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훈수로 메이저리거 - 146화 >
* * *
메이저리그에는 두 개의 리그가 존재한다.
아메리칸리그와 내셔널리그.
두 리그의 가장 큰 차이점은 지명타자제도에 있었다.
지명타자란 투수의 타순에 타자를 기용하는 제도였다.
아메리칸리그는 이 제도가 있었고 내셔널리그는 아직 논의단계였다.
즉, 없다는 소리다.
이런 제도의 차이 때문에 많은 이들이 내셔널리그의 투수가 더 쉽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게 있었다.
바로 투수가 주자로 나갔을 때 생기는 체력소모였다.
퍽-!
“세이프!”
[견제구가 날아듭니다. 하지만 뛸 생각이 전혀 없는 정신우 선수, 안정적으로 세이프가 됩니다.]
또한 타격을 하고 주루를 한다는 건 투수의 집중력이 흐려지는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였다.
투수가 이루기 가장 어려운 기록 중 하나인 퍼펙트게임만 보더라도 그렇다.
지명타자 도입 이후 아메리칸리그에서 10차례, 내셔널리그에서 6차례가 나온 것만 하더라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올 시즌 신우의 기록을 제외한다면 5차례로 딱 두 배의 차이가 났다.
그만큼 타격과 주루는 투수의 리듬을 흩트리기에 좋았다.
‘견제구를 많이 던질 필요는 없어. 베이스에 오래 서있는 것만으로도 이 더운 날씨에는 체력소모가 늘어나게 된다. 거기에 5회까지 이어온 좋은 투구리듬을 잃을 수도 있지.’
무조건 그렇게 된다는 게 아니었다.
약간의 빈틈을 만드는 게 전부일 수도 있다.
‘그거면 충분하다. 아주 약간의 빈틈, 그게 생긴다면 공략할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어.’
토니 윙키스는 그 약간의 가능성을 믿고 투구템포를 길게 가져가게끔 사인을 낸 것이다.
이게 먹힐지 아닐지는 다음 이닝에서 답이 나올 것이다.
* * *
딱-!!
높게 떠오른 타구를 보며 신우가 3루로 뛰었다.
퍽!
“아웃!!”
마지막 세 번째 아웃카운트는 허무하게 끝났다.
신우는 3루로 뛰던 걸 멈추고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휘유...”
한숨이 절로 나올 정도로 긴 공격이었다.
‘이상하게 템포가 길어졌단 말이지. 뭔가 리듬이 깨진 건가?’
[반대다.]
‘예?’
[네 리듬을 깨려고 일부러 템포를 길게 가져갔어. 별로 필요없는 타이밍에 포수도 마운드를 방문했고 말이야.]
[투수는 모르는 눈치던데?]
[아마 감독이나 아니면 포수가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겠지.]
[포수보다는 감독 아이디어인 듯.]
[ㅇㅇ 얘 베이스에 나가고 곧장 사인이 나왔음.]
신우의 시선이 자이언츠의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확실히 저 양반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을 거 같았다.
[체력이 좀 빠졌냐?]
[요즘 날씨 더워서 힘들 수도 있겠는데.]
[포수와 미리 이야기해서 템포 좀 천천히 가져가든가.]
몇몇 레전드플레이어들이 걱정어린 조언을 했다.
신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더그아웃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장비를 착용하고 있는 마누엘에게 다가갔다.
“마누엘.”
“응?”
“이번 이닝에서 템포를 좀 천천히 가져가자.”
“템포를? 왜? 지금 느낌 좋았는데.”
[아무것도 모르누.]
[역시 얘는 경험이 부족하네.]
[ㅇㅈ. 토마스라는 애는 이럴 때 바로 오케이 사인을 냈을 텐데.]
마누엘의 통찰력이 아쉬운 레전드플레이어들이었다.
“이번 이닝에서 너무 베이스에 오래 있었어. 큰 영향은 없겠지만, 숨을 돌릴 시간이 필요해.”
“아...!! 확실히 그렇겠네. 오케이! 나만 믿어!!”
자신감 넘치는 마누엘의 대답에 뭔가 불안한 신우였다.
[불안하누.]
[자신감 넘치는 게 오히려 불안하네.]
그리고 레전드플레이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 * *
불안은 결국 현실이 됐다.
“마누엘!”
구심이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는 마누엘을 불렀다.
“별 다른 이유없이 경기를 지연시키면 퇴장이야!”
“아니...이유가 없는 게 아니라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번 이닝에만 세 번째야! 도대체 왜 자꾸 자리에서 일어나는 건데?!”
[너무 티나게 시간을 끄누.]
[저러니까 한 소리 듣지.]
[뭔가 좀 그럴 듯한 변명을 해라.]
레전드플레이어들은 변명하길 기대했다.
하지만.
“다리가 쥐가...”
[상상하지도 못한 대답!]
[저것도 변명이라고 하냐?]
