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훈수로 메이저리거 - 77화 >
* * *
8월 말.
각 리그에서 선두권과 하위권이 갈리며 점점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내셔널리그에서 가장 독보적인 건 LA다저스입니다. 8월 24경기를 치른 다저스는 15승 9패를 거두며 선두를 다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는 역시 코디 밸린저입니다. 이번달에만 10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홈런왕 레이스에 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시즌 후반기.
각팀의 성적을 종합해서 평가를 내릴 시기였다.
국내 역시 다양한 프로그램에서 리그 선두권들의 성적을 되짚어보고 있었다.
특히 많은 관심이 쏠리는 곳은 내셔널리그 동부지구였다.
[동부지구도 한 번 살펴보도록 하죠.]
[선두는 여전히 필라델피아 필리스가 유지하고 있습니다. 2위인 메츠와는 2게임차를 유지하고 있죠.]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군요.]
[일단 필리스의 투타밸런스가 잘 잡혀 있다는 게 가장 큰 강점입니다. 그리고...]
필라델피아 필리스.
시즌 중반부터 동부지구의 선두로 올라서면서 1위 자리를 수성하고 있었다.
슈퍼스타 브라이스 하퍼의 활약이 독보적이었다.
메이저리그 팬들은 3억달러의 투자가 드디어 성공했다고 말할 정도로 하퍼의 올 시즌 성적은 뛰어났다.
[올 시즌 하퍼는 MVP후보 중 한 명으로 밸린저와 경쟁을 하고 있죠.]
[그렇습니다. 그러고보니 각 선두권 팀에는 MVP 후보들이 한 명씩 존재하군요. 메츠 역시 끝판왕이 등장하며 필리스를 바짝 뒤쫓고 있습니다.]
[정신우 선수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현재까지 51이닝을 투구해서 49세이브를 올리며 평균자책점이 아직도 제로입니다. 이게 믿어지십니까? 시즌 후반에 접어들고 있는데, 여전히 평균자책점이 제로라는 게 말이죠.]
[저도 직접 중계를 하고 있지만 정말 믿어지지 않는 성적입니다.]
[세이브 성공률 백퍼센트 역시 믿어지지 않는 수치입니다. 만약 타자들이 이번 시즌 활약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면 MVP 역시 그의 것이 되었을 겁니다.]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상은 몇 가지가 있다.
그중에 MVP와 사이영상은 투타가 받을 수 있는 정점에 있는 상으로 취급한다.
MVP는 타자에게만 주어지는 상은 아니다.
투수 역시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승리기여도를 비롯해 여러 지표에서 매일 같이 경기에 나가는 타자가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투수가 받더라도 불펜투수가 받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선발투수들에게만 기회의 문이 조금이나마 열려 있었다.
그러나 올 시즌 타자들의 활약이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마이크 트라웃은 언제나처럼 트라웃다운 시즌을 보내고 있었다.
브라이스 하퍼는 2015년 거두었던 본인의 커리어하이를 갱신하는 성적을 기록중이다.
코디 밸린저 역시 이들과 경쟁을 이어가며 또 한 번의 MVP를 얻기 위해 시즌을 달리고 있었다.
그 외의 선수들 역시 압도적인 성적을 뽑아내고 있었다.
[타고투저 시즌이 이어지면서 타자들의 MVP수상이 확실시 되고 있는데요. 반대로 말하면 사이영상에서 정신우 선수의 경쟁자가 확실하지 않다는 소리가 되겠죠.]
[그렇습니다.]
타자들의 성적이 좋다는 건 반대로 말하면 투수들의 성적이 나쁘다는 걸 의미했다.
이번 시즌에서 60홈런이 나올 거냐 아니냐에 대한 갑론을박이 오가고 있을 정도로 홈런이 많이 나오고 있었다.
공인구의 반발력이 높아지면서 생긴 당연한 수순이었다.
[작년과 비교해서 메이저리그의 홈런 개수는 약 13퍼센트가 상승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타고투저가 심했는데, 타자들의 강세가 이어지고 있죠.]
[그렇습니다. 그러다 보니 투수들의 피홈런이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에서 유일하게 정신우 선수만이 피홈런이 제로입니다.]
[만약 이 성적을 이어간다면 사이영상 확보는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예. 앞으로 한 달동안 현재 성적을 유지한다면 사이영상 역시 가시권으로 둘 수 있습니다.]
사이영상.
아직 아시아 선수가 이 상을 받은 적은 없다.
류진현 선수가 2019년에 1위표를 받은 게 최초였을 정도로 동양인에게서는 거리가 있는 상이었다.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에게 주어지는 상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신우가 받게 된다면 이는 엄청난 업적을 남기게 되는 셈이었다.
당연히 한국과 심지어 일본에서도 신우의 성적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이왕이면 최다세이브 기록의 갱신도 이루었으면 좋겠군요.]
