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화
레타니아 왕국의 고대 숲 안.
쾅!
바닥이 없는 협곡과 조금 떨어진 숲속에서 다시금 묵직한 폭음이 들려왔다.
벌써 며칠 동안 하루에 몇 번이 나 계속된 소리였다.
폭음이 들려온 곳은 숲속 깊숙이 잘 숨겨진 바위 무더기 속이었다.
바위 무더기 주위에는 야영지가 펼쳐져 있었고,지쳐 보이는 사람 들이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오늘도 실패인가."
"저 소리면 한 방 먹은 거지."
야영지 경계에서 주변을 살펴보 던 남자가 뒤에 온 사람에게 말을 건넸다.
교대를 하러 온 사람은 그에게 작은 물통을 건네며 어깨를 으쓱
했다.
"크,이거라도 없었으면 도망쳤 을지도 몰라."
경계를 서던 남자는 건네받은 물 통에 있는 술을 들이켜며 인상을 썼다.
벌써 그들은 두 달이나 이 숲에 서 버티는 중이었다.
아니,일을 준비할 때 있었던 것 까지 치면 석 달에 가까운 시간.
일을 치르기 전이나 초반에 숲을 뒤질 때야 긴장감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지만,그것도 사라진 지금, 지루함과 짜증을 버티려면 술밖에
방법이 없었다.
"별일은 없었지?"
"뭐,별일 있겠어? 얼마 전까지 덤벼 왔던 놈들도 한 방 먹고 물 러났잖아. 지금 제국은 전쟁 준비 로 한창 정신없다는데,우리나 그 인간들이나 이런 외지에서 뭔 고 생인지."
"하긴,지금 꼴을 보니 더는 진 행은 불가능할 테니 곧 철수하라 는 말이 나오겠지."
"그랬으면 좋겠다."
두 사람이 서로 교대를 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바위 무더기 사
이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밖으 로 나왔다.
검은색 가죽 갑옷을 입은 사람들 이다.
그들은 큰 싸움을 벌였는지 온통 상처투성 이들이 었다.
그중에 몇은 들것에 실려 나오는 것이,중상이거나 죽은 듯 보였다.
십여 명의 사람이 나온 뒤,마지 막으로 마법사로 보이는 사람이 돌무더기를 빠져나왔다.
두 달 전 대마도사 옆에 있던 마 법사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상처는
없었지만,무척이나 지친 듯했다.
이들은 두 달 전,대마도사의 지 령으로 협곡으로 떨어진 공녀를 찾기 위해 이곳에 남은 자들이었다.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은 그때 검 은 복면까지 쓰고 남은 특사 일행 을 몰아붙이던 자들.
바로 제국의 추적대,황제의 사 냥개이자 숨겨진 기사단이었다.
이들은 공녀의 죽음이 레타니아 왕국이 벌인 일이란 증거를 만들 기 위해 남겨진 특사 일행을 추격 하면서 이리저리 증거를 흘려 댔
다.
그 뒤에 대마도사의 지시로,마 법사와 함께 두 달 동안 고대 숲 을 뒤지고 다녔다.
다만,두 달 전 인원에서 삼분의 일이 떨어져 나가 이제 십여 명만 남은 상황이었다.
처음, 이들이 특사 일행을 추격 할 때는 부상만 몇 명 당한 정도 였다.
그런데 그 뒤에 협곡을 내려갈 방법을 찾을 때 몇 명이 협곡 아 래로 추락했고,숲에서 던전을 찾 을 때 남은 공녀의 일행과 붙어
몇 명이 죽었다.
또 얼마 전에 밑으로 내려가는 던전을 찾고 나서 여러 명이 죽고 말았다.
더구나 그렇게 죽어가는 가운데, 십여 일 동안 겨우 100여 미터밖 에 못 내려간 상황에서 불만을 가 지지 않기란,충성심을 세뇌에 가 깝도록 심어 놓은 그들이라도 어 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대마도사의 제자 이자 황실 마법사단 소속인 마법 사도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그렇다고 황제나 스승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는 일.
그들은 한숨을 내쉬며 모두 야영 지로 흩어졌다.
그때 였다.
멀리서 매 한 마리가 야영지를 향해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경계를 서는 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도 관심을 가지지 않 았다.
날아오는 매가 마법사가 사역하 는 패밀리어라는 것을 알고 있었 기 때문이었다.
매는 바로 마법사가 쉬고 있는 텐트 앞에 내려섰다.
마법사가 앞에 서자 부리를 열어 대마도사의 목소리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던전을 발견했 다니,그 정도면 충분하다. 돌아와 라.]
매는 말을 마치자 다시 부리를 까닥이는 평범한 매로 돌아왔다.
매를 통해 대마도사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마법사도 스승의 허락이 떨어지 자 겨우 긴장이 풀렸다.
협곡을 내려가려고 별의별 방법
을 다 사용하다가 기사들만 잃어 버리고 겨우 하늘을 나는 마법이 막힌 것을 알아차린 일.
그 마법의 단서를 쫓아 숲을 뒤 지다가 공녀의 마법사와 남은 용 병들과 싸움이 벌어지게 되어 기 사들을 잃은 일.
