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훈수로 메이저리거 - 156화 >
엄청난 페이스로 이닝을 마감한 신우가 마운드를 내려갔다.
거친 호흡을 내뱉는 그의 모습에 동료들은 이를 악물었다.
‘젠장...!’
‘투수가 저렇게까지 하는데 도대체 뭐하는 거냐?’
프로로서 부끄러움이 느껴지는 타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가짐이 결과로 이어지진 못했다.
딱!!
“아웃!!”
[8회말 주자가 나갔지만, 점수로 이어지진 못했습니다. 저희는 잠시 후, 9회초에 돌아오겠습니다.]
광고가 나가는 걸 확인한 캐스터가 헤드셋을 벗었다.
“와...진짜 공격력 답없네요.”
“시즌 막판이기도 하고, 구단이 저딴 식으로 나오니 타자들도 힘이 나지 않는 거겠지.”
“그래도 어떻게 8이닝 무실점 피칭을 했는데, 승리투수가 되질 못하는지.”
“그러게 말이야.”
이미 100구가 넘은 상황이다.
포스트시즌 진출과 같은 중요한 상황이 아닌 이상, 투수가 교체되는 게 당연했다.
“응?”
그런데 그라운드에서 상식과 반대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왜 정신우 선수가 또 올라오죠?”
“저게 무슨...”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
신우가 9회에도 마운드에 올라왔다.
그리고 이 사실은 투수코치 역시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당연하게도 투수코치인 베이커는 마이크의 결정을 반대했다.
“이미 100구가 넘었습니다. 교체해야 됩니다.”
“선수가 원하고 있어.”
“저도 대화는 들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포기할 투수는 없습니다. 그 고집을 꺾어야 하는 게 우리의 일이 아니었습니까?”
“때로는 선수를 믿어주는 것도 우리의 일이지.”
“하지만...!”
“그 선수가 팀의 에이스라면 더더욱 말이야.”
베이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팀의 에이스.
그것이 가지는 의미가 어떤 건지 그 역시 잘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정을 모르는 팬들은 신우의 등판을 반기지 않았다.
“망할! 저 새끼들 신우를 소비하면서까지 질 생각이야?”
“도대체 다 지친 신우를 올리다니! 이게 무슨 짓이야?!!”
“탱킹을 해도 적당히 해야지!!”
지기 위해서 신우를 다시 올렸다는 생각을 한 팬들이 일제히 야유를 쏟아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하하하!! 저 인간도 이제 어느 라인에 서야 되는지 잘 알았나 보군!”
스카이라운지에서 경기를 관람하는 잭은 박수치며 지금 상황을 즐겼다.
“이봐, 베켓. 저 친구한테 전해줘. 시즌 끝날 때까지 확실하게 진다면 내년 계약도 고려해보겠다고 말이야.”
잭의 말에 베켓은 입술을 깨물었다.
도무지 마이크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자리를 위해서 시누를 올린 건가?’
그를 나무랄 수도, 원망할 수도 없었다.
자신 역시 이 남자의 눈치를 살피느라 알론소를 가져다 팔았으니 말이다.
그때였다.
[뻐어억!!]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응?”
예상하지 못한 콜에 베켓의 시선이 TV로 향했다.
[딱!!]
[아웃!!]
순식간에 두 개의 아웃카운트가 올라갔다.
[100구가 넘게 던졌지만, 신우 정의 투구는 여전히 강력하군요.]
[쓰리핑거 커브를 적절하게 섞으며 타자들을 요리하고 있어요.]
퍽!!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미러클 피처가 2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9이닝 무실점으로 마운드를 내려옵니다!!]
“저게 무슨...?”
예상치 못한 일에 잭은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 했다.
반대로 베켓은 마이크가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100구를 넘었지만, 가장 믿을 수 있는 투수가 시누였다는 건가?’
모두가 포기했다고 생각한 선수기용.
하지만 마이크는 아직까지 경기를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 * *
9이닝 무실점 2피안타 1볼넷.
정규이닝을 끝낸 신우가 올린 기록이었다.
[완벽한 피칭을 끝낸 정신우 선수, 하지만 승리와는 인연을 맺지 못했습니다.]
[아직 단정지을 순 없습니다. 만약 9회말에 점수가 난다면 결국 정신우 선수가 승리투수로 이름을 올릴 겁니다.]
[8번부터 시작되는 9회말, 메츠가 꼭 점수를 내주길 바라겠습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은 이제 메츠가 점수를 내고 경기를 끝낼 수 있느냐였다.
