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7화
똑똑똑.
“아가씨, 저 디리아예요.”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벌써 아침이 되었다고?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리온이 잠을 자고 있었다.
“리온, 일어나.”
황급히 그를 깨웠지만, 미동도 하지 않았다.
“디리아가 왔어. 빨리 일어나야 해.”
나 혼자 조급해져 침대에서 벗어나 리온을 흔들었다.
“걱정 마.”
“뭐야! 깨어나 있었잖아.”
또 나를 놀리려고 자는 척했구나.
나는 리온의 가슴팍을 세게 치며 씩씩거렸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건 채 눈을 떴다.
“디리아가 들어오는 순간 나는 없을 테니까.”
“뭐?”
그런 거면 미리 말이라도 해 달라고.
그리고 정말 디리아가 문을 연 순간 리온은 사라졌다.
“일어나 계셨네요. 빨리 준비하셔야 해요.”
“준비라니?”
“델테르 황태자 전하께서 마차를 보내셨어요.”
“……마차?”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마차를 보냈다고? 갑자기 무슨 이유에서.
일단은 준비를 하기 위해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멍하니 디리아의 손길에 몸을 맡기려던 그때.
‘진짜 가만 안 둬.’
나는 황급히 목 아래를 가렸다.
선명히 남아 있는 붉은 자국을 발견했다.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오늘 목이 좀 아픈 것 같네.”
나는 황급히 숄로 목을 둘렀다.
“그럼 나서기 전에 따뜻한 차라도 마시고 가세요.”
“그럴게.”
웃고 있었지만, 웃는 게 아니었다.
디리아가 나가서야 나는 축 늘어졌다. 정말, 한시도 가만히 두질 않는다니까.
반려의 각인도 아닌데.
“……각인?”
나는 거울을 보며 자국이 난 목덜미를 보았다.
“왠지 모양이…….”
이상하긴 한데. 지난밤을 떠올리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상한 생각 금지.”
나는 내 뺨을 때리며 정신을 다잡았다. 황실에 가야 하니 다른 생각은 금물이었다.
일단은 급한 일부터 끝내고 생각해 보자.
* * *
디리아가 건넨 차를 마시곤 마차에 타기 위해 저택을 나섰다.
“혼자 가도 괜찮겠어?”
“분명 그림자도 따라올 거야.”
기척을 숨기고 있는 것뿐이지.
내 말에 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님은 잠시 어디를 좀 가셨어.”
“그래? 급한 일이신가 보네.”
나한테 말도 없이 가셨으니.
그나저나 정말 모른 척하기야?
리온은 나를 향해 뻔뻔하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먼저 발견하지 못했으면 어쩔 뻔했어!
“리온, 너.”
“응? 무슨 일이라도 있어?”
그는 싱긋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뻔뻔해.”
“참은 거야. 아무도 넘볼 수 없게 더 많은 자국을 새기려다가.”
“보여 줄 일도 없거든……?”
“그런가.”
리온은 머리카락을 넘겨 내 목을 빤히 보았다.
숄로 인해 가려져 있었다.
“혹시나 하고. 문양처럼 새겨진다면 달라지지 않을까 했어.”
내 목을 엄지로 지분거리던 손길이 멈췄다.
“조심히 다녀와. 나는 늘 그렇듯 얌전하게 기다릴 테니까.”
“……말은 잘해.”
“조신하게 있을게.”
리온이 해사하게 웃으며 내 손끝을 툭 하고 건드렸다.
더는 보고 있으면 가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갑자기 마차의 문이 열리더니 황태자가 불쑥 말했다.
“둘 다 같이 다.”
“……리온도요?”
“못 봐주겠으니까. 타라는 거다.”
“감사히 타겠습니다.”
리온은 거절하지 않고 내 손을 잡아 이끌었다.
결국 함께 마차에 올라탄 우리는 황실로 향했다.
이동하는 마차 안에서 적막이 흘렀다.
매번 이런 상황에서 참지 못하는 내가 말문을 열었다.
“아니, 도대체 왜 부르신 건가요?”
마차만 보낸 줄 알았더니, 그 안에 떡하니 델테르가 앉아 있질 않나.
리온까지 같이 가도 상관없다고 하는 거 보면…….
“무슨 생각이신지.”
“아, 엎으러 가는 길인데. 여러모로 쓸모가 있을 것 같아서.”
“……네?”
아니, 뭐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저렇게 대놓고 이용하겠다는 소리를 들으니 이상했다.
“황제 폐하는 움직임이 없으십니까?”
“다행히 아직 모르고 계시는 것 같아.”
“황후 폐하가 있으니 가능한 일이겠군요.”
델테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니스는 신전으로 보냈어. 이곳에 있지 않는 게 좋을 테니까.”
“그렇군요. 모든 준비가 끝난 건가요?”
“그래, 그래서 말인데.”
그는 잠시 멈칫했다. 뭔가 찝찝하다 했는데 아무래도 그냥 데리러 온 건 아닌 것 같다.
“미끼가 좀 되어 줘야겠어.”
또 미끼라니.
나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안 됩니다.”
리온은 강하게 반발했다. 도대체 뭘 끌어들이려고 미끼까지.
“계획이나 한 번 들어 보죠.”
“황제를 먼저 이용하게 만들 생각이다.”
“……황제를요?”
“그래,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걸 이용해야지.”
황태자를 보니 꽤나 많은 고민은 한 것 같았다.
