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화
“일이 틀어지면, 난 곧바로 돌아설 거다.”
델테르는 발을 미리 뺄 생각부터 했다.
“그렇게 하세요. 저는 리온을 지킬 테니, 전하께선 제니스 황녀님을 지키세요.”
“내 일을 내가 알아서 하지.”
퍽이나.
그런 사람이 황녀를 잔뜩 겁에 질리게 만들었어?
“자, 그럼 이제 이야기해 보세요.”
“뭘 말이지?”
“제니스 황녀님을 어떻게 대하신 건지.”
내 질문에 델테르는 퍽 당황한 기색이었다. 황녀를 대하는 태도를 묻는 내가 어이없겠지.
하지만 이건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그녀가 황실이 안전하다고 판단한다면 리온에 대한 집착도 줄어들 테니까.
애초에 내가 처음부터 델테르를 갱생하려 했다면 좋았을 텐데.
“내가 왜 영애에게 그런 부분까지 말해야 하지?”
“그래야 황녀님과의 관계가 개선될 테니까요.”
“……웃기는군.”
나는 소파에 앉아 옆을 툭툭 쳤다.
델테르는 여전히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내 옆에 털썩 앉더니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어디 한 번 지껄여 봐라는 얼굴인데…….
“황녀님은 전하를 두려워하고 있어요.”
“알아.”
“그 원인은 당연히 황태자 전하께 있고요.”
“…….”
델테르는 침묵했다. 자기가 생각해도 틀린 말은 아닌 모양이지.
“리온과 델테르 전하의 손목에 문양이 생겼잖아요? 이건 어떻게 보면 좋은 기회예요.”
“한 번도 없던 케이스가?”
“반대로 말하면 황녀님이 반려를 선택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죠.”
정설대로라면 반려는 한 명뿐이다.
두 명이 나타났다고 해도 누군가와 반려를 맺게 된다면 다른 쪽의 문양은 사라질지도 모른다.
물론, 이건 가설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한 가지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니긴 했다.
저주를 더 큰 저주로 덮어 버린다면 그 힘에 의해 약한 저주는 효력이 상쇄될 터.
그 보석의 저주에 어떤 게 걸려 있을지 모르는 게 치명적인 단점이고.
“그래서 제니스가 날 선택하게 만들겠다?”
“네, 그게 가장 좋은 거잖아요.”
“……가장 어렵다고는 생각 안 해 본 모양이군.”
델테르는 내 계획이 실현될 가능성이 없다고 여겼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게 가장 평화로운 해결책인걸?
사람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사랑한다면 노력이라도 해야지.
“그보다 우린…….”
“제가 뭔가를 좀 찾다가 알아낸 게 있어요.”
“그게 뭐지?”
“황녀님이 전하를 밀어내는 가장 큰 이유는 배다른 남매여서지 않나요?”
“…….”
너무 직설적으로 말했나. 하지만 나라도 그랬을 것 같다.
한때 제국에는 혈통을 지키기 위해 형제간의 결혼도 장려했었다. 그게 지금은 그러지 않고 있지만.
각설하고, 내가 하려던 말은 오해란 이야기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기가 안 맞아 떨어져서요.”
델테르는 내 말이 허무맹랑하게 들리는 듯했다.
그래, 황제도 그리 알고 있었으니까. 하다못해 에드가도 황녀가 황제의 핏줄이라 여겼다.
그런데 한 가지 놓친 게 있었다.
“지금까지 황실에 신성력을 가진 이가 태어난 적이 있나요?”
“아니, 단 한 번도 없었지.”
“맞아요. 그렇기에 제니스 황녀님의 존재가 돋보이는 거죠.”
델테르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알아차리셨나요? 제니스 황녀님이 정말로 황제의 핏줄을 이었다면, 신성력을 가질 수 없어요.”
“……그걸 놓치다니.”
아마도 황제는 의심은 떨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황녀를 곁에 두는 것은 제 권위 때문이었다.
제국에는 문양이 존재하는 것처럼 불변율의 법칙이 있었다.
신을 대리하는 자는 황제의 핏줄이 아닌 곳에서 태어난다.
아마도 제니스는 사생아라 사람들의 의심을 빗겨 나간 듯했다.
나 역시 처음엔 그걸 믿었으니까.
“검사를 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러도록 하지.”
“황테자 전하만 알고 계세요. 확실하진 않으니까요.”
데펠로아가 낳은 아이를 뒤늦게 데려온 것도 그렇고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제니스가 황제의 핏줄이 아니게 되면 얼추 의문이 풀린다.
“다정하게 대하세요. 강압적이지 않고, 진심으로.”
“하? 누가 보면 연애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하겠군.”
“적어도 황태자 전하처럼 하면 싫어한다는 건 알고 있어요.”
내가 그리 많은 연애를 한 건 아니지만, 제니스의 말을 추려 보면 내가 생각하는 게 맞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럼, 저는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운 것 같아서 들어가 볼게요.”
“지금 여기서 나간다면 오해를 살 텐데.”
“걱정 마세요. 바보 같이 황태자 전하와 같이 있는 공간에서 나가진 않을 거니까요.”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이지?”
델테르는 팔짱을 끼곤 나를 보았다.
저, 저 오만한 눈빛.
아직도 정신 차리려면 멀었네.
나는 고개를 살짝 젓고는 테라스 쪽으로 갔다.