[아이고 두야...]
“아하-! 부상이다? 그럼 교체를...!”
“아...아닙니다! 괜찮...!”
바로 말을 바꾸는 마누엘의 태도에 구심이 인상을 구겼다.
“이번에는 구두경고야. 하지만 다음에는 바로 퇴장을 시킬 수도 있으니까 단단히 각오해!”
“예...”
결국 풀이 죽은 마누엘이 자리에 앉았다.
[와...저런다고 바로 앉아버리누.]
[메이저리거 맞냐?]
[그냥 구심이랑 한판 붙을 생각으로 덤벼야지.]
[하...쟤 성격 마이너에서도 저랬냐?]
‘저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트리플A에서는 그래도 한 성격을 했던 마누엘이다.
벤치클리어링에서도 가장 앞에 나설 정도로 불 같은 성미를 보였다.
[그런데 왜 저럼?]
[메이저리그에 와서 쫀 건가?]
‘그럴 수도 있을 거 같은데요.’
[저런 성격이면 곧 내려가겠네.]
[빨리 내려가라. 고구마 먹은 거 같다.]
악담을 쏟아내는 레전드플레이어들을 뒤로 하고 신우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느 정도 돌아왔냐?]
‘예. 나름 괜찮아졌습니다.’
[저 발연기가 아예 도움이 안 됐던 건 아닌가 보네.]
‘많이 도움이 됐죠.’
때마침 캐처박스에 앉는 마누엘이 손을 들어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제 괜찮아.’
신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친구의 희생으로 호흡은 돌아왔다.
이제는 돌아온 호흡으로 모든 힘을 쏟아부을 때였다.
[상대 감독이 꼼수를 부렸지만, 경기는 감독이 아닌 선수가 하는 거다. 그 사실을 정확히 알려줘.]
‘예.’
매튜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신우가 사인을 교환했다.
어떻게든 체력소모를 시키려고 했던 토니 윙키스 감독의 작전.
아마 보통의 투수, 그리고 신우와 같은 연차의 선수였다면 흔들렸을 가능성이 크다.
경험이 부족해 이런 상황에서 리듬을 다시 찾는 게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우는 최대한 많은 간접경험을 할 수 있었다.
바로 레전드플레이어들의 조언을 들으면서 말이다.
[여기서 점수를 내주거나 하면 훈련량은 두 배로 늘려야지?]
[쌉인정.]
[이제 막 후반기 시작인데, 벌써 체력이 바닥이면 훈련량 늘려야 되는 게 맞지.]
그들의 협박성 채팅에 식은땀을 흘리며 신우는 마음을 다잡았다.
‘절대 그럴 일은 없습니다.’
[절대?]
‘예. 저 대구고 출신입니다!!’
그리고 토니 윙키스가 간과했던 한 가지.
신우가 대프리카로 불리던 대구에서 중고교를 다녔다는 사실이다.
대구의 여름은 한 마디로 표현하면.
[엄...지옥에서 살았구나.]
스판의 채팅과 함께 신우가 모든 힘을 담아 공을 뿌렸다.
쐐애애애액-!!
뻐어억!!
“스트라이크!!”
전광판에 찍히는 100마일의 구속을 보며 토니의 얼굴이 굳어졌다.
* * *
「뉴욕 메츠의 정신우 선수가 후반기 첫 경기에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맞이해 7이닝 2피안타 2볼넷 11탈삼진 무실점 피칭으로 깔끔한 스타트를 끊었습니다.
2 대 0의 스코어로 승리투수 요건을 갖추고 마운드를 내려온 정신우 선수지만, 9회초 클로저 레이먼드 선수가 쓰리런홈런을 허용하며 아쉽게도 승리를 거두진 못했습니다.」
후반기 첫 경기.
깔끔하게 승리투수가 될 수 있었던 신우였다.
하지만 레이먼드의 방화로 승리가 날아가면서 아쉬움을 삼켜야 했다.
당연히 인터넷반응은 불 같이 타올랐다.
-두 타자 연속 볼넷에 세 번째 타자에게 홈런을 허용한 투수가 무슨 클로저냐?
-도대체 신우가 얼마나 해줘야 되는 거임?
-타자들 점수 못내는 거 실화냐?
-오늘 포수 보는데, 너무 불안하더라.
ㄴ 프레이밍 ㅅㅂ ㅋㅋ 차라리 박광수를 데려다가 앉혀라.
ㄴㄴ 걔도 좀...
-그런데 레이먼드 포수한테 화내는 거 같던데.
ㄴ 메츠에 포수가 이렇게 없나?
ㄴㄴ ㅇㅇ 없음 ㅋ 월시 도전하면서 팜 싹 비워버림.
ㄴㄴㄴ 거기에 최근 계속 포스트시즌 나가면서 드래프트픽도 너무 낮음 ㅋㅋㅋ
-여튼 포수 바꿔야 된다.