마지막으로 던전을 발견해서 뚫 고 내려가다가 얼마 가지도 못해 서 가디언들에게 막혀 기사들만 잃은 일.
다행히 던전을 발견한 것으로 스 승이 만족했기에 망정이지,잘못 하다가는 이 모든 사람들이 던전
에서 뼈를 묻었을 터였다.
"들었지? 철수한다. 짐 싸라!" 수석 기사의 말에 모두 일제히 대답을 한 뒤 신이 나서 야영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마법사는 돌무더기에 가 서 마석과 마법 물품들을 사용해 서 마법진을 만들었다.
물론 던전을 발견해도 안에 있는 가디언 때문에 밑으로 내려가기는 불가능하기는 했다.
하지만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이 발견해서 소유를 주장하게 되면 귀찮아질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
다.
'흠, 어차피 제국군이 밀고 내려 오면 상관없으려나?'
이미 전방에서는 국지전이 계속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였 고,곧 제국군이 침공을 시작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불호령이 떨어질 게 분명했다.
전에 탑에서 꼬맹이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고 맨 뒤로 밀려 나게 되어 이런 오지로 떠밀려 나 온 마법사였다.
또다시 실수를 할 수는 없었다.
"하이드!"
한참을 씨름한 뒤에 그는 마지막 주문을 외웠고,돌무더기는 푸른 빛이 머물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 아왔다.
이제 이 돌무더기는 사람들의 관 심에서 멀어지게 될 것이다.
그가 마법진을 구축하는 동안 야 영지는 정리가 끝났다.
이제는 철수할 시간이다.
"가는 길에 놈들을 정리하고 돌 아가죠."
그때,수석 기사가 마법사에게 다가와 넌지시 의견을 제시했다.
그는 얼마 전 자신들에게 피해를 입힌 마법사와 용병들을 마무리하 기를 원했다.
"아,도망간 것 아니었습니까?"
"아뇨. 다친 마법사를 데리고 숲 에 있는 사냥꾼 처소에 머물고 있 습니다. 거리도 멀고,던전에 집중 을 해야 해서 놔두었는데,이제 여길 정리하게 됐으니 이왕이면 돌아가는 길에 정리했으면 합니다."
사냥꾼 처소에 머물고 있는 용병 과 다친 마법사는 몰랐겠지만,이 들은 역대 황제들이 심혈을 기울
여서 만들어 놓은 추적자들이었다.
남에게 들키지 않게 추적하는 것 은 세상 누구보다도 뛰어난 자들.
그들은 그 동안 돌아가면서 제시카 일행을 계속 감시하고 있었다.
"뭐,많이 돌아가지 않으면 괜찮 겠지요. 마법사도 마법을 쓰기 힘 들 테니 쉽게 정리될 테고."
두 용병 모두가 기사급 마나 사 용자라는 것이 신기했지만,마법 대결에서 져서 마나가 꼬여 버린 마법사가 빠지게 되면 쉽게 정리 될 자들이었다.
그렇게 이야기가 정리된 뒤 모두 이동하려고 할 때였다.
쿠웅!
또다시 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묵 직한 폭음이 들려왔다.
마법사와 수석 기사는 놀란 표정 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직 남아 있는 사람이 있나요?"
"전부 올라왔습니다."
"그럼,왜 전투 소리가 들리는 거죠?"
두 사람이 어리둥절해 있을 때, 야영지를 지키던 기사가 조심스럽
게 의견을 냈다.
"근데,가디언의 마법 공격 소리 하고는 좀 다릅니다만……
이곳에서 계속 폭음을 들어 왔던 기사는 가디언과 싸웠던 두 사람 과 다르게 소리가 다른 것을 알아 차렸다.
쿠웅!
그 순간,또 한 번의 폭음이 땅 아래에서 들려왔다.
이번에는 전보다 훨씬 지상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무언가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안에서 뭐가 벌어진 거지?"
마법사가 급하게 돌무더기에 걸 린 마법을 푸는 사이에,수석 기 사는 빠르게 대원들을 전투 진형 으로 만들었다.
짊어졌던 야영 도구들을 모두 주 변에 던져 버리고,돌무더기를 포 위한 형태로 진형을 구축한 것이다.
그들은 긴장한 채로 마법이 해제 된 돌무더기를 노려보았다.
어떤 존재가 올라오는 것인지 모 르겠지만,통로를 막고 있는 가디 언을 뚫고 올라온 것이라면 이들 이 감당하기 어려울 수도 있었다.
그런 몬스터나 가디언이라면 바 로 퇴각해야 했다.
잠시 뒤,돌무더기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그들은 그 정체를 확인하고는 퇴 각하려던 생각을 버렸다.
가죽 갑옷을 입고,길고 거친 머 리를 질끈 동여맨,단단하고 긴 검을 손에 든 여성이 돌무더기 사 이에서 걸어 나온 것이다.
오랜 야영으로 지저분해졌지만, 아름다운 얼굴은 퇴색되지 않았다.
오히려 전과 다르게 얼굴 전체에
활기가 가득해 보이는 그녀는 바 로,전 예비 황태자비이자 루테리아의 공녀인 레이첼이었다.