아래를 내려보니 2층 정도의 높이였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어요?”
“아! 제길!”
델테르가 정신이 번쩍 든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녀가 리온에게 뭔가를 하고 있는 것 같았어. 그래서 너를 인질로 삼을 생각으로 들어온 거였는데!”
“아니 그걸 잊으면 어떻게 해요!”
“네가 사람의 혼을 쏙 빼놓게 말을 했지 않나!”
진짜 어이가 없어서.
나와 델테르는 너나 할 것 겉이 커튼 쪽으로 다가갔다.
이내 나는 멈칫하곤 몸을 돌렸다.
다른 이들은 모르고 있지만, 나는 내 몸의 변화를 잘 안다.
“전하께선 그쪽으로 나가세요. 저는 이쪽으로 갈 테니까요. 결과가 나오면 알려 주세요.”
“설마!”
델테르가 더 말을 걸기도 전에 테라스를 훌쩍 넘어갔다.
화들짝 놀란 그가 테라스 쪽 아래로 몸을 내밀었다.
나는 가뿐하게 바닥에 착지한 후 태연자약하게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 * *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나는 연회장 문을 열고 들어갔다.
“꺄, 꺄아아악!”
“조심하세요! 빨리 대피를!”
사람들의 비명 소리와 함께 혼비백산한 모습이 보였다.
아까만 해도 잠잠했는데 일이 터진 모양이다. 나는 다급히 리온을 찾았다.
제니스와 함께 있었다고 했는데.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가며 리온을 불렀다.
“리온! 리온 어디에 있어!”
나의 애처로운 외침에 엘이 다급히 내 손을 잡았다.
“아가씨 피하셔야 합니다.”
“무슨 일이예요?”
“리온 님이, 폭주를…….”
“폭주라뇨?!”
그럴 리가 없는데. 이제 컨트롤까지 거의 완벽하게 해냈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폭주하다니.
나는 엘의 손을 뿌리치곤 사람들의 반대 방향으로 내달렸다.
헉, 헉.
숨을 거칠게 몰아쉰 나는 이내 무대 한 가운에 고통에 울부짖는 리온을 발견했다.
망설일 것도 없이 곧바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리온!”
와락.
그를 끌어안은 나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아, 아윽!”
엄청난 마력량에 온몸이 찢어질 것 같았다. 그럼에도 놓을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리온은 혼자서 이 모든 걸 감내해야 했으니까.
“리온, 나야. 내가 왔어.”
그의 이름을 반복해서 불렀지만 응답하지 않았다.
몸 안이 뒤틀리고 살갗이 찢겨져 나갈 것 같은 통증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허, 허억. 리, 리온…….”
제발 정신 차려. 대체 뭐 때문에!
떠지지 않는 눈을 힘겹게 떠 앞을 보았다.
바닥에 주저앉아 몸을 떨고 있는 제니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설마…….’
제니스가 리온의 마력을 증폭시켰다면?
사람들에게 위험성을 인식하게 하고 황실에서 감시할 목적으로 일을 벌인 거라면.
나는 제니스의 행동에 소름이 돋았다.
어쩜 그녀는 이토록 이기적일 수 있을까.
어떻게 내가 리온을 지켜왔는데.
“리온 괜찮아. 나야.”
“에, ㄹ…….”
나는 애써 신음을 참아 내며 리온의 등을 다독였다.
“그래, 나야. 괜찮아. 아무도 널 해치지 못해.”
공포에 질린 리온의 눈동자를 보니 눈물이 나왔다.
멈추지 않고 리온의 이름을 계속 불렀다. 제니스가 아니어도 될 거야.
리온의 폭주를 막아낼 수 있어. 그녀가 리온의 아픔을 헤집도록 놔둘 수 없어.
그러니까 감내해야 해.
온몸이 사라질 것 같았지만 버텨 냈다.
‘저건?’
그 순간 리온의 품에 있던 붉은 보석이 웅웅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이게 왜.
나는 보석을 리온의 품에서 꺼냈다.
투욱-
내 손이 닿자마자 보석의 빛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리온도 이성이 돌아왔다.
“엘, 르……?”
“정신이 돌아왔구나.”
나는 리온을 향해 괜찮다는 듯 웃었다.
새하얀 드레스에는 자상으로 인해 붉은 피가 여기저기 피어나 있었다.
마치 장미꽃으로 수를 놓은 것처럼 보였다.
“엘르!”
리온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나를 겨우 안아 올렸다.
“와, 진짜…… 죽는 줄 알았네.”
조금만 더 지속되었다간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이것도 리온의 힘을 받았기에 버틴 거지만.
리온의 붉은 눈동자도 이내 검은색으로 돌아왔다.
그는 나를 품에 안은 채 제니스를 응시했다.
델테르는 그런 제니스를 일으켜 세웠다.
엉망이 된 연회장에 델테르의 개들과 아버지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쯤 하지.”
그와 동시에 아버지가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오늘 일은 적법한 수사를 통해 밝혀지게 될 테니 각자 돌아가 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버지…….”
나는 에드가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진짜 왜 이렇게 늦게 와요. 다 끝나고 와서 폼이나 잡고 말이야!
“그래도 되겠습니까?”
에드가는 황제를 향해 물었다.
그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제야 나와 리온은 아버지의 그림자와 함께 연회장을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