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훈수로 메이저리거 - 187화 >
* * *
과거로부터 배운다를 통해 신우는 레전드들의 과거를 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요기 베라가 월드시리즈 마지막 경기를 하면서 어떤 플레이를 했는지,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는지 등을 말이다.
그런 경험은 신우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거기에 예상치 못한 후유증도 남겼다.
그들의 감각이 마치 잔상처럼 남는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뚜렷하게 남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잔상은 흐려진다.
마치 꿈을 꾸다 깨어나면 기억이 선명하다가 점점 옅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종내에는 꿈이 아예 기억에서 사라진다.
과거의 잔상 역시 마찬가지다.
‘쓰리핑거 커브를 배울 때 확실하게 느꼈지.’
모데카이 브라운의 과거를 보고 난 직후.
신우는 쓰리핑거 커브를 어떻게 던져야 하는지 감각을 익힐 수 있다.
처음에는 뚜렷한 감각이었지만, 그것은 서서히 옅어졌다.
그리고 지금은 아예 어떤 것이었는지 기억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다행인 건 그 사이 신우가 커브를 익혔다는 점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로베르토의 수비에 대한 감각이 남아 있다.’
로베르토 클레멘테.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뛰어난 외야수를 뽑으라면 꼭 거론되는 선수였다.
통산 타율 3할 1푼 7리와 3000안타, 거기에 12회의 골든글러브 수상은 외야수 최다 타이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푸에르토리코 출신으로 최초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로베르토는 실력만큼이나 사회봉사 정신이 뛰어난 선수였다.
실제 그는 니카라과에 구호품을 직접 가지고 가다 악천후와 만나 비행기추락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메이저리그는 그런 로베르토 클레멘테의 정신을 기리며 매년 지역사회 공헌이 높은 선수에게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을 수여하고 있다.
[재밌었음?]
‘예. 수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금 보였습니다.’
[문제는 그 감각이 서서히 사라진다는 거임. 꾸준한 연습이 없으면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없어.]
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할게요.’
기회는 주어졌다.
이걸 잡을 수 있을지는 자신의 의지에 달렸다.
* * *
훈련시간.
신우는 외야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루카스와 함께 공을 주고받으며 어깨를 풀었다.
“상태는 어때?”
“언제나와 똑같지.”
“베스트라는 소리군.”
개막 후 일주일.
그동안 신우가 고전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그러니 언제나와 같다는 건 베스트 컨디션이란 소리와 같았다.
캐치볼을 끝내고 타격훈련에 들어갔다.
“다음 시누!”
리바이 타격코치의 말에 타석에 들어섰다.
몇몇 출입기자들이 카메라를 꺼내 신우를 촬영했다.
다른 선수들 역시 훈련을 멈추고 배팅을 지켜봤다.
“흡!!”
딱-!
딱-!
딱-!!
배트가 공을 때릴 때마다 경쾌한 소리가 구장에 울렸다.
그리고 공은 모두 외야나 담장밖으로 사라졌다.
“와우...”
“엄청난 파워인데?”
“단순히 손목 힘이 좋은 게 아니라 신체 전반을 이용해서 때려내고 있어.”
“저러니까 팬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지.”
타격훈련이 끝난 뒤에는 수비훈련이 이어졌다.
프랑코는 직접 타석에 서서 신우를 향해 외쳤다.
“한 박자 빠르게 움직여야 해!”
“알겠습니다!”
취재진이 다시 카메라를 고정시켰다.
“시누의 수비는 조금 불안하지.”
“맞아. 한 박자가 느린 느낌이야.”
“메이저 레벨은 아니었지.”
투수로서 신우는 메이저리그 최상위 레벨이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타격도 남들과 다른 무언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아마 시즌이 끝날 때까지 현재 몸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면 어마어마한 성적을 남길 거다.
하지만 수비에는 아직 의심의 눈길이 있었다.
“그래도 어깨는 엄청나잖아.”
“마운드에서 100마일을 던지는데, 그거야 당연하지.”
“앞으로 대시하면서 던지면 110마일까지도 찍을걸?”
단 일주일.
그 사이 신우의 어깨에 대한 평가는 끝났다.
엄청난 수준의 송구를 두 번이나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비만큼은 아직 확신을 주지 못했다.
