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5화 (115/120)

제115화

“정말 꿈처럼 사라졌네.”

나는 쩝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왜 또 잠은 금방 들어 버린 건지.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한 침대에서 남녀가! 어? 누워 있는데!

어떻게 매번 아무 일도 안 일어날 수가 있어.

나는 베개를 두드리며 발버둥을 쳤다.

“하……, 밥이나 먹자.”

하지만 현실을 곧바로 수긍하고 주섬주섬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아침밥을 먹는 자리에 셋이 함께 있다니.

감회가 남달랐다.

어릴 때 이후로 오랜만인 것 같은데.

“그래, 아침에 무슨 할 말이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 이거 보세요.”

나는 서신을 건넸다.

에드가는 곧장 확인하더니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친자가 아니다라.”

당혹스러우시겠지.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평생을 그렇게 믿고 살아왔는데 아니란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어려울 터.

“그래, 거짓일 리는 없을 테니 맞겠지.”

“황제가 곧 바뀔 거예요.”

“……황태자가 우리의 손을 들었다? 의외구나.”

“황후가 델테르의 뒤를 봐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회를 잡은 거겠지.”

황후는 늘 황제를 못마땅해했다.

정부를 들인 것도 그렇고, 제가 아닌 다른 이를 사랑했으니까.

“이상할 것도 없다.”

“아무래도 제니스를 만나야 할 것 같아요.”

“그건 안 돼.”

리온은 강하게 막아섰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지금 제니스를 만나는 건 도박에 가까웠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고.

“괜찮아. 별일 없을 거야.”

“그럼, 같이 가.”

절대로 혼자 보낼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알았어. 그럼 같이 가.”

“황실에 초대장을 보낼 테니 이쪽으로 오게 하는 게 나을 듯하구나.”

“……그래도 될까요?”

“안 될 건 없지. 연회를 열어 모두를 초대하는 자리라면, 제니스 황녀도 부담 없이 올 수 있을 터.”

“갑자기 연회를 열어도 괜찮을까요.”

“이상할 것도 없지. 수도에 왔으니 다들 궁금할 테니.”

에드가는 곧장 헤센을 불러왔다.

“……내일 당장 연회요?”

“간단하게 다과회 정도도 괜찮은 것 같은데.”

“아, 그 정도라면 바로 준비할 수 있습니다. 안 그래도 여기저기서 초청장이 오고 있는 터라.”

역시 귀족들은 굴러가는 판을 잘 안다.

루비온 가문의 아이이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마음도 있겠지만, 리온이 가진 힘을 탐내는 이도 많을 터.

“둘에게 관심이 쏠리는 것은 어쩔 수 없으니 감내하도록 해.”

“네, 안 그래도 잠자코 있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준비를 하러 가 보겠습니다. 초대장은 어디에 보낼지 알려 주십시오.”

헤센은 초췌한 얼굴로 자리를 떴다.

“아, 리온 너는 당분간 이곳에 머물도록 해. 카벤이 낮에 들릴 테니 이야기 잘하고.”

리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편히 엘르를 볼 수 있게 되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 * *

카벤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어쩐지 루비온 가문에 대해서 알아봐 달라고 하시더니.”

꽤나 오래 카벤은 원망을 늘어놓았다.

듣고 있는 엘르는 질린 기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럼, 어떻게 다 말해요.”

“하지만 저는 가장 최측근이지 않습니까! 그로 인해 지금 마탑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왜.”

리온의 짧은 대답에 카벤은 헛웃음을 삼켰다.

“왜라니요!”

“내가 마탑주인 것은 변함이 없고, 나라는 사람이 달라진 것도 아닌데.”

“……그건 맞지만. 그래도 사람이!”

“오히려 더 잘된 거 아닌가. 더욱 견고해질 테니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리온 님이 루비온 가문의 일원인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카벤은 답답한 듯 가슴을 쳤다. 아니 사람을 뭘로 보고.

“그냥 섭섭하다는 겁니다. 루비온 가문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제게 속인 거요!”

“……저번부터 느낀 건데. 너는 참 내게 집착을 하는 것 같아.”

“제발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마시구요!”

엘르는 두 사람의 대화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두 사람 참 보면 이상하단 말이에요.”

“오해입니다!”

카벤이 버럭 소리쳤다.

깜짝 놀란 엘르가 가슴을 움켜쥐며 어깨를 으쓱였다.

“알았으니 진정해요.”

“그래서 언제 돌아오실 겁니까.”

“정리가 되면.”

“또 다른 게 있습니까?”

“그런 게 있어. 가장 골치가 아픈.”

리온은 제 손목에 차고 있는 액세서리를 보았다.

“업무는 이쪽으로 보내.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하. 알겠습니다. 다만 황실 쪽에서 주시하고 있는 걸 잊지 마십시오.”

“걱정 마.”

리온의 말에 카벤은 고개를 저었다.

“매번 걱정하지 말라는 말만 하시지.”

그러면서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가득 가져온 서류를 테이블에 내려놓는 것도 잊지 않고.

