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화
“리온 괜찮아?”
나는 리온의 몸을 살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는 듯했다. 그제야 안도하곤 마차에 몸을 기댔다.
“지금 그 꼴을 하고 남 걱정이 되는 모양이지.”
“아…….”
나는 내 몰골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괜찮아요. 이제 안 아파요.”
“가서 내상 치료부터 받아.”
“네, 하라는 거 다 할게요. 리온은 혼내지 말아요.”
나는 아버지를 보며 두 손을 모았다.
“엘르, 난…….”
“황녀가 뭔가를 한 거지? 이렇게까지 큰일이 터질 거란 예상은 못한 모양이던데.”
충격에 빠진 제니스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마력 폭주가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다니. 자칫했으면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이 다 죽을 뻔했다.
폭주해서 자아라도 잃었다면…….
“그런데 이건 왜 품에 가지고 있었던 거야?”
나는 보석이 생각나 품에서 꺼내 보였다.
“아……! 이거 혹시 빛을 잃은 건가?”
“응, 그런 것 같아.”
선명하게 붉은빛을 발하던 보석이 어쩐지 죽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뭔가 이상해.”
리온은 눈을 깜빡이며 내 얼굴을 부여잡았다.
“엘르잖아.”
“응? 그럼 나지.”
“맞은편에 앉은 건 에드가 백작…….”
“리온 왜 그래?”
“설마.”
리온은 고개를 숙이곤 한참을 혼자 중얼거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 혹시 이게 빛을 잃으면 안 되는 거야?”
“이상해.”
그래 충격이 컸겠지.
이제 모두에게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루비온 가문의 마지막 남은 이가 리온인 걸 밝혀야 하는 걸까.
그랬다가 실험체라도 되어 버리면 어쩌지?
이제 좀 숨통이 트였는데.
“조금 더 확인을 해 봐야 할 것 같아.”
“뭔지 모르겠지만, 그러자.”
나는 에드가와 눈을 마주치며 어깨를 으쓱였다.
“돌아가서 리온도 치료를 좀 받아야 할 것 같아요.”
“그래 보이네.”
에드가는 마땅치 않아 했다.
“곧 대대적인 조사가 있을 것이다.”
“……이번 일로요?”
“그와 관련한 모든 일.”
그건 제국 내 전반에 걸친 모든 조사를 일컫는 거겠지.
황실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다행히 벨루아 가문은 이전에 법에 걸릴 만한 것을 처리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다.
“황제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귀족들의 만장일치야.”
“……그걸 어떻게 이끌어 내셨어요?”
“이게 벨루아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역시 권력 앞에 장사 없는 건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나는 이제 네가 무슨 할 말이 있다고 하면 무섭구나.”
“제니스 황녀에 대한 거예요.”
에드가는 미간을 좁혔다.
방금 전에도 그로 인해 큰일이 터졌는데, 또 이야기를 꺼내니 기분이 좋지 않겠지.
심지어 내 꼴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고.
“어쩌면 제니스 황녀가 황제의 핏줄이 아닐 수도 있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이 안 되는 소리이긴 했다. 하지만 제니스가 지금까지 성녀 자리를 마다했던 것은 이유가 있었을 터.
그래서 좀 뒤져 본 결과 지금까진 황제의 피를 이은 자가 성녀가 된 적은 없었다.
이미 델테르에게도 말했지 않았던가.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원래 황제의 피를 이은 자는 성녀가 될 수 없어요.”
“……그런.”
이제야 생각이 나신 모양이네.
어머니의 일도 엮여 있고 하니 생각의 회로가 좁아졌겠지.
“그래서 황태자 전하가 따로 친자 검사를 해 보기로 했어요.”
“뭘 믿고 그 자에게 말을 했지?”
“서로 절박함이 있으니 통했다고 쳐요.”
“엘르 내 손 잡아.”
리온의 말에 나는 손을 덥석 잡았다.
그는 제힘을 밀어 넣으며 상처를 치료해 줬다.
“이러면 빨리 괜찮아질 거야.”
“너도 지금 힘들 텐데.”
“나 때문이잖아…… 나 때문에.”
“그렇지 않아. 그러니까 죄책감 가지지 마.”
나는 리온을 보며 활짝 웃었다.
에드가의 날 선 눈빛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에게까지 죄책감을 씌울 생각은 없었다.
이제야 모든 게 풀려 가고 있는데 틀어질 수는 없으니까.
“나, 조금 졸려.”
“기대서 자.”
리온은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대게 만들었다.
일이 많은 하루였어서 그런지 금세 눈이 감겼다.
* * *
“정신이 좀 들어?”
희미한 리온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얼마나 잔 건지는 몰라도 몸이 개운했다.
“엘르, 나 저주가 풀린 것 같아.”
“저주가……?”
화들짝 놀라서인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주가 풀리다니?
리온은 내 손을 잡아 이끌었다. 그는 지나가는 시녀마다 이름을 말했다.
“옷이 흐트러졌어요. 안나.”
“어머, 감사합니다.”
나도 이름이 헷갈리는 시녀들까지 한 번에 알아보고 있었다.
“디리아. 따뜻한 물 좀 준비해 주세요.”
“그럴까요? 먼저 말 걸어 주시니 너무 좋네요.”
디리아는 싱긋 웃으며 욕실로 사라졌다.
그 외에도 리온은 사람들 이름을 하나하나 다 불렀다.