[그렇죠! 상은 탈 수 있을 때 타야 됩니다! 다다익선이라고 많을수록 좋거든요!]
9월.
신우에게는 가장 중요한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 * *
신우는 전용기를 타고 뉴욕을 떠났다.
‘이번 3연전이 가장 중요하다.’
8월이 끝났지만 아직 메츠는 2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1위에 올라 디비전시리즈에 진출하는 건 중요했다.
체력적인 안배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너한테도 이번 3연전이 중요함.]
‘그렇죠.’
8월.
결국 신우는 50세이브를 채우지 못했다.
최다세이브 기록인 62세이브까지 앞으로 13개가 남은 상황.
메츠의 잔여경기는 모두 28경기.
즉, 잔여경기의 절반을 등판해야 된다.
그러지 못한다면 도전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게 되는 셈이었다.
매 경기마다 중요해진 이유였다.
‘앞으로 한 달...’
기적과도 같은 루키시즌이 지나가고 있었다.
신우는 지금도 간혹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평균자책점의 가치가 낮아졌지만 시즌 전체를 통틀어 제로라니.
그리고 50이닝 무실점이라니?
거기다가 세이브부문 타이틀홀더를 유지중이었다.
이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타이틀 획득은 확정적이었다.
‘받고 싶다.’
처음에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타고 싶다.
그동안 노력한 것을 인정받고 싶었다.
상이라는 구체화된 것을 타서 모든 이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노력했다고.
열심히 해서 상을 탔다고 말이다.
[그게 당연한 거지.]
[예아.]
[프로선수라 해서 꼭 돈으로 모든 걸 보상받는 건 아니지.]
[상을 받으면 또 그것만의 맛이 있다니까.]
자신의 생각에 동조해주는 레전드플레이어들의 채팅에 안심을 했다.
[하지만 너무 깊게 생각하지마라.]
[그러다가 슬럼프 오는 경우도 있음.]
‘예.’
그들의 조언을 받으며 신우는 필라델피아로 향했다.
* * *
필라델피아 필리스는 여러모로 유명한 팀이다.
전 세계 프로스포츠 역사상 최초로 10,000패를 달성한 팀이란 오명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한국 메이저리그 팬들은 만패라고 그들을 불렀다.
하지만 단순히 오명만으로 유명해진 건 아니었다.
극성팬들 역시 그들을 유명하게 만든 또 하나의 요소였다.
얼마나 심하면 축구의 극성팬을 일컫는 홀리건이란 단어를 붙여 필리건이라고 부를까?
“메츠 새끼들을 죽여버려!!”
“오늘 그라운드에서 나갈 때 한놈은 기어나가게 만들어야 돼!!”
필리건들은 경기 초반부터 욕설과 응원을 섞어 메츠 선수들을 압박했다.
여전한 그들의 모습에 불펜에서 신우는 고개를 저었다.
‘이 동네는 오랜만에 왔어도 여전하네.’
[ㅋㅋㅋ 몇십년을 이어온 건데, 하루아침에 바뀌겠냐?]
[쟤네들은 옛날부터 저랬음.]
[옛날에는 더 심했지.]
[퀘이커스 시절에는 장난 아니었다.]
필라델피아 퀘이커스.
1883년부터 1889년까지 사용했던 이름이다.
그때의 이야기를 해줘도 실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했던 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란 소리다.
사실 이렇게 극성적인 팬들은 몇몇 구단에도 있었다.
그럼에도 필리스의 팬들을 두고 필리건이라 부르는 이유는.
“야, 이 개자식들아!! 너희들 눈은 뜨고 야구하냐?!”
“하퍼!! 너 오늘 뭐하냐?! 제대로 안 해?!!”
자신들의 선수들에게도 야유를 보낸다는 것이다.
필리스 출신의 대스타인 마이크 슈미트조차 필리건들에게 야유를 받아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였다.
명예의 전당 헌액자이자 필리스의 영구결번인 그가 학을 떼는 이유는 가을야구 때문이었다.
가을야구에 유독 약했던 그였는데, 그때마다 필리건들의 야유가 엄청나게 쏟아졌었다.
[이제 너도 저기에 올라가야 됨.]
[엌ㅋㅋ 멍꿀잼.]
필리스와의 3연전은 웬만하면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경기의 흐름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스코어 7 대 5.
난타전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박빙의 경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불펜이 바빠졌다.
[마인드컨트롤 잘 해라.]
매튜슨의 말에 신우의 시선이 관중석으로 향했다.
“야! 이 새끼야!!!”
“그걸 왜 놓치냐?!! 갈비뼈가 작살나도 몸을 날려서 잡아야지!!”
저 야유가 자신에게 쏟아질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위가 아파져왔다.
* * *
[9회말, 정신우 선수가 마운드에 오릅니다.]
신우가 마운드에 오르자 기다렸다는 듯 터져나왔다.
