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9화
“이제 좀 괜찮은가 보구나.”
에드가는 잦아드는 내 울음소리에 미소 지었다.
“네, 괜찮아요.”
힘없는 목소리였지만,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자리를 비켜 주마.”
에드가는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리온을 보며 말했다.
그가 방을 나가고 나서야 리온은 내게 다가왔다.
“많이 놀랐어?”
“……당연하잖아.”
문양이 어떻게 사라진 거지?
그토록 노력을 해도 사라지지 않았는데. 제니스도 리온도 그 누구도 다치지 않고 사라지다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주의 힘이 상쇄되면서 느슨해진 것 같아.”
“그렇다고 해서 문양이 사라지진 않아.”
“맞아. 하지만 그동안 하지 않았던 것을 했었지.”
“……응?”
나는 리온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 않았던 일이 뭐가 있을까.
그의 손길이 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감싸 안았다.
“내 진심이 통했을지도 모르지. 마치 문양처럼 새겨지길 바랐던 각인 말이야.”
“……뭐?”
나는 그제야 황급히 목을 확인했다. 여전히 옅어지지 않고 선명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네.”
붉은색이어야 하는 자국이 왜…… 다른 색처럼 보이는 걸까.
리온은 그런 나를 보며 셔츠의 단추를 하나둘 풀었다.
“리온?”
천천히 드러나는 리온의 몸과 함께 그가 내 손을 잡아 제 목에 가져다 댔다.
“여기, 익숙한 게 보이지 않아?”
그의 말대로 똑같은 자리에 금빛으로 빛나는 문양이 보였다.
“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제니스가 델테르를 선택함으로써 리온의 문양이 정말로 사라진 건가.
하지만 선택을 하는 것만으로 풀릴 것 같진 않았다.
“언제부터야?”
리온은 나를 품에 끌어안으며 말했다.
“오늘 아침에 문양이 사라졌어.”
“……오늘 아침?”
그 말은 황실로 가기 전에 이미 사라졌다는 말인데.
“그럼, 목에 문양이 생긴 건……?”
“그것도 비슷해.”
“말도 안 돼.”
정말로 가능한 일이었다니.
“저주가 흐트러져서 더 강한 운명을 받아들이려 했다면,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야.”
리온의 말대로 문양은 서로의 강한 이끌림을 대변한다. 운명이었다.
다른 강한 이끌림을 받아들였다면 희박한 가능성으로 새로운 문양이 생기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기적에 나는 여전히 시선을 떼지 못했다.
“믿기지가 않아.”
“내 저주가 풀린 것도 그랬었지.”
리온은 씩 웃었다.
“엘르, 이제 네가 내 반려야.”
그토록 염원했던 일이 드디어 벌어진 것이다.
절대로 이뤄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일이었다. 나는 울컥 가슴 속에서 뜨거운 감정이 치솟았다.
“내가 말했지.”
그의 나른하게 내려앉는 눈꺼풀과 함께 서서히 얼굴이 가까워졌다.
“나를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그래, 리온은 늘 그 말을 했다.
거짓말처럼 정말로 그럴 것 같은 예감이 언제나 들었었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된 지금 상황에 자꾸만 웃음이 났다.
“내 반려는 너뿐이었어. 처음부터 끝까지.”
감겨진 눈과 함께 리온의 숨결, 그리고 달달한 감촉이 느껴졌다.
부드럽게 파고들어 확인이라도 하듯 입 안을 유영했다.
서서히 차오르는 고양감에 나는 리온의 몸 위로 올라탔다.
그의 목에 손을 두르고 호흡을 맞췄다.
“리, 온…….”
하아, 호흡이 조금씩 거칠어져 갔다.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했다.
그냥 서로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이미 알 수 있었다.
눈빛만 봐도 느껴졌다.
리온과 나는 지금 서로가 필요했다. 더욱 깊이, 더 가까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모든 것을 표출해 내고 싶은 욕망만이 가득했다.
사랑하는 내 리온. 하나밖에 없는 내 반려.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결국 내 곁에 남아 있었다.
스르륵.
옷깃을 스쳐 살갗을 매만지는 손길에 솜털이 곤두섰다.
부드럽고 천천히, 내 모든 것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손으로 매만졌다.
“엘르, 이제야…… 드디어.”
내가 너의 것이 되었어.
그가 작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그저 말 한마디에도 저릿한 감각이 느껴져 힘이 들어갔다.
“하아…….”
들뜬 숨과 함께 나와 리온은 점점 서로에게 얽혔다.
더 이상의 방해는 없었으므로.
* * *
“잠에서 깼어?”
“으음……, 리온.”
나는 그를 꽉 끌어안았다.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눈을 뜬다는 것은 정말로 기분 좋은 것이구나.
리온은 가만히 내 이마에, 그리고 볼에 입을 맞췄다.
“일어나야 해.”
“조금만 더 자면 안 돼?”
“그랬다간 백작님이 화내실걸.”
“아!”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벌떡 일어났다.
“아버지는?”
“황궁에 가셨어. 우리도 가야 해.”
“그렇구나…….”
황제의 처분이 남아 있었다. 그가 해 왔던 모든 일은 세간에 알려졌다.
