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화
음악이 흘러나오고, 나와 리온은 서로 손을 맞잡고 춤을 췄다.
마음 한편은 불안했지만, 그래도 이 시간을 놓치고 싶진 않았다.
“리온, 나중에 무슨 일이 생겨도 참아야 해.”
“……내가 먼저 말하려고 한 건데.”
설마 우리 둘 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나는 불안해져 리온을 잡아당겨 귓가에 속삭였다.
“폭주하면 안 돼. 네 정체를 드러내는 건 위험해.”
“알아. 걱정하지 마.”
리온이 옅게 웃자 귓가가 간지러웠다.
“다른 이들한테도 상냥하게……아니다. 그럴 필요는 없겠어.”
그러지 않아도 영애들의 시선이 떨어질 줄을 몰랐으니까.
리온과의 춤이 끝나갔다.
아쉽지만, 돌아가며 춤을 추는 것이 법도였으니 보내 줘야 했다.
다음 차례는……세상에.
황태자라니!
나는 눈을 굴려 빠져나갈 방법을 강구했다.
그러나 누가 봐도 내빼는 모양새였기에 하는 수 없이 황태자의 손을 맞잡았다.
“빠져나갈 궁리를 하다가 포기한 모양이군.”
“네, 뭐.”
나의 심드렁한 대답에 델테르는 조소했다.
“이젠 놀랍지도 않아. 일을 끝없이 만들어 내는군.”
“전하께는 잘된 일이지 않나요? 오늘 과연 황녀님이 성녀로 임명되는 것만 준비했다고 생각하셨어요?”
“그럴 리가. 아버지와 거래를 했겠지.”
“그걸 제가 막았어요.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웃기는군.”
델테르의 표정이 험상궂게 변했다. 나는 틈을 놓치지 않고 발을 살며시 밟았다.
“어머, 실수했어요.”
“내 신경을 긁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실수인데 전하께서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죠?”
활짝 웃으며 델테르를 빤히 보았다. 조금 무섭긴 하니까 잠시 자리를 피해 있어야겠다.
“음악이 끝났네요. 이만 놓아주시겠어요?”
여전히 내 손을 놓지 않는 델테르로 인해 그 자리에 꼼짝없이 묶였다.
“영애, 난 말이야. 거슬리는 사람을 참 싫어해.”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신경을 긁지 마.”
“노력해 보도록 하죠.”
말이 통하지 않는 것 같아 그의 손을 잡아 떼어 냈다.
무슨 힘을 이렇게 주고 있어. 아프잖아.
델테르는 제 손이 떨어져 나간 것을 보며 황당한 표정을 했다.
“……지금 떼어 냈나?”
“음악이 끝났으니 파트너 교체해야죠.”
또다시 잡히기 전에 나는 황급히 그에게서 떨어졌다.
춤을 더 출 기분도 아니었으므로 테라스로 향했다.
* * *
리온은 갑자기 엘르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불안했다.
‘또 어딜 간 거지?’
분명 아까 델테르와 춤을 추고 있었는데.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했든 간에 별로 좋은 대화는 아니었을 터.
저와 엘르의 약혼을 공증받은 후 제니스의 차갑게 얼어붙은 표정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엘르의 곁에 있어야 마음이 편할 것 같군.
리온은 곧장 엘르를 찾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러나 제 옷깃을 붙잡는 손에 의해 멈췄다.
“리온 님, 이번엔 저와 춤을 출 차례예요.”
“……거절해도 되지 않습니까?”
“곤란하실 걸요? 제 첫 춤 상대니까요.”
그러고 보니 제니스 황녀는 계속 춤을 추지 않고 있었다.
저와 추기 위해 기다린 건가?
거절도 하지 못하게 첫 춤 상대로 지목하다니.
“저는 역시 안 될 것 같습니다.”
리온은 다시금 거절했다. 엘르를 찾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그러나 제니스는 앞을 비켜 주지 않았다.
