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훈수로 메이저리거 - 82화 >
* * *
브라이스 하퍼는 이 순간을 기다렸다.
‘어제는 신세를 졌어.’
1차전에서의 패배.
하퍼 자신에게도 실망스런 결과물이었다.
화를 이겨내지 못하고 배트를 부러트렸다.
더욱 열이 받는 건 자신을 노려보는 녀석의 눈빛이었다.
‘그런 도발을 받았으면...’
하퍼의 눈동자에 와인드업하는 신우가 비쳤다.
‘확실하게 돌려줘야지.’
하퍼는 신우가 자신을 도발했다고 생각했다.
단지 눈빛만 봤을 뿐이니, 어떻게 판단을 내리던 그건 각자의 자유다.
[초구, 던집니다!]
와인드업을 한 신우가 초구를 뿌렸다.
손에서 공이 떠나는 순간.
하퍼의 눈에 공이 느릿하게 날아오는 게 보였다.
‘걸렸어!!’
주위의 소음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팬들의 야유, 응원소리, 환호성.
모든 것이 차단됐다.
바로 옆에서 토마스가 뭐라 하는 것 같지만 목소리는 닿지 않았다.
모든 신경이 오직 공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래서일까?
날아오는 공이 평소보다 크게 보였다.
후웅-!!
날아오는 공을 향해 배트를 돌렸다.
테이크백을 했던 배트에 힘이 담겨 허리를 막 지나려는 순간.
휘릭-!
공이 미세하게 휘면서 배트의 궤적에서 어긋났다.
현재 하퍼의 눈에는 가상의 스윙궤적이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날아오는 공의 궤적도 보이고 있었다.
그 가상의 선이 어긋나는 순간.
하퍼는 곧장 몸에 붙은 왼팔을 떼어내며 스윙의 궤적을 바꾸었다.
‘이런...!’
신우는 그것을 바로 간파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이미 공은 그의 손을 떠난 상태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딱-!
경쾌한 소리와 함께 영역이 깨졌다.
* * *
딱-!!
“와아아아아-!!”
필리스의 팬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의 시선이 뒤로 전력질주를 하는 좌익수에게 향했다.
[하퍼, 초구부터 강타!! 그리고 이건 큽니다!!]
캐스터의 목소리에 절망감이 어렸다.
누가 보더라도 큰 타구였다.
넘어가더라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
그 순간.
휘잉-!!
강한 바람이 몰아쳤다.
그 바람은 타구의 방향을 바꾸더니 점점 좌익선상 밖으로 밀어냈다.
“파울!!”
공이 관중석에 떨어졌을 때.
3루심이 양팔을 저었다.
[폴대 밖으로 떨어지는 타구!! 아슬아슬하게 파울입니다!]
[아-! 이건 정말 잘 맞아서 넘어갔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다행입니다.]
[그렇습니다. 하퍼 선수도 아쉬운 표정으로 돌아옵니다.]
간담이 서늘했다.
‘맞는 순간 홈런을 알 수 있다고 하더니...’
2군에 있을 때는 그런 걸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배트와 공이 임팩트 하는 순간.
홈런임을 직감했다.
[천운이네.]
[크으-! 하늘이 도왔다야.]
[솔까 이건 바람 아니었음 넘어갔다.]
‘인정합니다.’
신우는 순순히 인정을 했다.
[야, 그걸 인정하면...]
‘졌다고는 생각 안합니다.’
[응?]
신우가 글러브를 들었다.
그러자 토마스가 던진 공이 그의 글러브에 들어왔다.
퍽-!
‘이번에는 이길 겁니다.’
[정답이다.]
매튜슨의 채팅이 올라갔다.
[마운드에서 가장 어리석은 행동이 과거를 후회하는 거다. 특히 결과가 나오지 않은 일을 두려워하는 거지.]
흐릿했던 정답이 보이자 더욱 명확해졌다.
[홈런을 맞을 뻔 한 게 아니라, 그저 파울이 된 거다.]
[ㅇㅇ 저렇게 생각해야 됨.]
스판과 치프의 채팅에 고개를 끄덕였다.
* * *
- 크-! 하퍼 지렸다.
ㄴ 진짜 완벽한 스윙이었다.
ㄴㄴ 신우 커터를 저렇게까지 완벽하게 때려낸 타자가 있었나?
ㄴㄴㄴ 없었음.
- 오늘 신우 첫 실점하겠누
ㄴ 이미 멘탈 깨진 듯.
ㄴㄴ 루키라면 이런 순간에 멘탈 깨지는 게 당연하지.
ㄴㄴㄴ 그동안 잘난척 오질나게 하더니, 꼬시다.
데블스가즈아 : 아니, 너네는 왜 이렇게 신우가 당하는 걸 좋아하냐?
ㄴ 무슨 상관임?ㅋ
ㄴㄴ 좋아하는 게 아니라, 냉정하게 보는 거지.
ㄴㄴㄴ 냉정 좋아하네. 그냥 잘 되는 꼴을 못 보는 거지.
댓글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조용했던 안티들이 다시 등장했다.
덕분에 갑론을박이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신우는 그런 사실을 모른 채, 2구를 준비했다.
