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6화
“안 오실 거라 생각했어요.”
나는 제니스를 보며 말했다. 그녀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오지 않으려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어요.”
무엇이 그녀의 마음을 돌린 걸까.
델테르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었나?
“제가 믿어도 될지 확신이 안 서요.”
제니스는 이내 내 옆에 서 있는 리온을 보았다.
“반려를 택하게 되면, 당신은 자유로워지겠죠?”
리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양이 사라질지는 모르겠지만, 시도는 해 볼 만했다.
“황태자를 선택하실 건가요?”
나는 제니스에게 물었다.
그동안 델테르가 계속해서 제니스를 도왔으니 마음이 흔들릴 법도 했다.
‘내 말을 잘 알아들었나 보네.’
그렇지 않다면 제니스는 굳건했을 것이다.
“……그럴 생각이에요.”
“아!”
나는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힘겨워 보였다.
자신의 선택이 맞는지 고민이 되는 거겠지.
“걱정하지 마세요. 황녀님이 원하는 건 이뤄질 테니까.”
의심하는 거야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황태자 전하와 제겐 증거가 있습니다. 그러니 불안해하실 필요도 없어요.”
“……앞으로 저는 신전에서 머물게 되겠죠.”
제니스는 허탈해 보이는 눈빛으로 웃었다.
“델테르 황태자 전하께선 좀 달라지셨나요?”
“……네, 조금은. 그런데 한 가지 확인할 게 있어 온 겁니다.”
제니스는 리온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때 저를 도발하신 건 무슨 이유에서였나요.”
“알려 드릴 의무는 없습니다.”
“……그렇군요.”
그녀는 말없이 한참을 리온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손을 뻗어 가슴에 얹었다.
“역시나 뛰지 않네요.”
리온은 제게 닿은 손이 불쾌한 듯 미간을 좁혔다.
곧바로 뒤로 걸음을 물리자 제니스의 손이 가슴팍에서 떨어졌다.
“저는 여전히 뛰는데. 어떻게 당신에겐 문양의 힘이 통하지 않는 거죠?”
“마음에 품은 이가 있으니 제 의지가 강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딱딱한 어조에 제니스는 옅게 웃었다.
제게는 단 한 번의 틈도 내어 주지 않았다. 그때도 제가 강제로 취한 것이었으니까.
“그렇군요. 참 부러운 두 사람이에요.”
제니스의 미소는 슬프게 다가왔다.
“곧 밝혀지게 되면, 저는 곤란해지게 되겠죠. 어쩌면 사람들이 제 존재 자체에 의문을 품을지도 모르고…….”
나는 그녀의 불안감을 곧바로 눈치챘다.
“그건, 증언해 드릴 수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니스는 의심할 것도 없이 신성력을 타고 났다.
그건 모두에게 증명해 보일 수도 있는 힘이었다. 게다가 나와 리온이 인정하고 나선다면 별수 없을 터.
“황녀님의 힘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꽤 힘이 되는 말이네요.”
제니스는 이내 활짝 웃었다.
“사실 조금은 개운해요. 숨통이 트였달까.”
그녀는 휙 하고 몸을 돌더니 하늘을 보았다.
“이런 곳에서 이용당하며 언제까지 목을 졸리며 살아야 할지 두려웠거든요.”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궁 생활이 어땠을지는 뻔히 보였으니까.
“하지만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을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각자가 원하는 것을 하고자 선택한 거였으니까.
고마울 필요도 고마워할 필요도 없었다.
“아, 황태자 전하께서 전하라고 하더군요.”
“네?”
“모레. 모든 게 끝날 거라고 말이에요.”
……모레.
생각보다 빨랐다.
모든 결정을 끝낸 건가?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다고 둘의 행복을 바라는 건 아니에요. 나도 꽤 상처를 받았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제니스의 말은 홀가분해 보였다.
모든 걸 체념한 사람처럼, 훌훌 털어 버린 것 같은 느낌.
“와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제니스 황녀님.”
“그래요, 다음번에 만날 땐 제니스라고 불러줘요. 이젠 황녀가 아닐 테니까.”
그녀는 지긋지긋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처음으로 서로를 보며 편히 웃었던 것 같다.
제니스는 곧장 황궁으로 향했다. 더는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겠지.
그녀가 떠나고 나서야 리온과 나는 한시름을 놓았다.
리온이 제 손목을 응시했다.
“저릿하네.”
그의 중얼거리는 소리에 나는 손을 꽉 잡았다.
“이제 짜릿하지?”
무표정으로 있었던 리온의 얼굴에도 미소가 만개했다.
“좀 더 짜릿해도 될 것 같은데.”
그가 엄지로 내 손을 살살 긁었다. 화들짝 놀란 나는 황급히 리온의 발을 밟았다.
“아파.”
“아프라고 밟은 거야.”
“너무하네.”
그는 고개를 숙여 나를 빤히 보았다.
여전히 장난기가 사라지지 않은 걸로 보아 끝나지 않았나 보다.
* * *
“어머니, 준비하십시오.”
델테르의 말에 황후는 기다렸다는 듯이 웃었다.
“하! 하하! 드디어 마음을 정했구나.”
“단,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제니스는 건들지 마십시오. 그게 제 조건입니다.”
“끝까지 싸고도는 게냐.”