딱-!!
그때 경쾌한 소리와 함께 타구가 날아갔다.
신우는 재빨리 움직여 낙구지점을 포착했다.
퍽!
“굿!! 아주 좋아!!”
“좋은데?”
“그러게. 뭔가 안정적인 느낌이었어.”
“에이, 지금은 좀 쉬운 타구였잖아.”
다른 취재진들도 동의했다.
방금 타구는 평범한 플라이볼이었다.
하이스쿨 레벨에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을 거다.
프랑코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이번에는 조금 어렵게 공을 날려보냈다.
딱-!!
타구가 라인드라이브성으로 날아갔다.
낮고 빠르게 날아오는 타구를 잡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낙구지점을 판단하는 것과 포구 타이밍 역시 잘 잡아야 한다.
타이밍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놓친다.
신우는 감각이 시키는대로 타구를 따라갔다.
펜스를 향해 달리던 신우가 고개를 돌려 타구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리고는 그대로 점프를 했다.
퍽-!!
“오오오!!”
“저걸 잡았어?”
“완벽한 타이밍에 점프해서 낚아채다니!”
완벽한 포구였다.
조금만 늦거나 빨랐어도 공을 잡지 못했을 것이다.
“저 타구를 따라가다니. 발도 빠르다는 거잖아?”
“원래 발은 빨랐지. 그런데 저 타구를 완벽한 타이밍에 잡아낸 게 신기한 거지.”
“우연일까?”
“그렇기에는 너무 완벽하지 않았나?”
취재진들은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그건 프랑코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으며 혼란을 떨쳐내고 다시 공을 쥐었다.
“계속 간다!!”
“예!!”
연습은 계속됐다.
* * *
하루가 지나자 로베르토의 감각이 조금 옅어졌다.
[슬슬 사라지나보네.]
‘그러게요.’
[몸에는 좀 익었음?]
‘아직입니다.’
[그럼 더 연습해야겠네.]
로베르토의 말에 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신우는 수비연습을 별도의 스케줄로 뺐다.
하루도 빼먹지 않고 연습을 하면서 로베르토의 감각을 가져오기 위해 노력했다.
“간다!!”
프랑코는 그런 신우에게 도움을 주었다.
덕분에 신우는 빠르게 감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갔다.
프랑코가 시간을 낼 수 없을 땐 루스의 도움을 받았다.
구단과의 협의를 통해 루스는 신우의 연습에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몇몇 선수들의 눈빛이 안 좋았지만, 그런 거까지 신경쓸 수 없었다.
그렇게 4일의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신우는 또 한 번의 등판을 했다.
7이닝 1실점 피칭을 했지만, 승리투수는 되지 못했다.
뒤의 투수들이 무너진 탓이다.
[불펜이 약하긴 하네.]
[클로저가 빈약한데?]
[멘탈이 쿠크다스임.]
[톡 하고 터지는 게 아니라 바사삭함.]
저런 걸 어디서 배운 걸까.
이제는 묻고 싶지도 않다.
현재 갤럭시의 클로저는 빌 워커다.
시즌 15경기를 치른 현재.
빌 워커의 블론세이브는 3번이 있었다.
세이브기회가 7번이었던 걸 감안하면 심각한 수준이었다.
문제는 앞으로 더 심해질 수도 있다는 거다.
지역언론에선 연일 클로저 교체를 외치고 있었다.
[한 번만 더 무너지면 위험할 수도.]
[아예 멘탈이 깨질 수도 있지.]
[그렇게 되면 빠이빠이야~]
계속된 실패.
신인 클로저에게는 큰 압박이 될 수밖에 없었다.
* * *
갤럭시는 원정경기를 떠났다.
[갤럭시가 피츠버그 파이리츠를 상대로 어떤 경기를 펼칠지 궁금하네요.]
[쉬운 경기는 아닐 겁니다. 피츠버그의 초반기세가 무섭거든요.]
[갤럭시와 같은 15경기를 치렀지만, 11승 4패를 기록하면서 북부지구 1위에 올라있죠.]
[단순히 승패만이 아니라 경기내용도 무척이나 좋습니다. 특히 타선이 무섭게 변했어요.]
