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9화 (109/120)

제109화

연회 날이 되었다.

다행히 드레스는 과하게 느껴지진 않지만 눈에 잘 띄었다.

새하얗긴 하지만, 금빛 자수로 시선을 분산했다.

차분한 디자인으로 인해 들뜬 느낌이 들지 않아 좋았다.

문제는 하얀색 슈트를 리온이 입고 올까인데.

“리온에게 잘 어울릴 것 같은데.”

“하지만 저는 입고 와 주실지…….”

“입고 올 거야. 올 수밖에 없게 만들었거든.”

조금 치사하긴 했지만. 그 문구를 본 이상 입고 올 것이다.

“잘하고 오셔야 해요!”

“걱정 마.”

나는 고개를 들고 기합을 넣었다.

귀족들 역시 판이 바뀐 걸 조금은 눈치를 챘을 텐데.

어쩌면 황실과 우리의 사이가 좋아졌다고 착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곧이어 화룡점정을 찍어 줄 베르뎅 목걸이를 목에 찼다.

“정말 이 갈았나 봐.”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디자인이었다.

빛에 따라서 오묘한 빛을 내는 보석에 절로 시선이 갔다.

커팅을 어떻게 한 거지? 이 안에 하트 모양이 보이는 것 같은데.

정말이지 재능은 타고났다니까.

“아가씨 이것도 끼셔야 해요!”

디리아가 황급히 문양 액세서리를 건넸다.

집에서는 풀고 있어서 그런지 착용하려니 귀찮았다. 하지만 이걸 갑자기 빼고 다니면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까.

“베르뎅은 진짜 변태가 아닐까?”

어쩜 액세서리 착용까지 생각을 하고 만든 건지 조화가 장난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목걸이에서 드레스로 그리고 손목의 액세서리로 향했다.

“오늘도 판매가 쭉쭉 올라가는 소리가 들리네.”

이걸로 돈을 얼마나 많이 벌었는지.

내 이름으로 된 돈을 다른 사람이 듣는다면 까무러칠 것이다.

어쩌면 아빠보다도 더 많이 모았을지도 몰라.

웬만한 상위 귀족보다 재력은 내가 더 셀지도?

악착같이 벌고 모은 보람이 있다니까. 후원을 해도 이토록 돈이 남았으니 말 다했지.

“다녀올게.”

나는 씩 웃으며 방을 나섰다. 떨리기보다는 설렜다.

오늘 일어날 일들이 부디 내가 알던 것과는 달랐으면 했으니까.

저택을 나가려는데 소파에 앉아 있는 아버지가 보였다.

“오늘 안 가시나요?”

“좀 있다 갈 예정이다. 그놈이 마중을 올지 모르겠지만.”

“온 것 같은데요?”

나는 문 앞에 서 있는 새하얀 옷차림을 발견했다.

리온은 머뭇거리더니 이내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진짜 너무 잘 어울리잖아!

리온과 내 옷차림을 본 에드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가 보면 결혼이라도 하는 줄 알겠군.”

“그걸 노린 거예요. 어때요? 잘 어울리죠?”

나는 빙그르르 돌며 옷을 보여 줬다. 나를 보고 있는 리온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혹시 모르니 그림자가 지켜보고 있을 거다.”

“걱정 마세요.”

내게 힘이 생긴 이상 당하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이 힘이 어디서 왔는지 고민을 많이 했지만, 리온이 나를 치료한 뒤로 그의 힘을 흡수해서 생긴 것 같았다.

우리 가문은 대대로 흡수하는 힘을 가졌으니까.

리온이 내게 손을 내밀며 에스코트 했다.

에드가는 영 탐탁지 않는 눈빛으로 우릴 봤지만, 내버려 뒀다.

조금은 포기한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이전처럼 으르렁대지 않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리온, 그런데 왜 마차가 없어?”

“명색이 마탑주인데 마차를 타고 가는 건 없어 보이잖아.”

“……그래서?”