내 어머니인 셀리느 델리샤의 억울한 죽음, 그리고 데펠로아의 비극 역시도.
제니스에 대한 평판은 곧바로 뒤바뀌었다.
무엇보다 델테르와 그녀의 로맨스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듯했다.
정말로 제니스가 델테르에게 마음을 준 건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그를 선택한 것은 맞았다.
그로 인해 내가 리온과 함께 할 수 있었으니까.
“도와줄게.”
리온은 내 준비를 도왔다.
코르셋 끈을 조여 주는 척하며 목덜미에 몇 번이나 입을 맞췄다.
“흐……리온!”
황급히 그를 밀어내자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아쉬워.”
그는 마치 목줄이 풀린 짐승처럼 보였다.
정말, 이러면 곤란한데.
그러면서도 내 입꼬리는 내려갈 기미가 없었다.
“이러다 늦겠어.”
리온은 내 살에 코를 박은 채 호흡을 천천히 내쉬었다. 결국 이긴 것은 나였다.
그를 달래는 것은 힘들었지만 일이 끝나진 않았으니까.
* * *
리온과 함께 황궁 앞에 도착했다.
마차도 필요 없었다.
나는 황궁을 멍하니 보았다.
“……생각보다 조용하네.”
“아직 정해지지 않아서 그래. 다들 고민이 많겠지.”
워낙 많은 일을 저질렀던 터라 판결할 것도 없었다.
황제란 이름으로 무자비하게 다른 이들을 억압했던 일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무엇보다 벨루아 가문도 연관되어 있는 거잖아.”
“응. 어머니가 기뻐하셨으면 좋겠다.”
“그럴 거야.”
리온과 나는 손을 마주 잡은 채 안으로 들어섰다.
황실 재판장엔 귀족들과 함께 백성들까지 보였다.
“저기 아버지도 있네.”
증인으로 참석하신 모양이다. 우리 가문의 억울한 일을 풀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다.
“황제 테르비온은 제 아내의 언니인 데펠로아 델리샤를 잔인무도하게 인권을 무참히 짓밟았습니다.”
에드가의 말에 황제는 웃었다.
“나는 데펠로아를 사랑했다. 그녀 또한 나를 사랑했거늘.”
철면피한 황제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게 소리쳤다.
“용서도 자비도 있어선 안 될 것입니다. 벨루아 가문의 명예를 걸고 이 일을 그냥 넘어간다면 끝까지 싸울 겁니다.”
에드가는 단호했다.
이날을 얼마나 고대해 왔던가.
나는 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죄는 씻을 수 없습니다. 다른 이들의 무고한 희생을 위해서라도 이는 묵인할 수 없다고 판단됩니다.”
제니스는 똑바로 테르비온을 보았다.
“아비에게 칼을 겨누겠다는 말이더냐.”
여전히 테르비온은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저를 향한 많은 이들의 경멸 어린 시선에도 굳건했다.
“아들아! 나는 너를 위해서 이 모든 것을 다 준비한 것이란다!”
델테르는 그 말에 고개를 돌렸다.
“판정하겠습니다.”
황실 법관이 모든 이들의 증언을 토대로 죄인 테르비온을 보았다.
여론은 이미 황제에게 등을 돌렸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법관의 입을 빤히 보았다.
리온과 잡은 손에 땀이 흘렀다.
“황제 테르비온의 죄는 용서하기 어려운 바. 모두의 만장일치로 사형에 처한다.”
유배로 끝이 난다면 직접 가서 죽일 생각이었다.
내가 아니라도 그를 죽일 사람은 많았을 터.
“더불어 죄인 테르비온 보니타를 도와 지금까지 묵인했던 황후 아르베아 론드는 북방에 유배할 것을 선고합니다.”
법관의 말에 가만히 있던 황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건 말도 안 되네! 나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야!”
그녀의 날카로운 음성이 재판장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동조하는 이들은 없었다.
누구보다 잔인하게 황제의 곁에서 다른 이들을 괴롭혔던 이들을 잊지 않았기에.
“델테르 내 아들아. 이 어미를 이대로 보내겠다는 것이냐!”
황후의 외침에도 델테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폐위된 황제 대신 자리에 오른 델테르는 무표정한 얼굴로 제 부모를 응시했다.
“모든 재판은 끝이 났으니 죄인들을 호송하라.”
그의 목소리에 근위대가 움직였다.
나는 그들의 퇴장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황제는 모두가 보는 앞이 아닌 독방에 갇혀 독약을 먹을 예정이었다.
그게 델테르의 마지막 아비에 대한 배려이리라.
모든 것이 끝난 공간은 어떠한 아쉬움도 남지 않았다.
그저 먼저 간 이들에 대한 애도만 남아 있을 뿐.
제니스는 끌려가는 황제와 황후를 보며 옅게 웃었다.
드디어 그녀도 나도 모두가 해방된 것이다.
정해진 운명에서, 그리고 억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리온은 내 어깨를 감싸며 나를 쳐다보았다.
시선이 마주하자 안도감에 미소가 번졌다.
정말로 끝이 난 것이다. 더는 죽음의 공포에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다.
내 삶을 즐기며 나아가는 일만 남았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