[만년 꼴찌로 유망주들을 긁어모았는데, 그들의 포텐이 연달아 터졌다고 봐야겠죠?]
[예. 올 시즌 파이리츠가 어떤 성적을 올릴지 기대되네요.]
시즌초반의 활약이 끝까지 이어지진 않는다.
하지만 당장 상대해야 할 입장에서는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 시누를 올리면 좋겠지만...’
신우를 올리면 기선제압이 될 거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신우는 마지막 경기에서나 등판이 가능했다.
그의 걱정과 달리 갤럭시의 투수인 아니발 루이스는 호투를 이어갔다.
뻑-!!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7구 승부 끝에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우는 아니발 산체스! 6이닝 2실점을 기록하며 마운드를 내려갑니다!]
[파이리츠의 강타선을 상대로 잘 막았어요.]
[승리투수 요건을 지킨 아니발 산체스! 과연 시즌 첫 승을 올릴 수 있을지 기대됩니다!]
아니발 산체는 오늘이 세 번째 등판이었다.
하지만 첫 승 수확에 실패했다.
앞전 경기에서 승리투수 요건을 갖추었다.
하지만 불펜의 방화로 승리가 날아갔다.
‘오늘은 이기고 싶다.’
마이너리그를 전전하던 그였다.
그렇기에 메이저리그 커리어에 승리는 아직 없었다.
어떻게든 승리를 거두고 싶었다.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승리기념구를 들고 자랑하고 싶었다.
그런 간절한 마음이 통한 걸까?
딱-!!
“아웃!!”
부웅!!
“스윙! 아웃!!”
방화를 저지르던 불펜들이 호투를 이어갔다.
거기에 타선도 도움을 주었다.
딱-!!
“와아아아아!!”
경쾌한 소리와 함께 타구가 멀리 날아갔다.
그리고 이어진 신우의 배트플립이 화려하게 허공을 수놓았다.
[아트의 경지에 오른 시누의 배트플립이 작렬! 그리고 타구는 담장을 넘습니다!!]
[아-! 정말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는 배트플립이었어요!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이런 걸 좀 보고 배워야 합니다!!]
신우의 홈런과 함께 스코어는 4 대 2에서 5 대 2로 벌어졌다.
“아자!”
“나이스!!”
그라운드를 돌고 들어온 신우를 동료들이 맞이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아니발이 서있었다.
“이걸로 네 1승에 도움 좀 되겠지?”
메이저리그 최고의 선수가 자신의 승리를 챙겨주고 있다니.
더없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당연하지!”
아니발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홈런의 기쁨을 만끽했다.
9회초에 나온 홈런이었기에 쐐기포나 다름없었다.
승부의 추가 넘어왔다는 걸 다들 감지했다.
[이대로 끝나면 야구가 아니쥬?]
‘불길한 소리 하시네.’
[ㅋㅋㅋ 내기하쉴?]
공수교대로 우익수 포지션에 선 신우는 마운드를 바라봤다.
마무리인 빌 워커가 마운드에 올라왔다.
‘제가 이기면 얼마 주실 건데요?’
[오올~십만 노잣돈. 너는 3라운드. 어떰?]
빌 워커가 불안하다는 건 신우도 알았다.
하지만 3점의 리드를 안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번에 로베르토의 과거를 보느라 노잣돈도 사용했지 않은가?
이걸 받으면 바로 복구가 가능했다.
‘콜!’
[오케이!]
신우는 내기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예상대로 빌 워커는 첫 타자를 가볍게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뻐억-!!
“스트라이크! 아웃!!”
[아놔! 쟤 오늘 컨디션 좋네.]
[ㅋㅋㅋ 쫄리누?]
[확실하지 않으면 승부하지 말라는 거 안 배웠냐? ㅋㅋㅋ]
첫 번째 아웃카운트를 가볍게 잡아냈다.
이건 희소식이다.
첫 번째 아웃카운트를 가볍게 잡아내면 투수는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는다.
영점도 잡히기에 제구난조가 나올 가능성은 낮다.
‘이제 변수만 생기지 않으면 돼.’
그때였다.
뻑-!!
“악!!”
타자의 몸에 공이 박혔다.
[변수 생겼고요.]
[크으-! 노스트라 시누자너.]
‘젠장...’
