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0화
집으로 돌아온 일상은 평화로웠다.
델테르가 보낸 서신에 의하면 벨루아 가문의 명예는 곧 회복될 것이라 했다.
더군다나 공을 치하해 새로운 작위까지 하사해 준다고 알렸다.
“아버지, 이거 어때요?”
“제법 어울리네.”
“그런데 오늘도 바쁘신 거죠?”
“오늘은 함께 있을 예정이다. 밥이나 한 끼 하자꾸나.”
웬일이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문에 대한 적의가 사라졌으니 그것으로 한발 내디딘 것이다.
사교계에서도 나와 관계를 맺으려는 이들이 많아졌다.
백작에서 공작으로 승격되었다. 더군다나 관직까지 주었다.
벨루아 가문이 그동안 억울하게 당해 온 억압과 명예 손실에 대한 보상이었다.
재무 대신.
아마도 리온과의 관계를 생각해 쥐여 준 것이리라.
이게 있는 한 황실과의 관계는 우호적으로 쭉 가게 될 테니까.
신전과 마탑의 균형. 그리고 황실과 귀족과의 균형.
이 모든 게 이로써 맞춰지게 된다.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저도 그래요.”
아버지는 정보상을 그대로 유지했다. 이제 와 그만두기에는 이뤄 놓은 일들이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당분간 정보상은 헤센 경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는 보좌관에서 벗어난 것으로도 즐거워 보였다.
‘그동안 많이 쌓였나 봐.’
나는 아버지와 밥을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오늘은 셀리느가 있는 곳에 갔으면 한다.”
“……어머니가 있는 곳이요?”
“그래,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곳이지.”
나는 뜻밖의 제안에 다소 놀랬다.
한 번도 아버지의 입에서 어머니를 보러 가자는 말이 나온 적은 없었다.
“이제 볼 낯이 생겼구나.”
그동안 가고 싶어도 못 갔던 게 아닐까.
어쩌면 제일 힘든 시간을 보냈던 사람은 아버지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활짝 웃었다.
“좋아요.”
아버지와 손을 잡고 어머니 앞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했다.
“좀 잘 먹어라. 요즘 들어 더 야윈 것 같으니.”
에드가는 내 접시 위로 고깃덩이를 내려놓았다.
“……너무 많아요.”
“많지 않아. 너는 좀 더 잘 먹을 필요가 있어.”
단호한 에드가의 말에 나는 하는 수 없이 고기를 입에 넣었다.
입에 사르륵 녹아내려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웃는 모습을 본 에드가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이렇게 평화로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는 것이 여전히 믿기진 않았지만.
이 또한 내가 이뤄 낸 일이었다.
* * *
나는 가만히 꽃이 핀 곳에 있는 묘비를 보았다.
정원이 우거진 곳, 그리고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방어벽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옆에는 데펠로아 델리샤도 함께 있었다.
“제니스도 다음에 데리고 와야겠어요.”
“그래, 오늘 가면 알려 줄 생각이다.”
아버지와 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어머니가 잠들어 있는 곳을 처음 마주한 기분은 먹먹했다.
실감이 나지 않았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눈물을 애써 삼켜 냈다.
“흐, 흐으…….”
슬픔이 몰려왔다.
미안한 감정, 그리고 그리운 감정이 뒤섞여 휘몰아쳤다.
고개를 푹 숙이고 한참을 울었다.
아버지는 내 옆에서 묵묵히 묘를 응시했다. 울고 있지 않았지만, 참고 있으리라.
“아버지. 저 먼저 마차에 가 있을게요.”
나는 자리를 비켜 주기로 했다.
아버지 또한 어머니와 할 이야기가 많았을 것이므로.
그래서 에드가를 남겨 둔 채 마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나는 창을 통해 아버지를 조용히 응시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묘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흐느껴 울고 있었다.
* * *
감정을 추스른 아버지는 눈시울이 발개져 있었다.
그렇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나 역시 모른 척했다.
“황실로 가는 거죠?”
에드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니스와 델테르의 결혼이 있었다.
이해관계가 얽혀 있긴 했지만, 둘은 새로운 감정을 느낀 듯했다.
그들은 서로에게 조금씩 다가가고 있었다.
“그 녀석은 뭐가 그리 바빠서 늦는다고?”
“정신없을 때잖아요. 마탑 일도 많이 밀렸고, 신전도 상대해야 하고.”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또 뭐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저러는 건지.
“그래, 네가 좋다고 하니 두고 본다만.”
에드가의 표정을 보니 리온이 많이 노력해야 할 것 같다.
얼마 전의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해서인지, 결혼식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백성들에게 많은 곡식과 축복을 나눠 준다.
좋지 않은 일을 더 좋은 일로 덮는 형식인 셈이다.
많은 인파가 모여 북적였다.
‘흐음, 리온이 나를 찾으려면 꽤나 고생하겠는데.’
나는 사람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게다가 떡하니 옆에 아버지까지 있으니 곁에 다가오기도 눈치가 보일 것이다.
델테르와 제니스의 등장과 함께 모두의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을 보니 감회가 남달랐다.
“……보기 좋네요.”
“뭐, 나쁘지 않구나.”
“이럴 땐 좀 좋은 말을 해도 괜찮은데.”
“잘 어울리네.”
에드가는 못 이기는 척 동조했다. 그래 저게 어딘가.
