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화
제니스는 충격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었다.
“어떻게, 나를 이용해서.”
함정에 빠지고 만 것이다. 그가 원하는 게 무엇이든 저로 인해 이뤄졌음이 틀림없다.
그녀는 두려움에 몸을 감싸 안았다.
델테르가 아니었다면, 저는 휘말려서 큰 화를 당했을지도 모른다.
제 몸에서 빠져나간 마력만 해도 엄청났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던 거야…….”
배신감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제가 무슨 마음으로 그를 붙잡는지 알면서 어떻게!
제니스는 앞으로의 일이 두려웠다.
똑똑똑.
“좀 들어가도 되겠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델테르에게 제 마음 따위가 중요할 리 없었다.
제니스는 대답 않고 멍하니 문을 응시했다.
“꼴이 말이 아니군.”
델테르는 시녀에게 시켜 따뜻한 차를 내려놓았다.
“정신 차려. 그깟 한 번에 무너지다니.”
눈빛에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오늘 엘르 영애가 아니었으면 너는 죽었을 거다.”
“……알고 있어요.”
제니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번에도 반려인 제가 아니라 엘르였다.
이쯤 되면 반려가 무슨 소용인가.
“황실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건지,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건지 네 마음을 알고 싶다.”
“……제 마음이요?”
단 한 번도 귀 기울여 주지 않더니. 무슨 변덕에서 이러는 걸까.
함정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제니스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궁금하긴 하세요?”
“그래, 궁금해. 네가 날 밀어내는 이유가 단순히 우리가 더러운 황제의 피를 이은 남매여서인지.”
“……당연한 걸 물으시는군요.”
반려의 문양이 생긴 것도 말이 안 되는데.
배다른 남매면서 서로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돌이켜 보면 그게 원인이었다.
황태자가 제 오라버니만 아니었어도 선택지는 두 개였을 텐데.
그도 황제를 증오하고 있었으니까.
“네 입으로 듣고 싶어.”
“……이렇게 만나지 않았다면 우리도 달랐겠죠.”
이건 진심이었다. 황제의 비틀린 집착도 그 때문에 생겨났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정당화되는 건 아니었다.
지금 이렇게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 해도 심장이 잘게 떨려왔다.
그래, 문양의 힘이란 이런 것이었지.
“정말 달랐을까.”
델테르는 제니스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엉망이 된 얼굴을 보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다정하게 대해야 한다고 했었지.’
여자를 만나 봤어야 그 방법도 알 텐데. 제가 보고 자란 건 아버지와 어머니뿐이었다.
형제도 없었으니 지식으로만 연애를 배웠다.
델테르는 어색하게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들어 제니스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우리가 남매가 아니라면.”
“……전하?”
그럴 리 없잖아요. 황제가 저를 데려온 이유는 핏줄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 그런 가설은 옳지 않았다.
제니스는 저를 보고 있는 델테르의 슬픈 눈동자에 고개를 돌렸다.
“이미 우린 서로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줬어요.”
회복하기엔 너무 오래 걸릴 정도로 헤집어 놓지 않았던가.
제니스는 델테르를 밀어냈다. 저를 지켜 주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나는 널 보았을 때 운명이라 여겼어. 그 사랑을 배신당했다는 걸 깨달았을 때 화가 났고.”
제니스에게 화를 내는 게 아니었는데.
그게 잘못된 방향이란 걸 뒤늦게 깨달았을 땐 늦었다.
이미 사이는 틀어져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둘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제니스의 반려란 걸 깨닫게 되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그녀는 모를 것이다.
그래 어긋난 마음이 잘못된 사랑으로 표현되었을 때 후회했다.
“어차피 우린, 안 되잖아요.”
저와의 사랑을 바라고 있는 걸까?
우스운 일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기도 했고.
“문양 앞에서 너 또한 마음이 흔들린다는 거 알고 있어.”
“……제 진짜 마음이 아니라면요?”
“그건 리온에게 향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겠지.”
델테르의 말에 제니스의 가슴이 콕콕 아려 왔다. 틀린 말 하나 없었다.
제니스가 리온을 원한 건 제 목표를 위해서였으니까.
“정말 저와의 사랑을 원하는 건가요?”
제니스는 믿지 않았다. 그랬다면 제게 다르게 접근을 했어야 했다.
그러니 그가 진정 원하는 것이 저는 아닐 터.
그 역시 황제와 똑같았다.
“확인할 게 있어. 확실해지면 알려 주지.”
“……저와 관련된 건가요?”
“그래, 그러니까 네가 원하는 걸 말해.”
델테르는 제니스의 손에 손수건을 쥐여 주며 낮게 웃었다.
“저는…… 황제의 품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그 누구도 다시는 나를 괴롭히지 못하게.”
두려움에 덜덜 떨며 살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고 싶었다.
어머니의 원수인 황제를 짓밟고 위에 올라서는 것.
그게 제니스가 원하는 것이었다.
델테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가볍게 손등에 입을 맞추곤 방을 나섰다.
원하는 것도 얻었으니 이제 확인만 하면 된다.
결과에 따라서 제니스의 마음도 달라지겠지.
제니스는 갑작스런 델테르의 태도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이전과는 달리 불쾌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은 정말로 저를 소중히 대한다는 느낌을 받았으니까.
* * *
“오늘 연회에 있었던 일 말이에요.”