“얼굴과 이름을 곧바로 맞춰 부르는 게 여전히 어색하긴 해. 그래도 그동안 특징과 습관을 외워 둔 보람이 있네.”
“저주가 풀린 모양이군.”
에드가는 리온을 보며 씩 웃었다.
리온이 모두에게 알려졌으니 걱정을 했나 보다.
‘하긴, 벨루아 가문에서 후원하기도 했으니까.’
우리도 엮여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저주를 푼 거야?”
리온은 손을 가볍게 튕겨 내 허공에서 책 하나를 가져왔다.
“여기에 쓰여 있었어. 정말 될 줄은 몰랐지만.”
도발이 먹혀들어 갔기에 성공했다.
물론, 위험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엘르가 타이밍 좋게 이성을 되돌렸다.
제목도 쓰여 있지 않았지만, 저주에 관련된 것들이 다뤄져 있었다.
나는 리온이 표시해 놓은 장을 펼쳤다.
[루비온 보석의 저주는 붉은 눈을 가진 자에게만 통한다.
저주를 깨기 위해선 깰 수 있는 다른 상위 저주가 필요하다. 상반되는 힘과, 동일한 힘의 공존이 이뤄질 때야 비로소 벗어날 수 있다.]
흑마법에 해당하는 내용이어서일까.
금서에 이런 내용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내가 예상한 것이 맞았던 모양이다.
“만약 실패하면 어쩌려고 무모하게…….”
“네가 올 줄 알았으니까.”
리온은 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다시 생각해도 아찔했다.
“그럼 운명이 뒤틀렸다는 건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리온의 옷을 걷어 손목을 보았다. 액세서리를 빼냈지만, 문양은 여전했다.
“문양은 사라지지 않았네.”
“그 아래 모든 저주가 파훼된 것 같아.”
“……그런데 조금 옅어진 것 같은데?”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내 눈엔 그랬다.
“사람은 때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법이지.”
아버지는 리온의 팔을 잡아 손목의 문양을 응시했다.
“이제 황태자의 대답을 기다리면 되겠구나. 고생했으니 둘 다 좀 쉬어라.”
“……안 쫓아내십니까?”
리온이 에드가에게 물었다.
그는 쯧 하고 혀를 차며 리온을 알 수 없는 시선으로 응시했다.
“다들 난리가 났을 텐데 여기에 있는 게 나을 거다.”
“감사합니다.”
리온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얼굴에 옅게 번지는 미소를 보니 아버지의 호의가 마음에 든 모양이다.
아버지는 처리해야 할 일이 많다며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웬일로 저렇게 알아서 빠져 주는 거지? 눈에 불을 켜고 갈라놨던 사람이.
이상했지만, 많은 일이 있었으니 이해가 되긴 했다.
몸도 뻐근하고, 디리아에게 물도 받아 달라 했으니 목욕을 좀 해 볼까.
“그럼 우리 몸 좀 녹이고 정원에 산책이라도 갈까?”
내 말에 리온이 내 허리에 손을 감싸며 몸을 밀착했다.
“같이 녹이는 방법도 있는데.”
사르륵 녹아내릴 정도로 달콤한 말에 눈이 스륵 풀렸다.
“못됐어.”
놀리는 데 재미 붙였나 봐.
“농담 아닌데. 우리 약혼한 사이잖아.”
“그건 그렇지만.”
“각인을 먼저 하면 문양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대.”
리온이 귓가에 속삭이며 유혹했다.
이, 이! 요망한 것.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앞을 보았다.
여기서 고개를 돌려 리온의 얼굴을 보는 순간 넘어가고 말 것이다.
“어떻게 녹이는지 안 궁금해?”
“……조, 조금. 궁금하긴 한데.”
씨익.
리온이 나를 보며 웃었다.
결국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 보고 말았다.
내 손을 잡아끈 리온은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곳에 몸을 숨겼다.
“이런 데는 어떻게 안 거야?”
“드나들다 보니.”
좁은 공간에 몸이 닿자 기분이 묘했다.
서로의 숨결이 닿아 몸이 오싹 오싹거렸다. 리온의 체온과 체취에 호흡을 들이마실 때마다 혼미했다.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저 붉은 눈동자, 그리고 벌어진 셔츠 사이로 살짝 보이는 탄탄한 근육.
내 허리를 단단히 붙잡고 있는 핏줄이 불거진 팔뚝까지.
완벽했다.
스륵, 상체를 숙여 조금 더 얼굴이 가까워지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부끄러워!’
이건 생각보다, 좀 더. 아니 많이 민망했다.
어두워서 그런지 분위기도 이상해진 것 같고.
게다가 온몸에 열이 달아오르는 기분에 숨이 뜨거웠다.
“여기에 문양이 사라져서 얼마나 다행인지.”
리온은 내 손가락에 입을 맞추고 손등에 그리고 손목에 입술을 지분거렸다.
살짝 눈을 치켜떠 나를 보는 눈이 예쁘게 휘었다.
입을 살짝 벌려 혀로 내 손목을 핥아 올리자 입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흣.”
“쉿, 그러다 들리겠어.”
네가 그러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겠어!
나는 버럭 화를 내고 싶었지만, 그에게 점령당해 버린 지금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
리온은 손을 잡아당겨 벽에 밀착시켰다. 키 차이 때문에 절로 까치발이 들어졌다.
“아…….”
예고도 없이 겹쳐져 온 입술에 눈이 감겼다.
진득한 입맞춤에 호흡이 절로 가빠졌다.
이 공간엔 둘만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서로에게 빠져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