“이거 다 내일까지 처리하셔야 합니다. 늦으면 또 올 겁니다, 저.”

“알았어.”

카벤은 눈을 가늘게 뜨며 리온을 빤히 보았다.

“그리고 마탑의 모든 이가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돌아오십시오.”

“……그래.”

리온은 그제야 미소를 머금었다.

* * *

“사람이 북적이니까 이상하네.”

“그래도 저는 좋은걸요?”

디리아는 창밖을 보며 웃었다.

“저택에서 다과회를 열다니 꿈만 같아요!”

“그래? 제니스 황녀가 올까.”

“저는 잘 모르겠어요.”

나는 한숨을 쉬었다. 제니스 황녀를 만나기 위해 연 건데 주인공이 오지 않으면 무의미했다.

‘부디 궁금한 게 있어서 오기를.’

황실에서도 가지 못하게 막지는 못할 것이다.

귀족들 중에 내놓으라 하는 가문의 영애들을 초대했으니까.

이 자리에 빠진다면 무슨 이야기가 오갈지 모르니 불안하겠지.

곱게 차려입은 드레스를 한 번 더 확인했다.

헤센 경이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지, 꽃부터 티 종류까지 감탄이 나왔다.

“그럼, 다녀올게.”

나는 방을 나섰다.

곧이어 나를 기다리고 있는 리온이 보였다.

깔끔한 슈트를 차려입고 있는 걸 보자 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엘르.”

“무리하지 마. 알겠지?”

문양의 힘으로 인해 또다시 마력이 폭주하면 몸에 무리가 갈 것이다.

“자, 그럼 가 볼까.”

리온이 손을 내밀었다. 곧이어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정원으로 향했다.

정원에 모인 이들을 빠르게 훑었다.

‘제니스 황녀는 아직 인가?’

자리가 빈 걸로 봐서 오지 않은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리온과 함께 다른 이들을 보며 웃었다.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야말로 초대해 주셔서 놀랐는 걸요.”

하하하 호호호.

웃고 있었지만,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서로를 탐색하는 눈길이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빈자리가 있네요.”

영애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주인 없는 자리로 향했다.

“아무래도 오지 않을 것 같으니 먼저 시작하겠습니다.”

나와 리온이 착석함과 동시에 영애들의 시선이 번갈아 향했다.

“약혼 축하드려요. 당황스럽긴 했지만, 너무 잘 어울리시네요.”

“이렇게 축하를 받으니 실감이 나네요.”

“수도로 돌아오신 것도 놀랐답니다.”

“황실에서 다 허락해 주신 덕분이죠.”

억지로 웃어서 그런지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런데 리온 님께선……이곳에 계시는 건가요?”

힐끔 영애들이 리온을 훔쳐보았다. 긴장하고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어머!”

그때 정원 입구 쪽을 보고 있는 영애가 놀라 소리쳤다.

그제야 내 입꼬리가 올라갔다.

기다리던 이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제일 귀중한 손님이 오셨나 보네요.”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제니스 황녀를 반겼다.

리온과 제니스의 얼굴은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많이 늦었네요. 급한 일을 처리하느라.”

“괜찮습니다. 초청에 응해 주신 것만 해도 영광입니다.”

나는 싱긋 웃으며 제니스를 반겼다.

그녀와 만나기 위해 자리를 마련한 것이니 늦게 오든 말든 상관없었다.

“그럼, 다과회를 이어 시작하겠습니다.”

시녀들은 맛있는 다과와 함께 차를 계속해서 내왔다.

정원을 잘 꾸며 둔 턱에 꽃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차향이 좋네요.”

“그나저나, 리온 님께선 그럼 다시 작위를 받게 되시는 건가요?”

“받지 않을 생각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가문이 멸한 것보다는…….”

“그런 가문이라면 없어지는 게 모두에게 좋을 것이라 여겼는데.”

리온은 부드럽게 미소를 머금으며 영애를 보았다.

“그, 그러시군요.”

붉은 눈동자에 흠칫 몸이 떨렸다.

“아, 참. 안 그래도 황실에서 부탁한 것이 있었는데. 황녀님께서 오셨으니 다행입니다.”

나는 뭔가 생각이 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니스 황녀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다들 즐기고 계시겠어요? 선물도 준비했답니다.”

시녀들은 황급히 시선을 돌릴 선물을 영애들에게 건넸다.

“어머, 이건!”

“저번에 연회에서 보았던 목걸이와 비슷한 거군요.”

하나같이 다들 눈이 반짝거렸다.

그날 이후 문의가 엄청나게 들어왔다는 귀띔을 받고 비슷한 걸로 준비해 달라 일러두었다.

언젠가는 쓰일 거라 생각했는데 유용했다.

‘정말 인재를 잘 찾았단 말이야.’

역시 투자는 한 방이다.

“그럼, 잠시만 실례할게요.”

이미 영애들은 내게 관심이 없었다. 서로의 디자인을 보며 이리저리 착용해 보기 바빴다.

나와 제니스는 영애들을 뒤로한 채 다른 곳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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