그래, 제 손으로 아버지의 목을 틀어쥐는 것은 쉽지 않을 터.
“아버지는 오늘 귀족들의 만찬이 열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제니스와 나의 기사가 나가게 될 테고 그게 시작이 될 터.”
“황제가 곧바로 움직일 거란 생각이군요.”
“그때 네가 그들 앞에서 연기를 좀 해야겠어.”
“연기라면?”
속이는 거라면 자신이 있는데.
나는 눈을 반짝였다.
“습격을 당한 것처럼 피를 토하고 쓰러지면 돼.”
“귀족들 앞에서 그러란 말이죠? 마치 황제가 저를 죽이려 한 것처럼.”
“그래.”
“뭐, 간단하네요. 도와드릴게요.”
어차피 황제는 자리에서 내려온다. 그렇게 되면 모두가 자신의 목숨을 걱정하게 되겠지.
이미 델테르는 귀족에게 잘못된 정보를 전달했을 터.
예를 들면 황제가 자신을 견제하는 가문들을 숙청한다는 둥의 루머 말이다.
나의 흔쾌한 대답에 델테르는 피식 웃었다.
“엘르.”
그러나 리온은 달갑지 않은 듯 내 손을 잡아 저지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발을 빼기엔 늦었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지 않았던가.
“그냥 무조건 들어주는 건 아닙니다. 아시죠?”
“그렇겠지.”
“이 모든 일이 끝나게 되면 벨루아 가문에 대한 모든 권위를 복귀시키고 새로운 작위를 내려 주세요.”
“……작위라.”
그래야 공평하지 않겠는가.
내 말에 델테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능력이 없는 허울뿐인 가문들보단 낫긴 하지.”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이로써 계약이 성사되었다.
리온은 불만이 많아 보였지만, 일단 내 말에 따라 주기로 한 모양이다.
* * *
황궁은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이 지나다니는데도 약속한 듯 사람들은 입을 꾹 닫았다.
‘폭풍이 몰아닥칠 것 같네.’
모두가 알고 있는 눈치였다.
“황실 만찬은 어디에서 열리고 있나요?”
“어디긴, 걱정이 많은 분들이니 은밀한 곳이지.”
황궁에는 잘 열리지 않는 공간이 있었다.
“그런 곳에 제가 나타나는 것도 이상한 거 아닌가요?”
“이상할 거 없어. 황제의 친위대가 갑자기 들이닥친 자객들을 상대할 테니.”
“마음을 먹은 모양이네요.”
“이게 맞다면 행해야지.”
델테르는 무덤덤했다.
“그럼, 나중에 보아요. 리온도 조심하고.”
리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탑에서도 움직일 겁니다.”
“그런데 원래 내일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래, 그렇게 정보를 흘렸지. 아, 루비온 가문에 대한 일 또한 오늘 밝혀질 거다.”
이것 또한 예정된 거였구나.
리온은 고개를 끄덕이곤 곧장 마탑으로 돌아갔다. 마법사들을 불러오기 위함이겠지.
나는 시녀를 따라 작은 공간으로 갔다.
피를 바르고 옷을 찢어 긴박함을 연출했다.
“이게 먹혀야 할 텐데.”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버지가 바쁜 이유도 오늘과 관련이 있는 것이겠지. 아마도 저 안에 함께 참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고마워요.”
나는 시계를 보았다. 정해진 시간은 정각.
그때 움직이면 된다.
* * *
황제는 참석한 귀족 대표를 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이렇게 만찬을 급히 열게 된 것은 미안하게 생각하네.”
그러나 급한 정보를 입수했으니 마음이 초조했다.
“최근에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소.”
“어떤 이야기를 말입니까?”
“누군가 반역을 꾀한다고 하더군. 그것도 내일.”
황제의 말에 귀족들이 술렁였다.
반역이라니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이렇게 귀족 대표를 모은 것도 그걸 방지하기 위함이리라.
“그래서 나는 내일 그것들을 처리할 걸세. 하여, 그대들도 동참을 해 줬으면 하는데.”
“황제 폐하께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그러겠습니다.”
에드가는 시계를 보았다.
곧 있으면 정각이 된다. 델테르를 따라 엘르가 왔다면 제시간에 이곳에 모습을 드러낼 터.
“저희가 폐하를 위해 나서 드린다면, 폐하는 저희를 배반하지 않을 것입니까?”
에드가의 말에 황제가 미소를 머금었다.
“내 약조하지.”
절로 조소가 머금어졌다.
황제의 약조를 믿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귀족들은 황제의 말을 믿는 듯했다.
“도의를 위해서라면 함께 하겠습니다.”
그들의 충성심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얼마나 갈까.
에드가는 문을 빤히 응시했다.
곧이어 밖이 소란스러웠다.
쾅쾅쾅.
“살, 살려 주세요!”
쾅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애처로운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에드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뭐 하는 건가!”
황제가 버럭 소리쳤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고 문을 열었다.
털썩, 피투성이가 된 엘르가 숨을 헐떡이며 에드가의 팔을 붙잡았다.
“아, 아버지……커헉.”
“엘르!”
에드가는 황급히 엘르를 안아 들어 귀족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입니까!”
화들짝 놀란 귀족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 황제 폐하의…… 친위대가…….”
엘르의 작은 목소리에 모두가 황제를 쳐다보았다.
그들의 눈빛은 아까와는 달리 초조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에게 말하는 것과 달리 돌아가는 상황에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