“잘 생각해요, 지금 이대로 그냥 간다면 엘르 영애가 곤란해질 일을 만들고 말 테니까요.”
리온은 하는 수 없이 제니스의 손을 잡았다.
마음을 애써 억눌러도 자꾸만 터져 나오는 감정에 입술을 더욱 세게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지만 멈추지 않았다.
“거스르려고 하니 탈이 나잖아요.”
제니스는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리온의 입술을 보았다.
안 그래도 붉은 입술이 피를 머금자 더욱 붉게 보였다.
“저를 죽이실 건가요?”
“필요하다면.”
“잔인하시네요. 어떻게 반려에게 그런 말을.”
상처를 받은 얼굴을 했지만, 목소리는 차갑기 짝이 없었다.
아마도 오늘 일로 마음의 변화가 생겼을 테지. 그거야말로 리온이 바라는 바였다.
“황실을 벗어나고 싶거든 혼자 힘으로 하십시오. 제게 기댈 생각 말고.”
엘르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힘으로 올라왔다.
에드가의 손에 죽지 않기 위해, 그리고 독립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겪고 이 자리에 왔다.
그런데 제니스는 뭘 하고 있는 것인가.
반려만 믿고, 제게 기대어 뭔가를 해결하려 하고 있지 않은가.
그게 안타까웠다.
“사람의 마음은 원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리온은 또다시 제니스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마력을 폭주시켰다.
핏줄이 툭툭 불거지고 숨이 벅찼지만, 참았다.
몇 번이고 제 몸을 혹사시키는 일이었기에 금세 무리가 느껴졌다.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폭주할 때는 온전한 정신으로 제니스를 대할 수 있었으니까.
“어떻게……그게 가능하죠?”
제니스는 혼란스러웠다. 반려의 문양이 있음에도 왜 리온은 흔들리지 않을까.
저를 보는 눈빛에는 어떠한 애정도 없었다.
오히려 저를 빤히 응시하고 있는 델테르의 시선에 가슴이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설마.”
강하게 느껴지고 있는 게 혹시 리온의 몸에서 나오고 있는 마력인가?
말도 안 되는 양이었다. 그대로 가다간 몸이 견디지 못하고 부서지고 말 것이다.
“그만둬요!”
“나는 당신에게서 나도 엘르도 지켜 낼 겁니다.”
리온의 말에 제니스의 마음은 또다시 부서져 내렸다.
“……당신의 그런 마음이 탐이 나요. 갖고 싶어.”
절대적인 복종, 그리고 절대적인 헌신.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마음.
부러웠다. 제니스는 그런 리온을 갖고 싶었다.
그래서 욕심을 부렸다.
“미안해요. 하지만, 나도 물러서고 싶지 않아요.”
제니스는 리온을 부둥켜안고 힘을 증폭시켰다.
‘걸려들었네.’
리온의 검은색 눈이 붉은빛을 머금더니 초점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 모든 것을 보고 있던 델테르는 곧장 엘르를 찾아 나섰다.
지금 당장 리온을 멈추지 않으면, 제니스가 위험했다.
다른 이들은 느끼지 못하고 있지만, 그는 반려로서 제니스의 위험을 알아차렸다.
무리하게 뭔가를 하고 있었다.
그건 아마도 리온의 정신을 흩뜨려 놓기 위해 자신의 힘을 불어넣는 것이겠지.
델테르는 곧이어 커튼이 쳐져 있는 테라스로 향했다.
* * *
“아, 한결 낫네.”
나는 정원을 바라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테라스만큼은 나오지 않으려 했는데 쉴 곳이 마땅치 않았다.
아버지의 그림자도 나를 보고 있을 테니 별일 없을 테고.
내게도 힘이 있으니 안심이 되었다.
음악이 계속 나오고 있는 걸로 봐선 아직도 춤이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리온은 괜찮으려나.”