연장으로 넘어간다면 메츠는 불펜을 가동할 것이다.
그리고 이미 메츠의 불펜에는 투수들이 몸을 모두 푼 상태였다.
‘시누, 고생했다. 이제는 우리가 맡을게.’
불펜에서 모니터를 바라보는 레이먼드의 얼굴에는 비장함마저 어렸다.
그만큼 신우의 오늘 피칭에 감명을 받았다.
다른 불펜투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메츠에 신우가 합류했을 때부터 함께 했기에 감정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들은 신우의 오늘 피칭은 승부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녀석을 이기게 하기 위해선 우리가 점수를 내야 해.’
그 마음은 타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선발투수가 9이닝을 던졌다.
그것도 단 1점도 내주지 않은 채 마운드를 내려왔다.
그런데 승리투수가 되지 못한다?
이 사실만큼이나 우스운 일은 없었다.
‘여기에서 점수를 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웃음거리가 될 거야.’
역사상 최악의 타자들로 이름을 남길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신우를 보고 있으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어떻게든 출루...응?’
타석으로 들어가기 전.
배트에 송진을 묻히던 젝슨은 머리 위로 드리우는 그림자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의아한 얼굴로 눈앞에 있는 선수를 바라봤다.
“시...누?”
신우가 대기타석에서 배트를 들고 서있었다.
[아-! 이게 무슨 일인가요? 정신우 선수가 헬맷과 배트를 들고 대기타석에 섰습니다. 이게 어떤 의미일까요?]
[일종의 연막일 거란 생각이 듭니다. 대타를 어떤 선수로 내밀지 보여주지 않으면서 상대 불펜에 맞춰 대타를 내세우는 거죠.]
[그런 의도라면 다행이군요. 저는 설마 정신우 선수가 다시 타석에 서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다음 이닝에서 투수교체는 확실한 상황인만큼, 굳이 정신우 선수를 타석에 세울 이유는 없으니까요.]
올 시즌 신우는 타석에서 썩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렇기에 누구도 그를 타석에 세울 거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단 한 사람.
마이크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저 감독도 도박을 좋아하네.]
[그것보다는 승부처를 아는 거겠지.]
레전드들의 채팅이 올라갔다.
“젝슨, 내가 나가기 전에 경기를 끝내도 돼.”
“어? 설마 진짜 나가는 거야?”
“응.”
“헐...”
“젝슨! 뭘 꾸물거려?!”
구심의 재촉에 젝슨이 후다닥 타석으로 달려갔다.
그가 놓고 간 송진을 집어든 신우가 무심한 얼굴로 배트의 손잡이에 발랐다.
[쟤가 경기를 어케 끝내냐?]
[뜬금포 하나 나오면 쫑이긴 하지.]
[ㄴㄴ 불가능.]
[출루라도 하면 다행이지.]
부정적인 레전드들의 채팅에도 신우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배트를 기둥삼아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플레이볼!!”
경기 시작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신우가 타격자세를 취했다.
부웅-!!
뻐억!!
그리고 투수의 타이밍에 맞춰 배트를 돌렸다.
[만약 네 타석에서 한 방 날리면 재밌겠군.]
[레알 혼자 야구하는 거겠네?]
[에이-! 설마 그런 일이 가능하겠음?]
[레알 그럼 사기지.]
다양한 의견들이 오가는 사이.
젝슨은 꽤 투수를 괴롭히고 있었다.
딱!!
“파울!!”
7구까지 가는 승부 끝에 풀카운트를 만들었다.
이전에는 보여주지 않았던 승부욕과 집중력이었다.
[확실히 쟤는 너한테 훈련을 받아서 그런지 집중력이 남다르네.]
[거기에 시즌 막판에 합류했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겠지.]
레전드들의 채팅에도 신우는 대꾸하지 않고 투수의 타이밍에 맞춰 스윙했다.
부웅-!!
퍽!!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아-! 아쉽게도 떨어지는 커브에 배트 헛돕니다! 8구 승부 끝에 돌아서는 젝슨 선수!]
첫 번째 아웃카운트가 올라갔다.
더그아웃으로 들어오는 젝슨을 보던 신우가 대기타석을 벗어나 타석으로 향했다.
[그런데 너 왜 말이 없음?]
[과묵한 캐릭터는 어울리지 않는데?]
평소와 다른 신우의 태도에 레전드들이 물었다.
신우는 대답 대신 눈을 감고 호흡을 골랐다.