그녀 뒤로 지팡이를 든 남자 한 명이 따라 나왔지만,모두의 시선 은 계속 공녀의 얼굴을 벗어나지 못했다.
"말도 안 돼. 그 협곡에서 살아 나왔단 말인가."
마법사의 중얼거리는 말에 공녀 가 씁쓸한 얼굴로 대답했다.
"마지막까지 믿고 싶지 않았는 데,정말 황제가 날 죽이려고 했 군요. 대법사 다니로 님,그리고
지안니 기사님이셨죠?"
공녀가 마법사와 수석 기사의 이 름을 이야기하자 마법사는 난감한 표정을 짓고,수석 기사는 움찔 놀란 얼굴이 되었다.
마법사는 자신의 정체를 들킨 것 에 놀란 것이었고,수석 기사는 오래전 잠깐 왕궁에 있을 때 지나 가듯 이름을 말한 것을 기억하는 것에 놀란 것이었다.
어쨌거나 공녀가 그들의 정체를 알게 되었으니 더욱더 공녀를 살 려 보낼 수 없게 되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제국을 위해
서 하는 일이지만,공녀님께는 죄 송할 뿐이군요."
마법사가 대표로 공녀에게 머리 를 숙였다.
황태자비가 되기 위해 황궁에 머 무는 동안 그녀는 품위 있는 모습 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 덕분 에 모든 이들에게 사랑을 받았었다.
황태자의 성격이 안 좋았기에 더 욱 그녀의 명망은 올라가 있었다.
눈앞에 마법사도 대마도사와 마 찬가지로 그녀를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안타깝게 여기는 것과 일을 마치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모두 공녀를 막아 주십시오. 마 무리는 제가 하겠습니다."
마법사의 말에 기사들이 재빠르 게 자세를 잡았다.
일부는 마법사를 보호하고 나머 지는 공녀와 뒤따라온 남자를 포 위했다.
예상과 다르게 공녀가 살아서 돌 아왔다.
그 사실만으로도 그들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대응은 잘못되지
않았다.
우우우웅!
공녀가 들고 있는 검에서 은은한 빛이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검 전체에 마나로 만들어진 푸른 빛이 넘나들었다.
그것은 바로 마나 사용자라는 증 거였다.
지상까지 올라오는 두 달 동안 앞을 가로막는 가디언들과 알 수 없는 몬스터들과의 싸움 끝에,공 녀는 마나를 다룰 수 있게 된 것 이었다.
"기사급이다! 모두 긴장해!"
수석 기사는 다시 한번 동료들에 게 소리를 쳤고,마법사는 마법을 준비하면서 나지막이 혀를 찼다.
그리고 다음 순간.
공녀와 기사들 간의 싸움이 시작 되었다.
먼저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오 는 듯한 공녀의 모습을
모두가 순간 놓쳐 버렸고.
서걱! 서걱!
공녀 옆을 막아서던 두 기사의 팔과 손목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찰나에 기사 둘이 무력화된 것이
다.
물론,오랜 경험으로 두 사람은 자신들에게 달려드는 공녀를 알아 챌 수 있었지만,신묘한 그녀의 검술을 따라가기는 무리였다.
"단장급 이상이야! 무리를 지 어!"
그 모습을 보고 수석 기사가 바 로 소리쳤다.
여자가, 그것도 마나 사용자라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는 공녀가 저런 움직임을 보이는 것을 이해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눈에 보
이는 것을 무시할 이들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세 명 이상씩 모여들었고.
카카캉!
공녀의 공격은 연합한 기사들의 검에 튕겨져 나갔다.
"젠장, 강력한 마법검입니다. 검 이 버티기 힘들겠습니다!"
하지만,억지로 받아 낸 기사들 의 검은 바로 날이 나가 버리고, 금이 가 버렸다.
에고 검을 받아 내기엔 그들의 검이 너무 부족했다.
다만,잠깐 동안 그들이 만들어 준 기회는 마법사에게는 더할 나 위 없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잠시 뒤로 물러선 공녀를 향해 마법사의 마법이 시전되었다.
"홀드!"
강제로 몸을 멈추는 마법.
마나 사용자에게는 완벽하게 걸 기 힘들었지만,움직임을 불편하 게 만들기만 하면 전력을 반 이상 크게 떨어뜨릴 수 있었다.
하지만,그의 마법은 공녀에게 닿지 않았다.
"디스펠,그리고,모두 느려져
라!"
공녀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 마법이 해제가 되어 버렸다.
반대로 기사들의 몸이 마법에 걸 려 버리고 만 것이다.
모두 놀라 마법사의 마법을 막아 낸 남자를 보았다.
마법사는 어린 남자의 얼굴을 어 디에서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탑에서 본 뒤로 오랜만이군요." 제이크의 말에 마법사는 그가 누 구인지 알게 되었고,절로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돼! 넌 죽었잖아!"
"아뇨,전 살아 있었습니다. 그리 고 마법사가 되었지요."
제이크는 친절하게 그의 말에 대 답을 한 뒤,에고 완드를 치켜들 었다.
그의 입에서 주문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