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8화 (118/120)

제118화

“대체 이게 무슨 일이더냐!”

황제는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제가 계획한 일과 다르게 돌아가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에드가는 곧장 엘르를 안아 들었다. 그녀는 힘겹게 말을 이어 나갔다.

“저를, 헉. 다짜고짜……공격, 하였습니다.”

엘르의 말에 모두가 숨을 죽이고 황제를 응시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당장 의원을 불러 치료하라 이르겠다.”

에드가는 슬픔에 잠긴 목소리로 반문했다.

“저는 아까의 말을 철회하겠습니다. 제 딸이 폐하의 친위대에게 공격을 당했는데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에드가 백작! 아까는 분명 나와 함께 간다고 하지 않았소!”

황제는 분노하며 소리쳤다. 한순간에 사람이 태도를 돌변하다니.

“그건! 제 자식에게 칼을 들이대지 않았을 때의 이야깁니다.”

에드가의 말에 귀족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희들은 폐하의 편에 서려 했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다른 생각을 하고 계셨던 것 같군요.”

“백작은 말을 조심하시오! 그 말은 지금 내가 그대들을 죽이려 했단 말인가?”

그는 조소를 머금었다. 아까까지 완벽한 황제의 편이었던 에드가가 반대쪽에 선 것이다.

“혹, 반역이라는 허무맹랑한 말을 퍼뜨려 견제되는 가문들을 제하려 하신 건 아니십니까?”

“그런!”

황제는 분노했다. 자신이 계획한 일이라니.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엘르는 가만히 에드가의 품에서 눈을 감은 채 귀를 기울였다.

‘균열이 일어나고 있어.’

이때 틈을 파고든다면 와해될 것이다.

“친위대를 불러와라, 지금 당장!”

“친위대에게 당한 제 자식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 그런!”

황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황후! 황후는 어디에 있지? 황태자를 당장!”

“폐하, 이게 다 무슨 말인가요?”

귀족 중 하나가 바닥에 떨어진 신문을 주워들었다.

그곳에 떡하니 적혀 있는 제니스와 델테르의 관계에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남매……가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리 줘 보시오!”

소렌디아 가문의 사람이 신문을 낚아채며 글을 읽어 내려갔다.

“제니스 아벨 보티아 황녀가…… 황제의 핏줄이 아니라니.”

“그건 잘못된 내용이네! 어떻게 내 아이가 아닐 수가 있겠는가!”

황제는 테이블을 내려쳤다.

“그럼 두 사람이 반려인 것은 말이 되는 일입니까?”

떡하니 기사에 문양까지 나와 있으니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러나 황제는 제니스의 반려가 리온인 것을 알고 있었으니 믿지 않았다.

“당장 이 기사를 쓴 자를 데려와서 심문하겠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토록 찾던 델테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피를 뒤집어쓴 사신과도 같았다.

황제는 그토록 찾았던 황태자를 보자마자 곧장 자리를 박차고 다가갔다.

“델테르, 이게 다 무슨 일이더냐!”

“말 그대로입니다. 제니스의 반려는 제가 맞습니다.”

“그럴 리가. 분명 너도 들었으니 기억할 테지. 제니스의 입에서 직접 나온 그 말을.”

“증거가 없잖습니까.”

증거…….

그 말에 황제는 호탕하게 웃었다.

“언제부터 짐이 그대들에게 증명을 해 보여야 하는 위치였지?”

황제의 노기 어린 표정에 귀족들이 움찔 몸을 떨었다.

“어차피 아버지께서도 다 알고 움직이셨지 않습니까.”

“아들아, 나는 네 애비다. 설마 반역자들과 함께 움직이는 것은 아니겠지.”

“반역이 아닙니다.”

델테르는 황제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건 대의입니다. 모두를 위한. 썩은 건 도려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곧이어 테이블 위에 서류를 던졌다.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해오신 모든 일들입니다.”

가문의 대표들은 천천히 서류를 살폈다. 그중에는 그들의 일도 쓰여 있었다.

황제의 필체로 말이다.

언제든 그걸 이용해 등에 칼을 꽂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엘르, 괜찮느냐.”

“네……. 괜찮아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

엘르는 부축을 받고 바닥에 딛고 섰다.

“황제 폐하께서는 저희들을 하나둘 제거할 생각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럴 리가!”

엘르의 말 한마디에 귀족들은 혼란에 빠졌다.

만약 벨루아 가문을 처리했다면, 그다음에는 누구란 말이지?

이곳에 모인 이들을 하나둘 제거할 생각이었다면.

“갑자기 만찬을 연 게 이상해서 급히 왔더니…… 황제의 친위대가 저를…….”

엘르는 필사적으로 연기했다.

그리고 짠 듯이 제니스가 신관들과 함께 들이닥쳤다.

“저와 모든 이를 속이고 신을 능멸한 죄. 황제 테르비온 보니타를 벌하러 왔습니다.”

그녀의 말에 황제가 얼빠진 얼굴을 했다.

모두의 화살이 제게 향해 있었다.

“황후! 황후가 내 증인이 되어 줄 것이다.”

“어머니를 데려와라.”

“예, 알겠습니다.”

델테르의 개가 황급히 모습을 감췄다.

귀족들은 꿀꺽 주변을 살폈다.

‘아무래도 황제가 판 함정에 걸린 것 같은데.’

그들은 재빨리 각자의 호위 기사들을 소환했다.

“이렇게 되었으니 문양을 보여 드리면 되겠군요.”

델테르는 제니스와 함께 액세서리를 빼어 냈다.

그러자 두 사람의 손목에는 금빛 문양으로 새겨진 달 모양이 보였다.

“세상에……!”

정말 친남매였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제니스는 신의 대리자였다. 그렇기에 황제가 모두를 속였다는 사실은 틀림없는 사실이 되었다.