‘힘을 모아야죠.’
[응?]
[무슨 힘?]
‘경기를 끝낼 힘이요.’
정신을 집중시킨 신우가 성큼성큼 타석으로 걸어갔다.
[아-! 정신우 선수가 타석으로 걸어갑니다! 설마 교체가 아니라 정신우 선수를 타석에 세우나요?]
[이건 정말 아닙니다. 이런 순간에 정신우 선수를 타석에 세우다니요?]
[그 말에 동의라도 하듯 씨티필드를 찾은 팬들이 야유를 쏟아냅니다!]
“우우우우-!!”
“마이크 꺼져라!!”
“이게 팀이냐?!”
“우리는 돈을 내고 야구를 보러 왔다!!”
팬들의 야유가 커질수록 스카이라운지에서 경기를 보는 잭의 웃음은 커져갔다.
“으하하하! 이거 정말 가관이군! 저 남자가 이렇게까지 자리에 연연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어!”
[플레이볼!!]
“이렇게까지 내 발을 핥는다면 나도 그만한 대우를 해줘야지! 내년에도 저 친구를...!”
[초구 던집니다.]
경기시작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사인을 교환한 투수가 공을 뿌렸다.
“감독으로...”
[딱-!!]
[초구를 강타!!]
잭의 말이 캐스터의 외침에 묻혔다.
[그리고 시누는...!!]
화면에 잡힌 신우가 배트를 던졌다.
[배트를 던졌습니다!!!]
메이저리거들의 배트플립과 차원이 다른 빠던의 등장에 관중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와아아아아아!!”
씨티필드를 가득 채우는 함성이 스카이라운지 창문을 뒤흔들었다.
갑작스런 함성에 깜짝 놀란 잭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퍽!
쨍그랑!!
“악!”
테이블을 무릎으로 차는 바람에 위스키잔이 땅에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타구를 쫓던 우익수가 멈추고 멍하니 타구를 눈으로 쫓습니다!! 그리고 타구는...! 담장밖으로 사라집니다!!! 굿바이 홈런-!!]
흥분한 캐스터의 음성이 스카인라운지를 가득 메웠다.
[혼자서 팀을 승리로 이끈 시누가 3루를 돌아 홈으로 들어옵니다!!]
화면에 잡힌 메츠 선수단은 오랜만에 환호와 기쁨에 취해 있었다.
관중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든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그리고.
퍼엉-!
펑!!
하늘을 수놓는 수많은 폭죽이 그들의 기쁨을 나타내주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이게 말이 돼?!!”
잭만은 지금 이 순간을 즐기지 못했다.
“Fuck!! 내 만 달러짜리 슈트가 다 젖었잖아! 내가 이래서 야구를 좋아할 수가 없어!!”
신경질을 토해내는 잭이 스카이라운지를 박차고 나갔다.
뭐라고 한 마디라도 던지고 싶었지만 베켓은 그럴 정신이 없었다.
‘혼자서 9이닝을 던지고...’
그 역시 야구를 했었다.
그렇기에 지금 눈앞에서 펼쳐진 이 비현실적인 일에 충격을 받았다.
‘혼자서 점수를 내고 승리했다고?’
전무후무.
메이저리그 역사상 그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일인야구가 눈앞에서 펼쳐진 날이었다.
‘게임체인저...’
그리고 베켓은 이날 깨달았다.
보라스가 했던 말의 진정한 의미를 말이다.
* * *
「뉴욕 메츠의 정신우 선수가 완봉승을 거두었습니다.
씨티필드에서 등판한 정신우 선수는 9이닝 무실점 2피안타 1볼넷 15K를 기록하며 완벽한 피칭과 함께 9회말, 타석에서 직접 솔로홈런을 터트리며 시즌 20승을 달성했습니다.
이날 경기의 승리로 메츠는 꼴찌로 떨어질 위기에서 벗어났습니다.」
신우의 경기소식에 인터넷이 발칵 뒤집혔다.
-헐...
-실화냐?
-게임이야기임?
ㄴ 현실임.
ㄴㄴ 오늘 메이저리그 경기 이야기.
ㄴㄴㄴ 말이 됨?
-혼자 막고 혼자 점수내고, 혼자 다 하네.
ㄴ 북치고 장구치고
-이 정도면 KBO오면 레알 혼자 야구해도 되는 각 아니냐?
ㄴ ㅇㅈ.
한국은 물론 미국 일본까지.
이날 경기는 전 세계를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