‘집중...집중...’
신우는 다시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곧 주위의 풍경이 어둠으로 물들어갔다.
한 번 영역에서 빠져나왔지만 다시 들어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만큼 신우가 현재의 대결에 집중하고 있단 뜻이었다.
[어지간히 지기 싫은갑네.]
[ㅇㅈ.]
[언제 어느 때나 무의식적으로 저 상태가 되면 좋을 텐데.]
[그러게 말이야.]
레전드플레이어들은 신우의 상태를 정확히 판단했다.
현재 신우는 평소보다 높은 집중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건 상대가 하퍼이기 때문이다.
만약 다른 선수였다면 앞서 카를로와의 대결처럼 됐을 것이다.
‘잡는다.’
다시 한 번 영역으로 발을 들인 신우는 토마스와 사인을 교환했다.
* * *
따악-!
“파울!!”
[6구 다시 파울이 됩니다!!]
[정신우 선수와 브라이스 하퍼 선수의 대결이 박빙으로 이어지고 있네요.]
6구 승부.
신우는 커터를 3번, 체인지업을 1번 그리고 포심을 1번 던졌다.
하지만 유인구에는 단 한 번도 배트가 나오지 않았다.
존에 들어가는 공은 파울이 됐다.
‘젠장.’
‘망할.’
두 선수는 서로를 노려보며 같은 생각을 했다.
‘만만치 않은데?’
‘약간씩 타이밍이 밀린다.’
서로의 노림수가 모두 어긋나고 있었다.
힘겨운 싸움이 되고 있는 상황.
[벌써 7구째 승부가 됐습니다. 현재 상황을 어떻게 보십니까?]
[정신우 선수가 불리해보이네요.]
[그렇습니까? 저는 박빙의 대결로 보였는데요.]
[분명 지금까지는 박빙이었습니다만 투수와 타자의 싸움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큰 차이요?]
[예. 타자는 투수의 공을 볼수록 익숙해진다는 겁니다.]
[아...]
타자는 투수를 상대할수록 그 공에 익숙해진다.
속도, 궤적 등.
그러한 요소들이 익숙해지면 타자는 그것을 때려낼 수 있다.
[투타의 승부가 길어지면 결국 타자가 익숙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구종이 적은 마무리투수라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죠.]
신우가 던질 수 있는 구종은 3가지였다.
하나하나의 공이 모두 수준이 높았다.
보통의 타자라면 승부가 길어지더라도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하지만 하퍼 같은 특급타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따라붙기 시작했어.’
체인지업의 변화도, 커터의 무브먼트도.
모두 따라잡고 있었다.
무엇보다 하이 패스트볼에도 속지 않으면서 볼카운트는 어느덧 2볼 2스트라이크가 됐다.
‘어떻게 하지?’
막막함이 엄습하고 있을 때.
번개를 맞은 것처럼 한 가지 구종이 스쳐지나갔다.
신우는 고개를 내려 공을 바라봤다.
‘어쩔 수 없지.’
일종의 도박.
하지만 지금 상태라면 가능할 수도 있다.
[정신우 선수, 로진을 손에 묻히고 마운드에 섭니다.]
[이번 공을 잘 던져야 합니다. 풀카운트가 된다면 하퍼 선수에게 더 유리해집니다.]
풀카운트가 되면 던질 수 있는 곳이 한정된다.
자칫 존에서 벗어나면 볼넷이 된다.
[사실 볼넷으로 내보내도 되지 않습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캐스터의 말에 해설위원이 말끝을 흐렸다.
[한 번 도망치기 시작하면 계속 도망치게 됩니다. 상대가 강하다고는 하지만 정신우 선수는 이 상황을 정면에서 이겨내고 싶을 겁니다.]
야구선수였기에 해설위원은 신우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해설은 정확했다.
‘피하지 않는다.’
여기서 피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정면에서 누르고 이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우가 직접 사인을 냈다.
‘커터라고?’
토마스가 의문을 가지고 되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긍정의 사인이었다.
앞서도 커터를 던졌는데 다시 한 번 커터라니?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가장 자신 있는 공을 던지고 싶은 건가?’
신우가 던지는 공들 중 비율이 가장 높은 건 단연 커터다.
그것을 던지겠다는 건 승부를 하겠다는 소리였다.
‘어쩔 수 없지.’
거기까지 생각을 닿자 토마스는 거부를 할 수 없었다.
투수가 결정한 이상 거기에 호응을 해주는 게 포수가 해야 될 일이다.
[토마스 선수, 미트를 내밀었습니다. 사인교환을 끝낸 정신우 선수, 7구를 던지기 위해 와인드업에 들어갑니다!!]
7구.
박빙의 승부가 된 이 대결을 보기 위해 관중석도 적막이 흘렀다.
그리고 신우가 와인드업을 했다.
뒤이어 몸을 틀면서 킥킹.
촤앗-!!
무릎이 가슴까지 올라오는 와일드한 투구폼이 만들어지는 순간.
그는 비틀렸던 신체의 꼬임을 풀며 다리를 내디뎠다.
콰직!!