“이미 알고 계실 테니 숨기지도 않겠습니다. 제 반려입니다.”
“……너! 그런 말을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황후는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모두를 물린 덕분에 듣는 이가 없었다.
“미쳤구나. 네가 단단히 미친 게지.”
“어머니도 알고 계셨습니까?”
델테르는 서류를 황후에게 건넸다.
그녀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서류를 확인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황후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믿을 수 없는 일로 인해 충격이 컸다.
평생을 그리 믿고 살아왔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황실의 피는 신성력을 가지지 못하는데 말입니다.”
“……그 여자는 다르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황실과의 결혼은 이미 예로부터 황실의 피를 이은 자들로만 엮어졌다.
하지만 데펠로아는 황실과 어떠한 연관성도 없으니 의심하지 않았다.
황제는 그녀를 안았고, 공교롭게 아이를 가졌으니까.
“시기가 교묘하게 맞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무얼 원해서 그녀를 이곳에 들였을까요.”
“……이 능구렁이 같은 노인네가!”
그녀는 배신감에 분노가 치밀었다.
어떻게 감쪽같이 저를 속일 수가 있을까.
자신의 자리를 위해서 모두를 속이고 이용했다.
제 피를 이은 자가 성녀가 된다면 시선이 달라질 테지.
“하!”
나는 도대체 뭘 위해서 이를 갈아왔던 걸까.
그녀의 삶 자체가 송두리째 기만당하는 기분이었다.
“제니스는 황실과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그러니, 잘된 일이지 않습니까.”
그토록 원하던 힘을 얻게 되었으니.
어머니 역시 더는 제니스를 배척할 이유가 없어진다.
그녀는 백성들의 동정을 받게 될 것이고, 델테르와의 관계를 알게 되면 환호할 것이다.
무릇 힘들게 이어진 사랑이라면 애달파 보이기 마련이니까.
“어머니, 저는 제 반려를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킬 생각입니다.”
“델테르!”
“그러니 어머니와 제니스 둘 다 지킬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마치 부탁처럼 보였지만, 그의 어조는 단호했다.
“……잘 알아들었으니 가 보려무나.”
황후는 으득 이를 갈았다.
제 손으로 황제의 목을 틀어쥘 자료를 주었으니 한발 물러설 수밖에.
델테르는 그제야 웃으며 어머니의 방을 나섰다.
* * *
다과회는 정신없이 끝이 났다.
황녀는 일이 있어 급히 돌아갔다고 전했다.
영애들은 받은 목걸이를 칭찬을 하며 베르뎅 쥬얼리 숍에 관심을 보였다.
“이제 좀 괜찮아?”
“덕분에 매우 괜찮아졌어.”
리온은 씩 웃으며 턱을 괴어 나를 빤히 보았다.
정말 능글능글 맞아진 게 요즘 살 만한가 보다.
“일은?”
“이미 다 끝냈지.”
“그럼 이제 방으로 가.”
“싫어.”
“……또 왜 이러실까.”
그는 액세서리를 툭 하고 벗었다.
“문양이 조금 옅어진 것 같아.”
“정말?”
리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일으켜 내 쪽으로 몸을 붙이며 손목을 내밀었다.
“옅어진 거 같지 않아?”
“으음, 나는 잘 모르겠는데.”
아무리 봐도 옅어진 것 같지 않은데.
“마음의 눈으로 봐야지.”
“에이 뭐야.”
나는 손목을 밀어냈다. 괜히 사람 기대하게 하고 말이야.
“난 정말로 옅어진 것 같은데.”
리온은 더욱 몸을 밀착했다.
반응을 하지 않자 포기했는지 떨어지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큼성큼 걸어 내 뒤로 오더니 뒤에서 안아 손목을 눈앞에 대령했다.
“이러면 더 잘 보이지?”
“……더 안 보여!”
그는 나를 껴안으며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뒤에서 안아서 이러는 건 반칙이지.
나는 눈을 감았다 뜨며 호흡했다.
“정말 안 보이는 건가. 자세히 보면 보일 텐데.”
귓가에 속삭이는 그의 음성에 나는 결국 인정했다.
“그런 것 같아. 연해졌네.”
“정말?”
“정말로!”
“사실 똑같은데.”
“……진짜.”
고개를 홱 하고 돌리자 리온의 입술이 닿았다.
부드럽고 말캉한 촉감에 눈이 절로 감겼다.
“어!”
“발뺌하기엔 늦었지 않나.”
리온은 내 몸을 돌려 깊게 입을 맞췄다.
벌어진 틈 사이로 서로의 호흡이 오갔다. 커다란 손이 목을 감싸고 허리를 잡아당겼다.
틈 없이 맞닿은 몸에 곳곳에 열이 피어올랐다.
또다시 갈증이 일었다.
“흐으…….”
옅은 신음 소리에 리온이 더욱 거세게 파고들었다.
천천히 뒤로 몸이 넘어가 푹신한 침대에 등이 닿았다.
곧이어 커다란 음영이 나를 집어삼켰다.
“도망치려거든 지금 가야 할 거야.”
“……내가 어딜 가든 쫓아올 거면서.”
그의 단단한 두 팔에 갇힌 나는 리온의 목에 손을 둘렀다.
아무래도 오늘은 함께 잠이 들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