굴을 보니 굳이 대답을 들을 필요 가 없을 것 같았다.
두 달에 걸쳐서 던전을 위쪽으로 뚫고 지상으로 나오는 길이 편할 리가 없었다.
그들은 던전에 자생하던 몬스터 들이나 남아 있는 가디언들과 싸 워야 했고,공녀는 마법을 쓰는 제이크를 보호하기 위해 앞에 나 서서 적들을 상대해야 했다.
마나 사용자가 된 뒤에는 그나마 위험이 덜해지긴 했지만,그 전에 는 싸울 때마다 살얼음판을 헤쳐 나가는 수준이었다.
당연히 목숨이 위험한 적도 있었 고,심한 부상에 공녀는 호기롭게 제이크표 포션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녀는 제대로 된 수치심 을 느끼게 되었다.
물론 그 일로 인해서 빠르게 마 나 사용자가 된 것이라는 제이크 의 말을 듣기는 했다.
하지만 온몸으로 노폐물을 쏟아 놓는 경험은 정말이지 다시는 하 고 싶지도,기억하기도 싫은 일이 었다.
창백한 공녀의 얼굴에 제시카는 더 물어보지 못했다.
제이크는 그에 아랑곳 않고 포션 을 공녀에게 건넸다.
"모두 나가 주세요."
포션을 받은 공녀는 굳은 얼굴로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두 나가자 앰 버의 입에 포션을 흘려 넣었다.
얼마 뒤.
사냥꾼의 오두막 안에서 마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그와 동시 에 깨어난 앰버의 감탄사와 비명 이 연이어 들려왔다.
"꺄아아아악!"
다행히 그녀는 공녀가 옆에 있는
것을 보고는 가까스로 정신을 붙 들었다.
시간이 지난 뒤,공녀와 기운을 차린 앰버가 오두막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일행은 그제야 서로 간에 안부를 물을 수 있었다.
앰버와 제시카,루이는 예상대로 추락한 공녀와 제이크를 찾기 위 해 돌아가는 일행과 헤어져 이 협 곡에 남은 것이었다.
그 와중에 검은 옷을 입은 습격 자들과 싸우기도 했고,습격자들 사이에 껴 있는 마법사에게 앰버
가 당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습격자들,이상했어요. 아무래도 이 왕국 사람들이 아니라 제국 쪽에서 온 것 같았어요. 더구나 마법사는 사용하는 마 법이 황성에서 많이 보던 스타일 이었고."
이는 제시카와 루이에게서는 듣 지 못했던 말이었다.
사실 앰버가 그들의 정채를 조금 이나마 눈치 챌 수 있었던 것은 공녀와 함께 황궁에 머물러 있었 던 덕이었다.
"좀 더 마법 대결을 펼쳤으면 복
면으로 가린 얼굴을 확인할 수 있 었을 텐데, 처음 보는 마법을 쓰 는 바람에 그냥 나가떨어지고 말 았어요. 이 두 사람이 아니었으면 죽고 말았을 거예요."
앰버의 몸에 느껴지던 마법의 흐 름을 보고는 황궁에서 보았던 수 습 마법사의 마법 폭탄이 떠오른 것이 우연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스파이인 수습 마법사의 폭탄 마법을 황궁 마법 사들이 배운 듯했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 나오신 거
예요? 거기다 기사까지 되신 것 같고."
앰버의 물음에 공녀는 제이크를 돌아보았다.
"말해도 될까요? 앰버는 믿어도 돼요. 나,레이첼 루테리아가 그녀 에 대한 보증을 하겠어요."
그동안의 이야기를 하려면 어느 정도 제이크의 비밀도 이야기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제이크도 그 정도는 충분히 감안할 생각이었다.
미래에서 본 앰버를 믿었고,완 드를 얻었던 던전 속 마법 세계에
서 그녀에게 1년간 마법을 배웠던 그였다.
때문에 공녀에게 비밀을 털어놓 으면서 앰버에게도 사실을 말하기 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하지만,그는 이렇게 공녀가 귀 족의 직위를 걸고 보증을 설 줄은 몰랐다.
그녀의 말에 앰버가 놀라 바로 공녀를 말렸다.
"안 들을게요. 보증을 서실 필요 없어요."
직위를 걸고 하는 귀족의 보증 은,마법에 의한 약속 다음으로
공신력이 있었다.
물론 초기 제국 때와 달리 지금 은 영 안 지키는 귀족도 많았지 만,제이크가 아는 레이첼이라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직위마저 내 려놓을 게 분명했다.
제이크는 잠시 루이를 보다가 그 녀의 말을 승낙했다.
그동안 지켜본 바로는 루이도 이 제 제이크의 비밀을 알 때가 되었다.
이곳에 두 달 동안 남아서 싸워 줬는데 그에게 비밀을 남길 이유 가 없었다.