“어떻게 너희가 나를 속일 수가 있느냐!”

황제는 핏대를 세운 채 소리쳤다.

“속인 적 없습니다. 그저 말을 하지 않았을 뿐.”

델테르는 황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제니스는 떨리는 손을 겨우 진정하고 고개를 쳐들었다.

“그토록 기다렸던 어머니가 왔군요.”

황후는 만찬실로 들어서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폐하, 저는 더는……더는 못 하겠습니다. 아이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은……흐윽.”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제발 죽이지 말아 주세요. 살려 주세요……. 폐하, 시키는 일은 다 했지 않습니까.”

“황후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황제의 호통에 황후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흐윽, 이 아이들은 죄가 없다. 나는 황제의 폭력과 억압에 어쩔 수 없이 동참했네.”

황후의 자백에 모두의 얼굴에 경멸이 서렸다.

“이 모든 것은 황제의 욕심에서 나온 일이네! 루비온 가문이 멸한 게 과연 저주 때문이었으리라 보는가?”

멸문하기 전 만해도 막강한 힘을 가졌던 가문이었다.

저주로 인해 스스로 멸문했다고 하기엔 그 힘이 너무도 컸다. 그래서 다른 몇몇 이들은 의문을 표했다.

이제야 모든 것이 맞아떨어진 듯 대표들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었다.

“그 입 닥치지 못할까! 반역이라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황제는 검을 빼어 들었다. 핏발이 서 충혈된 눈과 함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이미 알아차렸을 것이다.

돌이키기엔 너무 늦게 깨달았다고.

“아버지, 이만 물러나실 때가 된 것 같습니다.”

“하, 하하! 내가 이대로 물러설 것 같으냐. 그래, 리온 데이비스 그놈을 데려오거라!”

황제의 말에 귀족이 동의했다.

“중요한 일이니 확인은 해야겠습니다. 그래야 정당성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엘르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리온의 손목에는 분명 제니스와 똑같은 문양이 있을 터.

그게 발각이 된다면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 있다.

안 그래도 그의 저주로 인해 사람들이 불안에 떨고 있는데.

한 번도 있지 않았던 케이스가 그인 것을 알게 된다면, 제국의 흥망성쇠가 그에게 달렸다며 몰고 갈 테지.

마치 마녀사냥처럼.

“리온은 제 약혼자입니다.”

엘르는 이내 문을 나서려는 모든 이를 제지했다.

“모두를 위한 일이니 비켜 주십시오.”

델테르를 보니 가만히 있었다. 그도 일이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던 건가?

나는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제니스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마치 저를 믿어 달라는 표정을 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제 끝이 보이는데 또다시 되풀이해야 하는 건가.

“엘르, 괜찮아.”

등 뒤로 들리는 익숙한 음성에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그의 뒤로 마법사들이 즐비해 있었다.

“저를 찾으실 것 같아 왔습니다.”

“그래, 저놈이 이 모든 일의 원흉이다! 리온 데이비스 루비온 가문의 저주를 이어받은 자.”

황제의 말에 귀족들이 흠칫 뒤로 물러섰다.

“저주라……그거라면 이미 벗어났습니다. 폐하.”

똑바로 황제를 응시하며 말을 내뱉는 리온의 태도에 모두가 안도했다.

“이게 궁금하다고 하시는 것 같아 보여 드리겠습니다.”

리온은 무표정한 얼굴로 제 손목에 있는 액세서리를 빼어 냈다.

투둑-

바닥에 떨어지자 큰 파열음이 허공에 맴돌았다.

쿵.

엘르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쿵, 쿵.

안 돼. 이렇게 되면 리온이…….

리온은 엘르의 손을 꽉 잡았다.

그는 모두에게 보란 듯이 손목을 내보였다.

“죄송하지만, 제겐 어떠한 문양도 없습니다.”

“뭐……?”

화들짝 놀란 엘르가 리온의 손목을 보았다.

정말로 아무런 문양도 없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 일이지? 엘르는 충격에 빠졌다.

“자, 그럼 모든 의문이 풀렸으니 정당성은 마련이 된 겁니까?”

“이, 이……!”

황제는 저를 붙잡는 기사들을 뿌리치려 했다.

그러나 곧이어 저를 옭아매는 강한 힘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으윽!”

“오늘부로 황제 테르비온 보니타는 신전의 감옥으로 이송하겠습니다.”

제니스는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부동의 한다면 지금 당장 의견을 표출하세요.”

그녀의 음성에 신성력이 느껴졌다. 가문의 대표들은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황제가 풀려난다면 이곳에 있던 모든 이들의 목이 달아날 것이다.

선택권은 없었다.

“동의합니다.”

그 말을 들은 제니스는 힘을 이용해 황제를 속박했다.

신관들은 황제의 신변을 인수받은 후 만찬실을 벗어났다.

“모두 놀란 얼굴이네요. 두려워할 필요 없어요. 그대들이 지은 죄가 없다면 말이죠.”

제니스는 이내 델테르를 한 번 쳐다본 후 빠져나갔다.

“그럼, 정리를 한 후 다시 회의를 소집하겠다. 그때 처분에 대해서 논의하도록 하지.”

델테르의 말에 귀족들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그 보다, 에드가 백작님께선 알고 계셨습니까?”

“저도 몰랐습니다. 그랬다면, 제 딸이 이렇게 되는 걸 두고 보고 있진 않았겠죠.”

에드가는 엘르에게 다가가 꽉 끌어안았다.

“엘르.”

다독이는 손길에 엘르는 품에 얼굴을 묻었다.

“이제 다 끝났다.”

그 말 한마디에 울음이 터져 나왔다. 무슨 이유에서 눈물이 나는지는 모른다.

그저 울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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