“우우우우우-!!!”
“꺼져라!!”
“비 오는 날 개새끼처럼 두들겨 패서 내려보내주마!!”
필리스 팬들의 엄청난 야유가 말이다.
[필라델피아 필리스 홈팬들의 야유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유명하긴 하지만 오늘은 유독 야유소리가 크군요.]
[메츠와 필리스의 사이를 생각해보면 이상할 게 없죠.]
지미 롤린스의 사건이후 앙숙이 된 메츠와의 대결에서 필리건들의 화력은 대단했다.
그들의 야유를 들으며 마운드에 서는 투수들이 불쌍할 지경이었다.
[화끈하네.]
[우리 시누 지렸음?]
‘설마요.’
신경이 거슬리긴 한다.
하지만 이곳에 서는 게 처음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 익숙함을 가지고 있을 수 있었다.
[조심하는 게 좋다. 오늘은 중심타선과 붙게 되는 거니까.]
‘알겠습니다.’
매튜슨의 말대로였다.
[9회말, 필리스 타선이 무척 좋습니다. 선두타자가 2번부터 시작됩니다.]
[특히 3번 타순인 브라이스 하퍼 선수와의 대결은 신중해야 됩니다.]
브라이스 하퍼.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타자로서 필리스와 13년 3억 3천만달러의 계약을 맺은 선수다.
그동안 필리스의 대표적인 타자로 활약했지만 연봉에 준하는 활약은 이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작년부터 점차 살아나던 타격감은 올해 대폭발했다.
[하퍼 선수는 올 시즌 밸린저 선수와 함께 60홈런을 가시권에 둔 상태입니다. 거기다 타율과 OPS, 출루율, 장타율이 모두 5위 안에 랭크가 되며 본인의 커리어하이 시즌을 거두고 있습니다.]
50홈런 넘어도 메이저리그에서 대단한 이슈였다.
그런데 60홈런이라니?
이로 인해 각 언론에서는 두 선수를 집중조명하고 있었다.
그런 두 선수 중 한 명과 상대하게 됐다.
[정말 기대되는 승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이 대결을 손꼽아 기다렸다.
신우와 하퍼의 대결.
데뷔시즌이었던 작년에 한차례를 제외하고 두 선수가 만난 적은 없었다.
같은 지구라고는 하지만 마무리투수가 특정타자와 마주치는 일은 적었다.
특히 신우는 대부분의 이닝에서 3타자만 상대했다.
타순이 맞지 않는다면 특정타자와의 대결은 자주 일어나지 않았다.
근 1년만의 대결.
그 사이 하퍼는 MVP시즌을 보내는 중이고 신우는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클로저가 됐다.
창과 방패의 대결.
이 대결이 어떻게 끝날지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 * *
뻐억-!!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외곽을 날카롭게 찌르는 커터.
타자는 그 자리에 굳은 채 움직이지 못했다.
보더라인을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공에 구심의 손은 그대로 올라갔다.
[정신우 선수 첫 타자를 5구만에 돌려세웁니다!!]
[커터의 무브먼트가 정말 좋군요. 몸쪽을 찔러오다가 인 도어성으로 보더라인에 걸쳤습니다.]
[오늘 구심인 찰스 머핀이 몸쪽을 후하게 준 것을 정확히 간파한 피칭이었습니다.]
[토마스 선수의 리드가 빛을 발하는군요.]
카메라가 타석으로 들어오는 선수를 비추었다.
[그리고 타석에 필리스의 3번 타자!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선수인 브라이스 하퍼가 들어섭니다!]
신우는 하퍼에게서 등을 돌리고 허리를 숙여 로진을 손에 묻혔다.
“후우...”
[긴장 됨?]
‘조금요.’
[타자가 누구인지 신경 쓸 필요가 있나?]
[그냥 조금 잘 치는 놈이 들어왔구나, 하면 되지.]
조금 잘 치는 놈.
그러고보니 그랬다.
브라이스 하퍼는 분명 위대한 타자다.
하지만 그와 함께 하는 이들은 그보다 더 뛰어난 이들이었다.
굳이 이름값에 주눅이 들 필요는 없었다.
‘그러네요.’
신우가 마운드에 서서 상체를 숙였다.
‘바깥쪽.’
코스를 정하고.
‘포심.’
구종을 결정했다.
고개를 끄덕인 신우가 피처플레이트에 발을 걸쳤다.
그리고 다시 호흡을 뱉었다.
“후우...!”
그때였다.
‘이건...’
주위가 어둠으로 물들어갔다.
당황할 필요는 없었다.
최근에도 경험을 했던 것이었으니 말이다.
[와인드업 포지션에 들어가는 정신우 선수! 양팔을 들어올리고...!]
중계카메라가 신우를 잡았다.
양팔을 들어올려 와인드업을 하는 그의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
캐스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웃고 있습니다!!]
화면에 비치는 신우가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