제이크가 승낙하자 공녀는 사람 들을 향해 두 달 동안의 모험을 이야기했다.
협곡 아래로 추락한 이야기.
제이크가 마법을 부려서 살아남 은 이야기.
고대에 만들어진 길을 가디언들 과 몬스터들의 방해를 뚫고 올라 온 이야기.
그리고,마지막으로 황제의 숨겨 진 기사들과의 싸움.
공녀가 말을 마치자,제이크는 자신의 정체를 앰버와 루이에게 밝혔다.
제이크의 말을 들은 루이는 그리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제이크를 섬기기로 한 뒤부터 겪 었던 수많은 일들에 비하면,이 정도 일은 그려려니 하고 넘어갈 정도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앰버는 제이크가 마법사 라는 말을 들은 뒤부터 그를 뚫어 지게 바라보는 중이었다.
잠깐의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앰버가 입을 열었다.
"황제에게서 몸을 숨기고 있는 전직 서기관이라고요?"
앰버의 질문에,루이와 제시카는
긴장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귀족인 앰버가 어떻게 반응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제이크는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대 마법사에,거기다 마법을 사용하는 에고 아이템을 가지고 있고."
그녀의 말에 제이크는 숨겨 놓은 완드를 꺼내 보여 주었고.
"공녀님의 마나도 일깨워 주는 데 도움을 줬다는 거군요."
앰버의 말에 부상을 입고 제이크
표 포션을 들이켠 일을 떠올린 공 녀는 붉어진 얼굴을 슬쩍 뒤로 돌 렸다.
거기까지 확인한 앰버는 제일 먼 저 가슴에 손을 올리고 제이크에 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우선 공녀님을 구해 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리겠습니다. "
앰버 옆에서 공녀도 검을 앞으로 하고 다시 한번 제이크에게 감사 를 했다.
다만,인사를 마친 뒤 앰버는 표 정이 바뀌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법사로서의
일이 더 중요한 것 같네요."
다른 사람들이 그녀의 말에 긴장 할 때,제이크는 이미 그녀가 무 슨 말을 할지 알아차렸다.
던전의 마법 세상에서 이미 들었 던 말.
"고대 마법 좀 보여 줘요! 고대 마법을 보는 게 꿈이었어요!"
평상시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제이크에게 달라붙어 외치는 말 에,다른 사람들이 입을 딱 벌렸다.
다만 이런 앰버의 모습을 두 번 째 보는 제이크는 그럴 줄 알았다
는 표정을 지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다른 마법사들도 자신의 마법을 강화하기 위해 고대 마법을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고 있었지만, 앰버는 그들과 달리 고대 마법 자 체를 좋아했었다.
귀족인 그녀가 마법을 배운 것도 이야기책에 나온 고대 마법사들을 보고 시작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황실 마법사단이나 다른 마탑에 가입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래서 마법 세상에서 고대 마
법을 배울 수 없다는 말에 더욱 실망했었던 거고.'
다시 실망하게 될 앰버를 보며 제이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쉴 수 밖에 없었다.
그때 난감한 제이크를 구해 주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보다 밖의 상황은 어떻죠? 제 국하고 왕국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나요."
공녀의 물음에 제이크의 옷을 잡 고 눈을 반짝이던 앰버도 정신을 차렸고,루이와 제시카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두 주 전에 제국이 레타니아 왕 국을 향해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제국의 사신들을 습격하고 사신으 로 온 제국의 공녀를 죽였다는 명 목이었습니다."
"그렇게나 빨리 결정되었다고요? 황도까지 돌아가지도 못했을 텐 데."
공녀는 의아해했지만,제이크는 사신단 위로 가끔 모습을 보이던 매를 떠올릴 수 있었다.
말을 달려서는 무리겠지만,마법 사의 패밀리어라면 충분히 소식을 전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소문을 들으니 그전부터 국경에 서는 국지전이 계속 벌어지는 중 이랍니다. 사신단이 왕국을 빠져 나가는 동안 계속 습격을 받는 바 람에 그때부터 국경은 거의 전쟁 터 분위기로 바뀌었답니다."
협곡 근처 숲에 머물러 있었지 만,루이와 제시카는 계속 밖의 동태도 알아보고 있었다.
"너무 늦었나."
우울한 공녀의 말에 앰버가 고개 를 끄덕였다.
"황제가 선언했으니 되돌리기는 무리일 거예요."
"오히려 영지에 가기 전에 정체 를 들키면 공격받을 확률이 큽니다."
뒤이은 제이크의 말에 공녀와 앰 버가 어두운 표정으로 인정했다.
"어차피 정체를 밝힐 수도 없어요. 다른 사람들 모르게 영지로 돌아가도록 하죠."
"결국 황제가 벌인 일이라는 건 이대로 묻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제이크의 말에 제시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엥? 영지에 가서 영주님께 말하
면 안 되나?"