걱정이 되긴 했지만, 잘 버텼으니 괜찮겠지.
아직 연회가 끝나려면 멀었으니 긴장을 늦춰선 안 된다.
숨을 조금 돌렸으니 연회장으로 들어가야 했다.
아버지도 오실 테고, 안 보이면 걱정할 테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드레스를 툭툭 털었다.
“여기 있었군.”
그러나 곧이어 커튼을 열고 들어오는 이로 인해 모든 계획은 무산되었다.
“……전하.”
이건 곤란한데.
매우 아주 곤란한 상황이었다.
지금 이 장면은 내 죽음과 매우 흡사하게 연결되지 않은가.
역시 그냥 사람들에게 치여도 연회장에 있는 게 나았으려나.
“커튼이 쳐져 있었는데 들어오셨네요. 전하께선 기본 예의도 잊으신 모양입니다.”
“내가 모르고 왔을까?”
그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검을 빼 들었다.
“알고 왔다면 더 심각하죠. 손에 들린 걸 보니 상황이 안 좋은 건 알 것 같네요.”
나는 입 안이 바싹 타들어 갔지만 태평하게 맞받아쳤다.
그의 허리춤에 찬 서슬이 퍼런 검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이날을 위해 날을 간 것도 아닐 텐데 어쩜 저렇게 반짝일까.
델테르가 지금 여기서 날 해하려 하는 걸까?
왜 그를 이토록 침착하지 못하게 이끌었는지 궁금했다.
“지금 여기서 절 죽이려 하신다면 황실이 곤란해질 거예요.”
“상관없어.”
델테르는 검을 들어 내 목을 겨눴다.
“과연 내가 너를 죽인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을까?”
“많은 것이 달라지죠. 예전의 저는 아닌지라.”
날카로운 검이 살갗을 짓누르는 통증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나는 황급히 손을 들어 그림자를 저지했다.
그들이 끼어들면 거래를 제안하는 것도 무산된다.
“전하께서는 황제가 되고 싶지 않으신가요?”
“겁은 나는 모양이군. 쓸모없는 소리를 하는 거 보니.”
“이미 황실은 썩을 대로 썩었어요. 그걸 모르진 않으실 텐데.”
“……정말 죽고 싶은 건가?”
“어차피 저 죽일 생각이시잖아요.”
“하.”
이런 상황에서도 당당한 내가 어이없겠지.
하지만 나는 숱하게 이 장면을 떠올렸다.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지 대책을 세우면서.
“황제 폐하께서 제니스의 어머니에게 한 행동을 알고 계시나요?”
모르진 않겠지.
그리고 나와 어떤 관계인지도 알 테고.
“전하께서 황제가 된다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데.”
“지금 네가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지 아나?”
“알죠. 그런데 뭐 죽을 사람이 못할 말도 없을 것 같은데요. 황녀 전하께서 자신의 세력을 모으고 있어요.”
“……제니스가?”
“그래요, 어쩌면 황제와 전하까지 다 몰아 버릴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제니스는 성녀로.”
“성녀가 되었다고 해서 황제가 되지 못한다는 법은 없어요. 오히려 두 권력을 쥐게 될 테니 힘이 더 세지겠죠.”
델테르는 믿고 싶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검에 들어간 힘이 조금은 풀렸다.
“저는 제니스 황녀님을 해치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그러나 리온에게 족쇄를 채우고 싶지도 않고요.”
“그래서?”
“그러니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자고요. 어차피 우리들은 피해자잖아요.”
황제가 저지른 모든 일로 인해 틀어지게 되었으니까.
그 책임은 황제만 지고 가면 될 일이었다.
내 말에 델테르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나는 검 날을 손으로 밀어내며 웃었다.
“좋은 거래가 되겠네요.”
아직 그에게 물을 죗값은 남았지만, 같은 적을 몰아낼 때까지는 동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