별 다른 충돌은 없었지만, 문제는 빌 워커였다.
퍽-!!
“볼! 베이스 온 볼!!”
“와아아아아!!”
힛 바이 피치볼 이후 급격하게 제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스트레이트 볼넷을 내주면서 주자는 1, 2루가 되었다.
이제 홈런이 나오면 동점이 된다.
딱-!!
“와아아아아아!!”
경쾌한 소리와 함께 타구가 외야로 날아왔다.
중견수 방향으로 날아오는 타구에 신우는 빠르게 백업을 갔다.
2루수 키를 살짝 넘는 타구를 잡은 루카스가 빠르게 홈으로 공을 뿌렸다.
덕분에 2루 주자는 3루에서 멈춰야 했다.
몸을 돌리는 루카스에게 신우는 떨어진 그의 모자를 주워 건넸다.
“땡큐. 분위기가 영 좋지 않네.”
“그러게 말이야.”
“이럴 때 꼭 좋은 타구가 날아오니까, 긴장하고 있어야 해.”
“오케이.”
루카스의 조언을 듣고 돌아온 신우는 상황을 정리했다.
‘원아웃에 만루. 최악이네.’
5 대 2의 리드.
원아웃을 잘 잡았지만, 이후 데드볼로 제구가 흔들렸다.
결국 제이비어 감독이 마운드를 방문했다.
교체는 아니었다.
단지 빌 워커의 멘탈을 잡아주려는 듯 했다.
[시즌 초반이니까, 경기를 내주고 클로저를 키우겠다는 생각이지.]
[과연 잘 될 진 모르겠지만.]
감독은 시즌 전체를 봐야 한다.
한시즌 전체를 놓고 봤을 때 경기 하나는 크지 않다.
시즌 막판도 아니었고 초반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제이비어는 빌 워커의 경험을 살리는 선택을 했다.
비록 경기에서 지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우리 시누도 내기에서 패배하겠누.]
[ㅋㅋㅋㅋ 훈련 빡세게 가즈아!]
레전드들은 신이 났다.
신우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타석으로 들어오는 타자를 바라봤다.
‘훈련하는 건 괜찮지만, 팀이 진다니 영 기분이 별로네요.’
[어쩔 수 없지.]
[그렇다고 네가 마무리할 건 아니잖음?]
‘그렇긴 하죠.’
지금 와서 클로저로 바꾸기에도 늦었다.
결국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집중해서 수비하는 것이다.
경기가 재개됐고 빌 워커가 공을 연달아 뿌렸다.
퍽!
“볼!!”
순식간에 볼카운트는 2볼 1스트라이크가 됐다.
그리고 빌 워커는 자신의 주특기인 슬라이더를 던졌다.
쐐애애액-!!
딱!!
경쾌한 타격음이 그라운드를 울렸다.
그 순간.
신우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짧다.’
로베르토의 감각이 남아 있어서 알 수 있었다.
이건 제대로 힘이 실린 타구가 아니다.
신우는 곧장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타구의 위치를 확인했다.
‘오른쪽.’
타구는 낮고 빠르게 날아왔다.
낙구지점은 파울라인 안쪽이었다.
3루 주자는 베이스에 붙어 있었고 1, 2루 주자들은 리드폭을 넓혔다.
그동안 보여준 신우의 수비라면 이 타구를 잡을 순 없다는 게 그들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언제든지 귀루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잡을 수 없어.’
공의 낙구속도가 예상보다 빨랐다.
이대로는 공을 포구하긴 늦다.
그렇게 판단한 순간.
탁-!!
신우가 앞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떨어지는 공을 보고 정확히 글러브를 뻗었다.
퍽!!
공이 글러브에 들어오는 감각이 손바닥을 울렸다.
촤앗-!!
뒤이어 그라운드에 떨어진 신우가 곧장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에 다급히 귀루하는 주자가 보였다.
신우는 1루 베이스로 공을 뿌렸다.
“흡!!”
쐐애애애애액-!!
맹렬한 속도로 날아간 공이 그대로 1루수의 미트에 꽂혔다.
촤아아아앗-!!
퍼퍽!!
1루수의 슬라이딩과 거의 동타이밍.
모든 사람의 시선이 1루심에게 고정되었다.
“아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