나는 웃으며 아버지에게 팔짱을 꼈다.
“그 팔짱, 잘못 낀 것 같은데.”
“깜짝이야!”
나는 화들짝 놀라 옆을 보았다.
언제 온 건지 리온이 나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좀 늦었지.”
“좀이 아니라 많이.”
에드가의 말에 리온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지는 아실 텐데요.”
“글쎄다.”
둘 사이의 팽팽한 기류가 오갔다.
나는 중재하며 손을 휘휘 저었다.
리온과 아버지의 팔에 각각 팔짱을 꼈다.
“자! 이러면 되죠? 좋은 날 싸우지 마세요.”
마탑의 일이 많아진 것은 아버지가 하도 들쑤시고 다녀서다.
온갖 부패의 뿌리를 뽑겠답시고 여기저기에 요구하는 게 많았다.
갱생을 시켜 놔도 너무 시킨 모양이다.
“피곤하지?”
나는 살짝 리온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아니, 너 보니까 하나도 안 피곤해.”
“거짓말. 잠도 하나도 못 잔 얼굴인데.”
“그럼 나중에 재워 주던가.”
그의 말에 나는 픽 웃었다.
“그것도 카벤 님이 알려 준 거야?”
“……아니.”
리온은 멋쩍게 웃으며 시선을 회피했다. 가르쳐 준 거 맞네, 뭐.
아무래도 다음에 만나서 대체 뭘 가르치는지 물어야 할 것 같다.
“책으로 배운 거야.”
“그 책 태워 버려야겠어.”
“와, 너무하네.”
리온은 상처 입은 것처럼 나를 빤히 보았다.
“그렇게 별로야?”
“응,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충분해.”
여전히 리온은 제 얼굴의 진가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다.
“내가 뭐라 그랬어. 거울 매일 하루에 한 번은 보라고 했잖아.”
“오늘도 보고 왔어.”
“……역시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에 감사할 줄을 몰라.”
나는 혀를 내둘렀다.
리온은 제 얼굴이 얼마나 잘생겼는지 아직도 못 깨달은 모양이다.
그 자체만으로도 개연성이 넘쳐 나는데 그걸 모르다니.
아니지, 몰라서 다행인 건가……?
하지만 이따금 보면 제 얼굴을 굉장히 잘 써먹는 것 같단 말이지.
“와아아아!”
사람들의 환호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빛이 쏟아져 내렸다.
제니스의 힘에 의해 축복이 곳곳에서 눈처럼 흩어지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예쁘다.”
“응, 예뻐.”
“하늘을 봐야지.”
“네 눈동자에 비친 걸 보고 있어.”
지금처럼 말이다.
그런 아련한 눈빛과 얼굴로 쳐다보면서 그런 말을 하면…….
그 누구라도 눈을 마주치기 어려울 터.
심지어 귀에다가 이야기하는 걸 왜 이리도 좋아하는지!
“엘르, 왜 내 시선을 피해?”
리온의 속삭임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이것 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천진난만한 눈동자로 커다란 눈을 깜빡이는 거.
정말 요망하기 짝이 없다.
나는 눈을 살며시 뜨며 리온을 쳐다보았다.
그럼에도 리온은 여전히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엘르, 엘르.”
그의 기분 좋은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곧이어 리온의 목에 있는 문양이 빛났다.
조금은 보채는 듯이, 안달 나는 듯이 나를 불러 대는 모습에 져 줄 수밖에 없었다.
“응, 리온.”
다시금 마주한 시선에 가슴이 콩닥거리며 뛰었다.
서로의 심장이 어디에 있는지, 잘 뛰고 있는지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
맞닿은 살은 따스했고, 서로 쳐다보는 눈빛은 뜨거웠다.
사르륵 녹아내리는 미소에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느껴졌다.
펑, 퍼엉.
불꽃이 터지며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버지의 팔이 느슨해졌을 때 나는 자연스레 팔짱을 낀 팔을 빼어 냈다.
리온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사람들을 가볍게 헤치고 테라스로 간 그가 가볍게 나를 들어 올려 끌어안았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고 둘만 있는 것처럼 조용했다.
이제야 다른 곳에 시선이 쏠리지 않았다. 오로지 서로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다.
“엘르.”
“리온.”
우린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마주한 시선을 천천히 교환하며 씩 웃었다.
거울을 보는 것처럼 나와 리온의 행동은 비슷했다.
눈을 마주치고 미소를 머금으며, 이내 서로에게 끌리듯 가까워졌다.
두 얼굴이 지척에 닿았을 때.
“사랑해.”
“사랑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린 마음속에 깊이 담아 두었던 말을 꺼냈다.
가볍게 닿은 콧잔등과 함께 미소가 만개했다.
마음 편히 눈치 보지 않고 이 말을 내뱉기까지 너무도 먼 길을 달려온 느낌이 들었다.
운명이 아니라 생각했고, 운명은 아니었다.
정해진 필연적인 법칙은 존재하지만, 누구에 의해서 정해졌느냐가 중요하지 않을까?
스스로가 정해 둔 울타리는 아니었을지.
의지만 있다면 못할 것은 없다.
안주하지 않고 제 신념을 믿고 나아간다면 스스로에겐 배신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로 인해 얻은 결말은 얼마나 달콤한가.
가령 예를 들자면, 내가 얻게 된 리온이란 결말처럼.
<흑막이 나를 반려로 착각한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