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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114/120)

제114화

더는 위험하다.

나는 본능적으로 리온을 밀어냈다.

“리, 리온!”

다급한 내 말에 리온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이런.”

젖혀진 셔츠 사이로 후끈한 열기까지.

나는 애써 정신을 차리곤 그 공간을 빠져나왔다.

“어머, 아가씨! 한참 찾았잖아요.”

물을 받아 놓고 나를 찾아다닌 모양이다.

디리아는 손을 흔들며 내게 달려왔다.

좁은 공간에서 나를 빤히 보고 있는 리온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외면했다.

‘저렇게 자꾸 쳐다보면 어떻게 해.’

얼굴에 달아오른 열이 식을 줄을 몰랐다. 연신 손부채를 해도 소용없었다.

“아가씨 몸이 안 좋으세요?”

“아, 아니.”

나는 황급히 뒷짐을 지고 손으로 휙휙 저었다.

나오지 말고 그대로 있으란 이야기였다.

그러나 리온은 내 말대로 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툭.

“악!”

내 손끝을 건드리는 손길에 화들짝 놀랐다.

일부로 저러는 거겠지. 놀리는 데 정말 진심이라니까.

“아가씨?”

디리아가 걱정스런 얼굴로 이마에 손을 올렸다.

“어머! 열이 좀 있으신 것 같은데. 어서 가서 쉬어야겠어요.”

“으응?”

잘못 짚은 거긴 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여기에 있다간 리온이 어떤 장난을 칠지 모르니 방으로 가야 했다.

“좀 쉬어야겠어. 빨리 가자!”

나는 디리아의 등을 밀며 재빨리 방으로 향했다.

* * *

“흐아, 좋다.”

디리아가 받은 물에 몸을 뉘었다.

이미 몸에 열은 후끈했지만, 역시 반신욕이 피로엔 적격이었다.

리온도 방에 가서 잘 쉬고 있겠지?

아까 봤는데 왜 또 보고 싶지.

나는 물에 몸을 푹 담그며 눈을 감았다.

이래로 있다간 물에 녹아 풀어져 사라질지도 모른다.

노곤 노곤 잠이 쏟아져서 욕실을 나왔다.

“하아, 너무 좋다.”

이렇게 마음이 편했던 적이 있었던가.

이제 제니스와 델테르의 일과 황실만 처리하면 될 텐데.

침대에 드러눕자 포근한 감촉이 나를 감싸 안았다.

똑똑똑.

“아가씨, 서신이 왔어요.”

“서신?”

나는 지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서신이 올 게……아!

황실의 인장은 찍혀 있지 않았지만, 은밀하게 온 거라면 델테르뿐이었다.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는데.”

디리아는 내게 서신을 건네주곤 방을 나갔다.

침대에 앉아 서신을 빤히 응시했다.

이걸 열어 보면 기다렸던 내용이 있을까? 제발 있었으면…….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봉투를 뜯었다.

[친자 확인 검사.

제니스 아벨 보니타와 테르비온 보니타를 대조하여 ……

결과 불일치합니다.]

“와!”

기운이 쭉 빠졌다.

간단한 마법으로, 마탑에 소속되지 않은 황실 마법사의 수준으로도 알아낼 수 있는 결과였다.

제니스가 황실에 들어올 때 했던 검사는 필시 황제가 조작한 것이었겠지.

델테르는 이 결과를 벌써 보았을 텐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둘을 생각하면 마음이 좀 복잡했다.

그래도 델테르가 아버지에게 한 짓이 있긴 한데…….

그 역시 세뇌되어 자랐을 테니까.

얽힌 게 많아서 실타래를 풀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아, 일단 자고 나서 아버지한테 말해야겠어.”

아침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좀 해야겠어.

리온의 문양만 해결하면 되는데…… 제니스가 어떤 선택을 할지.

나는 애써 잡생각을 지우며 잠을 청했다.

* * *

리온은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엘르가 있는 곳으로 간다면, 분명 쫓겨날 터.

하지만 아까 봤는데 여전히 보고 싶었다.

잠도 오지 않으니 살짝만 가 볼까?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문 쪽으로 향했다.

아까의 감촉이 여전히 떨쳐지지 않았다.

“아, 역시.”

그는 문에 기대어 피식 웃었다. 이곳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렇지만 엘르와 이제 같이 있을 수 있게 되었는데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고.

욕심이라고 말해도 할 말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리온은 문에 기댄 채 한참을 고민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얼굴이라도 보고 자야 잠이 올 것 같았다.

결국 리온은 방을 곧장 나섰다.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말이다.

“……잘 자네. 매번 나만 안달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심술이 난단 말이지.

리온은 침대에 자고 있는 엘르를 보았다.

“몰래 들어왔으면서 뻔뻔하게 언제까지 보고 있을 생각이야.”

“안 잤어?”

스륵, 감겨 있던 눈이 뜨였다.

자고 있는 척을 한 건지 말똥한 눈동자에 픽 웃음이 났다.

“깜찍하게 자는 척을 했네.”

“잠이 와야 말이지. 너야말로 자고 있는 방에 몰래 오다니.”

엘르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보지 마. 안 돼.”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눈빛으로 이야기하고 있잖아.”

또 잠만 자고 가겠다고 하겠지.

엘르는 리온의 마음을 꿰뚫어 본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내일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온 김에 이것 좀 봐.”