스파이크의 징이 마운드에 박히며 그의 다리를 단단하게 고정해주었다.
신우는 영역에 들어오며 날카로워진 감각을 통해 근육의 움직임, 힘의 이동을 느끼며 투구를 이어갔다.
회전이 하체에서 허리 그리고 상체로 이어지면서 무게중심이 자연스레 앞으로 쏠렸다.
그 자연스러움을 놓치지 않고 장전되었던 팔을 있는 힘껏 돌렸다.
코킹이 된 팔이 지면과 일직선이 되며 뒤로 당겨졌다.
그리고 무게중심이 온전히 앞으로 넘어온 순간.
팽팽하게 당겼던 고무줄을 놓은 것처럼, 팔이 회전했다.
후웅-!
귀를 뚫고 바람의 소리가 들려왔다.
신우는 모든 감각을 동원해 팔과 등근육 그리고 둔근과 아킬레스건까지.
모든 근육이 일직선이 되는 순간.
즉, 릴리스포인트에 팔이 도달하기를 기다렸다.
‘여기...!’
그의 감각이 신우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야!!
신우는 그 소리를 놓치지 않고 있는 손 끝에 모든 감각을 집중시켰다.
‘중지에 더 힘을 준다.’
신우가 포심을 던질 때.
검지와 중지에 5 대 5의 힘을 부여한다.
즉, 균형을 맞춘다는 소리다.
그래야지만 공에 정확히 역회전이 걸리며 마그누스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었다.
커터를 던질 때는 조금 달라진다.
그때는 중지에 7의 힘을 가한다.
포심과 달리 커터의 회전은 역회전이 아닌 사선으로 걸려야 된다.
다른 투수들의 경우 이러한 회전을 그립으로 해결한다.
하지만 신우는 단지 손가락에 가해지는 힘의 분배로 이를 해결했다.
[슬라이더 커터는 더 큰 회전이 필요하다.]
처음 슬라이더를 배울 때.
치프 밴더는 그렇게 말했다.
커터보다 더 강한 회전을 만들어내기 위해선 그립, 그리고 힘의 분배를 재조정해야 했다.
[중지에 80퍼센트의 힘을 주어야 돼.]
7 대 3의 분배였던 커터와 달리 이번에는 중지에 8의 힘을 가했다.
그리고 강제적으로 공에 회전을 일으켰다.
“흐아아아앗!!”
쐐애애애액-!
신우가 기합과 함께 공을 뿌렸다.
그의 손을 떠난 공이 매섭게 날아갔다.
‘커터?’
공이 손을 떠나는 순간.
하퍼는 공의 회전을 볼 수 있었다.
평소라면 볼 수 없었지만 공이 축구공처럼 보일 정도로 집중력이 유지되고 있는 지금이라면 가능했다.
포심과 다른 회전을 하고 있는 공을 말이다.
‘커터는...!’
촤앗-!
공은 가운데 높은 곳을 찌르고 있었다.
하이 패스트볼을 연상케하는 코스였다.
하지만 하퍼는 속지 않았다.
다리를 내딛은 그는 몸쪽으로 휘어 들어올 공을 대비했다.
‘더 이상 통하지...!!’
끄그극-!!
손에 힘을 주자 배팅장갑의 가죽이 나무배트와 맞물리며 기괴한 소리를 뿜어냈다.
동시에 견갑골을 조이며 테이크백 동작이 만들어졌다.
하체는 바깥쪽으로 회전을 하는데 상체는 당겨졌다.
즉, 정반대의 움직임을 보이며 에너지가 축적되기 시작했다.
‘않아!!!’
부앙-!!
그렇게 모인 힘을 일순간에 방출시켰다.
상체를 회전시키며 있는 힘껏 배트를 돌리자 굉장한 소리와 함께 풍압이 일어났다.
그 순간.
공에 회전이 일어나며 하퍼의 몸쪽을 파고들었다.
‘걸렸어!!’
그것을 본 하퍼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담장 밖으로 사라질 공의 모습이 말이다.
그때였다.
휘릭-!
‘어?’
공에 다시 변화가 일어났다.
평소라면 아예 공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영역에 들어서 있는 하퍼였기에 볼 수 있었다.
공에 또 한 번 변화가 일어나는 걸 말이다.
‘한 번 더...’
하퍼는 급히 오픈스탠드를 만들며 스윙의 궤적을 바꾸었다.
‘몸쪽으로 들어온다고?!’
어떻게든 공의 움직임을 따라잡으려 했다.
그러나, 하퍼의 뛰어난 운동능력으로도 그 움직임은 따라잡을 수 없었다.
눈은 보고 있는데, 몸이 따라가지 않는 상황.
하퍼는 절망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부웅-!!
결국 배트는 허무하게 허공을 가르고.
퍽!
공은 토마스의 미트에 꽂혔다.
“스윙!! 아웃!! 게임 셋!!”
그리고 구심이 경기종료를 알렸다.
[하퍼선수 자세 무너지며 헛스윙합니다! 7구의 긴 승부 끝에 결국 웃는 건 정신우 선수였습니다!! 경기 끝! 이틀 연속 세이브를 수확하며 시즌 51세이브 달성에 성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