"무리입니다. 제대로 된 증거가 없어요. 증거가 있다고 해도 오히 려 황제가 영지를 공격할 빌미만 줄지도 몰라요."
제이크의 말에 공녀가 동의했고, 일행은 모두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거나 일단 돌아가죠. 모두 살아서 만났으니,지금은 영지로 돌아가는 일만 생각하도록 하자고요."
"맞아! 이 지겨운 협곡과 숲을 드디어 떠나는 거야!"
일행은 살아서 만난 서로를 바라
보며 다시금 웃고는 바로 짐을 챙 겨 제국이 있는 북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제이크,뭐 해!"
길을 재촉하는 일행의 맨 뒤에서 뒤쪽을 바라보고 있는 제이크를 향해 제시카가 소리를 질렀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자신들이 빠져나온 던전을 바라보던 제이크 는 잠시 고개를 젓고는 제시카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고대 마법사들이 만든 엄청난 던 전과 마법진은 무엇을 막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인지 결국 알아내
지 못했다.
마법사로서 아쉬운 일이었지만, 지금은 이대로 묻어 버리는 편이 좋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일행이 떠나가고 얼마 뒤.
던전이 있는 돌무더기 앞 파괴된 야영지에서 꿈틀거리며 땅속에서 빠져나오는 생명체가 있었다.
모든 기사와 마법사가 죽은 채로 제이크의 마법에 의해 땅에 묻혀
버렸지만,단 하나의 생명은 죽지 않은 채로 땅에 묻혔던 것이다.
바로 마법사의 패밀리어,하늘을 나는 매였다.
물론 평범한 매였으면 땅에 묻히 자마자 죽었겠지만,마법으로 강 화된 매는 주인의 죽음 속에서도 살아남아 부리로 흙을 뚫고 땅 위 로 빠져나온 것이다.
매는 주인을 잃었지만,그래도 주인의 마지막 명령은 기억하고 있었다.
항상 가곤 했던 인간의 왕궁으로 가서 주인이 남긴 말을 전해야 했
다.
'죽었다고 생각한 어린 서기관이 고대 마법사가 되어 공녀와 함께 살아남았다'
마지막으로 전할 말은 마법으로 남겨져,매가 죽지 않는 이상 그 의 스승에게 전달될 것이었다.
땅 밖으로 빠져나온 매는 털에 묻은 흙을 털어 낸 뒤에 날개를 크게 쳐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목표는 제국의 황궁.
일주일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거 리였다.
하지만.
크와아아아!
갑자기 들려온 괴물의 괴성은 하 늘로 오르던 매를 휘청이게 만들 었다.
'죽는다!'
본능적으로 위험하다 느낀 매는 마법의 사슬을 끊고 그냥 멀리 도 망치기 위해 날개를 퍼덕이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콰앙!
던전 입구에 쌓인 돌무더기가 터 져 나가며 쏜살같이 매를 향해 날 아가는 검은 존재가 있었다.
꺄아아아!
매는 비명 어린 소리를 채 다 내 지도 못하고 자신을 덮치는 검은 그림자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이내 높이 솟구친 나무 위에 내려섰다.
그 그림자는 몸 전체가 검은 깃 털로 둘러싸인 거대한 새였다.
아니,새로 보기에도 이상한 존 재였다.
머리는 늑대 같았고,날개는 박 쥐와 닮은 형태에다,발은 소의 발과 흡사한 검은 괴물은 잠시 입
을 까닥거리다가,다시 한번 날개 를 펴고 괴성을 질렀다.
콰아아아악!
날개에는 던전을 빠져나오며 생 긴 수많은 상처가 보였지만,그 상처들은 빠르게 사라지는 중이었다.
검은 괴물의 정체는 그동안 가디 언들 때문에 지상으로 나오지 못 했던 괴물들 중 하나였다.
빌어먹을 마법 덕분에 오랜 시간 동안 깊은 땅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는데,무슨 일인지 가디언들 이 파괴되는 덕분에 이렇게 혼자
나마 빠져나올 수 있었다.
물론 다른 놈들도 같이 있었지 만,그들은 자신처럼 던전을 빠져 나오기에는 너무 컸다.
몸의 상처를 확인한 괴물은 크게 날개를 퍼덕이며 동쪽을 향해 날 기 시작했다.
협곡을 막고 있는 마법을 부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준비가 필요했다.
그 준비가 끝나고 마법을 부수게 된다면 자신과 동료들이 다른 놈 들보다 빨리 이 세상을 정화할 수 있었다.
마법 덕분에 정화 시기를 한 번 놓쳤던 괴물은 이번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괴물은 더욱더 힘차게 피막 날개 를 퍼덕였다.
그가 가는 방향은 대수림 방향이 었고,그 너머에 있는 아인족의 세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