“황후,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하니 그 입 닫았으면 하는데.”
“그 아이가 황녀의 반려라고 하지 않았나요?”
황후는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 쐐기를 박아야 했다.
무엇보다 엘르에게 들은 게 맞다면, 델테르와 제니스가 엮여 있었다.
둘을 떼어 놓아야 했다.
“저주받은 아이가 반려라니! 세상 모든 이들이 알게 되면 황실의 위엄이 얼마나 떨어지게 될지.”
황제는 머리가 울렸다.
쨍그랑-
컵을 그대로 집어 던진 그는 눈을 부릅떴다.
“닥치라고 하지 않았소.”
안 그래도 거슬리는데 오늘따라 유독 제 신경을 긁었다.
연회의 일도 정리가 되지 않았는데 옆에서 재잘거리는 입이 더욱 머리를 어지럽혔다.
“폐하! 저는 이번 일을 결코 그냥 넘기지 않을 겁니다.”
황후는 필사적이었다. 델테르를 지켜 내야 했기에 제니스를 이곳에서 몰아내야 했다.
어차피 성녀가 되었으니 황실에 더는 얽매여 있을 필요도 없었다.
그녀가 세력을 모은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건 진즉 손을 써뒀다.
“황후. 우리와는 연관이 없을 테니 진정하시오. 지금 중요한 건 루비온 가문의 일원이 남아 있는 것을 몰라서 그러는 건가?”
“그, 그건…….”
“심지어 그자가 마탑주가 되었다지 않소. 마력이 이미 개방이 되었다는 건데.”
그걸 무슨 수로 이길 수 있을까.
보석이 있다면 힘을 봉인했을 텐데. 그마저도 사라져 버린 터라 손 쓸 도리가 없었다.
“이미 팔렸다니. 힘들게 찾아갔더니 비로이드는 죽었다더군.”
“……그자가 죽었나요?”
황후는 두 손을 꽉 쥐었다. 루비온 가문의 일에 황실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면 위험했다.
“이상한 건 그자의 집에 지금은 벨루아 가문이 산다는 것이지.”
“그 말씀은.”
황제는 고개를 젖혀 웃었다.
“그래, 그 망할 것들이 끝까지 내 발목을 잡는구려.”
눈알에 핏줄이 툭툭 튀어 나왔다. 노기 어린 표정에 주변 공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일이 꼬였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제니스가 제 딸이 아닌 것이 밝혀지게 되는 날엔 끝도 없이 추락할 것이다.
제 권력을 위해 거짓을 퍼뜨려 모두를 기만했으니까.
황제는 두려웠다.
어쩐지 제 끝이 그리 좋을 것 같진 않았기에.
데펠로아의 딸, 그리고 제가 그녀에게 했던 짓들은 지워지지 않을 터.
불안해하는 황제를 보며 황후는 입꼬리를 살며시 올렸다.
‘무슨 약점이 있구나.’
그것만 알아낸다면 그 자리에서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제 아들을 자리에 앉히고 거슬리는 것들을 다 없애 버릴 수 있겠지.
벨루아 가문과도 손을 잡는 거야 상관없었다. 그들이 제 목숨을 보장만 해 준다면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도움이 안 될 것 같으니.”
황후는 가만히 황제를 쳐다보다 이내 알현실을 나왔다.
“황태자는 어디에 있지?”
그녀는 황급히 델테르를 찾았다. 황제가 불안해하는 지금이 기회였다.
두 번 다시 없을지도 모른다.
때마침 복도를 걷고 있는 델테르가 보였다.
황후는 재빠르게 델테르의 손을 잡아챘다.
“잠시 나 좀 보자꾸나.”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바쁩니다.”
“네게 해 줄 말이 있으니 따라오거라.”
황후는 손을 놓지 않았다. 어쩐지 표정이 상기되어 있는 걸 보니 무시할 일은 아닌 듯싶었다.
하는 수 없이 델테르는 황후의 뒤를 따랐다.
그녀는 제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 델테르의 어깨를 잡았다.
“아들아 드디어 기회가 왔구나.”
황후는 다소 들뜬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벨루아 가문과 제니스를 한 번에 처리할 수 있을 것 같구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황제가 드디어 발목이 잡혔어! 지금이 기회다. 너만 괜찮다면, 이걸 이용해서 황제를 물러나게 하거라.”
황후는 재빨리 서랍 안에 숨겨 둔 서류를 꺼내 들었다.
그동안 언젠간 올 날을 위해서 이를 갈고 기다렸다.
루비온 가문에 대한 모든 진상이 드러난다면 황제는 질타를 피하긴 어려울 터.
황제와 제가 그 가문에게 해온 악행이 밝혀지기 전에 선수를 쳐야 했다.
어차피 델테르가 황제가 된다면 저는 죽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제가 해 왔던 악행들을 알린다고 해서 불리할 건 없었다.
저는 그저 황제가 하라는 대로 따랐을 뿐이라고 억울함을 호소하면 되니까.
델테르는 황후가 건넨 서류를 읽어 내려갔다.
으득, 입술을 세게 문 탓에 피가 새어 나왔다.
황실의 부패한 일들이 나열된 서류를 보자 역함이 몰려왔다.
“……어머니 말대로 기회를 잡아 보겠습니다.”
어쩌면 저와 동상이몽일지 모르겠지만.
델테르는 제게 굴러들어 온 기회를 꽉 잡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