오늘 경기의 원인으로 지목된 마누엘에게 모든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건 한국만이 아니었다.
미국에서도 각종 SNS와 레딧 심지어는 TV프로그램에서도 마누엘을 패배의 원인으로 꼽았다.
[메츠는 트레이드를 통해 토마스의 빈자리를 메워야 됩니다.]
패널들마저 마누엘이 아닌 다른 포수가 필요하다는 의견.
마누엘은 그러한 반응을 직접 몸으로 맞고 있었다.
“젠장...”
홀로 어두운 방에 앉아 TV를 보는 마누엘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어두웠다.
* * *
후반기가 시작되고 4경기가 지났다.
즉,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 고작 5일이 지난 것이다.
아직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지만, 메츠 클럽하우스의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살 떨리누.]
[조금만 건드려도 팡-! 하고 터질 거 같네.]
레전드플레이어들의 말대로였다.
옷을 갈아입는 선수들 표정은 무척이나 험악했다.
쾅!!
그때 굉음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아직 어린 션 웰스가 보였다.
메츠의 5선발인 그는 굳은 얼굴로 가방을 챙겨 클럽하우스를 나갔다.
[살인이라도 할 거 같누.]
[근데 나라도 6이닝 2실점 하고 승리투수 요건 갖추고 내려갔는데, 불펜이 무너지면 꼴 받을 거 같음.]
[직전 경기에서도 그랬다면서?]
[더 심했다던데. 책임주자를 남겨두고 내려가서 평자만 엄청 올랐다더만.]
[거기다 오늘 포수가 제대로 실수를 했지.]
8회.
마누엘은 대니얼이 던진 커브를 제대로 포구하지 못하고 뒤로 빠트렸다.
문제는 3루에 주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주자는 당연히 홈으로 들어와 득점을 올렸다.
그리고 그 득점은 결승득점이 되면서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
[쟤 올라오고 7전 했지?]
‘예.’
[그중에서 1승 6패를 기록중이고.]
‘...그렇죠.’
[와...이거 완전 그거 아니냐?]
‘그거요?’
[패배의 아이콘.]
[저주의 인형.]
[염소의 저주, 뺨을 후려치네.]
레전드플레이어들의 농담에도 신우는 웃지 못했다.
마누엘이 최근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2군에 있을 때의 절 보는 거 같네요.’
2군에서 육성선수로 지내던 시절.
신우는 의욕이 없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경기에 나가고 이겨서 정식계약을 맺고 싶었다.
하지만 1년, 2년이 흐르면서 점점 목표는 희미해졌다.
실패가 거듭될수록 점점 낭떠러지에 몰리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희망은 사라지고 내몰리는 기분만 들었다.
결국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 어떤 결과가 남는지 알기 때문이다.
‘방출...’
[메이저리그에 올라오면 오히려 더 심함.]
[ㅇㅈ]
[최저연봉 받으면 결국 언제 잘릴지 모르니까, 불안이 커지지.]
[내려가기 싫어서 막 발악을 하게 됨.]
[부담감이 점점 커지지.]
레전드플레이어들의 말에 신우는 공감했다.
하지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상대도 프로인데, 뭔 이야기를 해주겠냐?]
스판의 말에 신우는 동의했다.
[뭣보다 쟤는 캐칭도 엉망임.]
[프레이밍도 너무 못하고.]
[심리전도 좀 있어야 되는데, 그런 부분도 전혀 없음.]
포수가 하는 일은 의외로 많았다.
문제는 그런 것들을 하기 위해서는 경험이 많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레전드플레이어들이 보기엔 마누엘은 그런 점들이 부족했다.
그때였다.
[별로 엉망은 아니던데.]
[응?]
[ㄹㅇ?]
누군가의 채팅에 다른 레전드플레이어들이 놀라 물었다.
다른 이들의 질문에 그 레전드플레이어가 다시 채팅을 쳤다.
[요기베라 : 기술은 나쁘지 않았음. 문제는 멘탈이지. 그리고 벌써 포기하는 건 너무하지 않음?]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뛰어난 포수 중 한 명으로 손 꼽히는 선수.
요기 베라의 등장이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님. 벌써 포기는 이르지.]
그의 명언을 채팅으로 보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쟤 도와주라는 거임?]
[굳이 나서서 도와줄 필요는 없지. 도움은 요청하는 인간에게만 주면 되는 거임.]
[그건 ㅇㅈ.]
[근데 쟤도 메이저리거인데, 자존심 때문에 도와달라고 하겠음?]
[자존심이 밥 먹여주냐? 절박하면 자존심은 언제든지 버리는 거지.]
레전드플레이어들의 말이 오갈 때였다.
“시누. 바쁘지 않으면 같이 밥이나 먹을까?”
마누엘이 다가와 먼저 제안을 했다.
[쟤도 우리 채팅 보이냐?]
황당해하는 스판의 채팅을 뒤로 하고 신우는 마누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