리온은 엘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엘르만을 향해 있었다.

“잘됐지?”

엘르는 종이를 펼쳐 보였다.

델테르와 제니스가 남매가 아니었다니.

흥미롭기는 했으나, 제겐 중요치 않았다.

방해되면 없애면 그만이고, 제니스의 마음이 제게 있든 없든 저와는 상관없었다.

“그러네.”

그러나 엘르에겐 꽤나 중요한 사실인 듯했다.

리온은 장단을 맞춰 주듯 웃었다.

“이제 마음이 좀 놓여?”

“당연하지! 네가 제니스 황녀를 해칠까 봐 얼마나 가슴 졸였는데.”

“엘르, 그건 제니스의 마음이 돌아섰을 때의 이야기야.”

어쩌면 돌아서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권력이었을까.

“바뀔 거야.”

단호한 엘르의 음성에 리온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래, 바뀔 거야.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리온은 엘르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이야기를 경청했다.

“델테르에게 그동안 모아 온 자료를 넘길 생각이야.”

“……자료?”

“황실의 부패를 증명할 은밀한 자료를 열심히 모았거든.”

그녀는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며 말했다. 정말로 열심히 모았나 보다.

뭐든 제 일에 최선을 다했던 아이니까.

그 모습이 예뻐서 저 역시 놓지 못했던 것이기도 했고.

“이제 모든 사람이 내가 루비온 가문의 사람인 걸 알았어. 그래도 괜찮겠어?”

많은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고 어쩌면 멸시를 당할지도 모른다.

제 손으로 가족을 죽였으니.

모두가 저를 두려워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황제조차도.

“나는 괜찮아. 처음부터 알고서 널 데려온 거니까.”

여전히 저를 보는 눈빛이 변함없었다.

그래서 좋았다.

“내일 일찍 일어나서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 어서 자.”

리온은 침대 옆을 툭툭 치며 웃었다.

“네가 가야 잠을 자지.”

엘르는 눈을 게슴츠레 뜨며 리온의 볼을 감싸 안았다.

“이렇게 유혹하면 가기 싫어지는데.”

“네가 맨날 이러니까. 나도 장난치고 싶잖아.”

그녀의 장난기 가득한 미소에 리온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리온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침대에 털썩 누웠다.

“쫓아내려거든 쫓아내.”

눈을 감고는 팔까지 쫙 펼쳤다.

“둘이서 자도 넓은 침대네.”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엘르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제 팔을 벴다.

“좀만 이러고 있다가 가야 해.”

“걱정 마. 꿈이었던 것처럼 아무도 모르게 내 방으로 갈게.”

엘르는 리온을 꼭 껴안으며 눈을 감았다.

좋은 냄새와 함께 따뜻한 체온으로 인해 잠이 왔다.

“그렇게 자려고 노력해도 못 잤는데, 네 품에서 자려니까 잠이 쏟아지네.”

하암.

하품까지 하더니 이내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잘못 온 것 같다.

리온은 허탈하게 웃으며 엘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잘 자.”

그의 따뜻한 음성에 엘르는 미소를 머금은 채 잠이 들었다.

* * *

“쥐새끼처럼 잘도 숨어들어 왔군.”

델테르는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이를 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아, 들켰습니까?”

“기척을 숨기지도 않아 놓고 뻔뻔하긴.”

리온은 웃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잠을 자지 못한 건지 수심이 깊어 보였다.

“생각이 많아 보입니다.”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군.”

“안 그럼 제가 왜 이 한밤중에 찾아왔겠습니까.”

“그래, 그렇겠지.”

델테르는 지끈거리는 미간을 꾹 눌렀다.

“개도 아니면서 어찌 이리 냄새는 잘 맡고 오는 건지.”

“아, 이거 말입니까?”

리온은 뻔뻔하게 웃으며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서류를 툭 건드렸다.

“이렇게 많은 정보가 어디서 나왔을지.”

엘르는 아닌데 말이다. 분명 아까 제게 자료를 모았으니 줄 생각이라고 했지 않은가.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줬다는 말인데. 황궁에 이 기회를 잡고자 하는 이가 누가 있을까.

“아들을 생각하는 어미의 마음이라…….”

“때론 너무 많은 것을 아는 게 독이 될 때도 있는 법이다.”

델테르는 미간을 좁히며 서류를 정리했다.

“황녀도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아직.”

“뭘 그리 고민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

리온은 쯧 하고 혀를 찼다. 지금이 아니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이번엔 내가 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네놈이?”

“아버지의 목을 치는 게 무섭다면, 내 손을 빌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이젠 숨길 생각도 없는지 가감 없이 제 정체를 드러냈다.

“이미 까발려졌다 이건가.”

“저주를 받은 아이. 가족까지 알아보지 못하고 죽인 붉은 눈을 가진 이.”

저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없었다.

루비온 가문의 저주를 받은 자의 마력은 광활했다.

그 누구도 견줄 수 없을 만큼.

그렇기에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어떻습니까. 저를 이용하면 굉장히 쉬워질 텐데.”

“이거 원, 둘이서 짰나?”

왜들 이렇게 귀찮게 하는지.

“내가 알아서 한다. 그러니 내 방에서 꺼져.”

다들 어떻게 나를 보고 있는 건지.

무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델테르의 눈빛이 아까와 달리 사뭇 진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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