“간편한 이동 수단을 좀 쓰려고.”

리온의 말에 나는 황급히 팔을 붙잡았다.

“수, 수도에서는! 텔레포트 금……!”

지란 말을 채 마무리 지을 수 없었다.

* * *

“……속이 너무 안 좋아.”

“가까운 거리여서 괜찮을 텐데.”

리온의 뻔뻔한 말에 나는 입을 떡하고 벌렸다.

자기야 내성이 생겼으니 괜찮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그리고 전부 다 쳐다보잖아.”

“엘르, 텔레포트 아니었어도 쳐다봤을 걸.”

“……그건 맞지만.”

연회에 참석한 귀족들이 수군대며 나와 리온을 보았다.

연회장에 들어서는 순간 더 많은 시선을 받을 테지.

“별일 없을 거야.”

“그래야지.”

나와 리온은 손을 꽉 맞잡았다. 부디 걱정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기를…….

연회장에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아무래도 황실에서 주최한 거다 보니 유명 인사들은 물론이거니와 상위 귀족들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어머, 벨루아 가문의 엘르 나타시아 영애 아닌가요?”

분명 내가 입장한 것을 들었을 텐데 모른 척 다가오다니.

나는 싱긋 웃으며 소르베 공녀를 맞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소르베 공녀님.”

“사교계에서 이렇게 마주하게 될 일이 생길 줄은 몰랐는데. 벨루아 가문이 수도로 왔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네, 황제 폐하께서 귀환을 허락해 주신 덕분이죠.”

“흐음, 그렇군요. 예전에 있었던 소란은 들어서 알고 있지만…… 그 시종과 눈이라도 맞을 줄 알았더니.”

기억도 안 나는 과거의 일을 들추다니. 친한 척 다가왔을 때부터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원래 연애란 그런 거 아니겠어요?”

리온이 그 시종이란 말은 할 수 없으니 둘러대야지.

소르베 공녀는 코웃음을 치더니 나를 빠르게 흘겨보았다.

“이런 자리에서 그런 드레스라니.”

“신문도 났겠다 눈도장 쾅 찍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그나저나 아직도 액세서리가 없으시군요.”

나는 문양을 가리지 않은 공녀의 손목을 보며 옅게 웃었다.

“뭐, 굳이 필요하진 않아서.”

거짓말.

나는 베르뎅에게 액세서리 예약 대기자도 보고 받고 있었다.

수요가 얼마나 될지 알아야 했기에 귀찮아도 본 건데 이렇게 쓰일 줄이야.

소르베 공녀도 대기자 중 한 명이었다.

나는 씩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가 부채로 입을 가리며 속삭였다.

“공녀님께 딱 어울리는 액세서리가 있습니다. 곧 저택으로 갈 테니 부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네요.”

“……그럴 필요는 없는데. 뭐, 엘르 영애의 선물을 거절하면 민망할 테니 받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하나뿐인 디자인이라 마음에 드실 거예요.”

희소성이 있다는 말에 소르베 공녀의 얼굴이 활짝 폈다.

가격도 비싼데 그걸 그냥 거저 준다니 좋겠지.

“어쩐지 엘르 영애와 잘 통할 것 같네요. 약혼 축하해요. 잘 어울리는 한 쌍이군요.”

소르베의 축하에 주변에서 머뭇거리던 이들까지 다가와 너도나도 할 거 없이 축하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다들, 아 정보 하나 드릴게요. 조만간 액세서리 물량이 풀릴 거예요.”

“어머나 정말인가요?”

“당분간 수리도 할인할 예정이니 다들 잊지 말고 꼭 이용해 주세요.”

내 말에 귀족들이 입꼬리가 씰룩였다.

유행하고 있었으니 더 많은 디자인과 물량을 가지고 싶을 터.

돈이 있어도 팔지를 않으니 더욱 애가 닳았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분이 이번에 마탑주가 된 리온 데이비스 님이신가요?”

다른 영애가 힐끔 리온을 보더니 수줍게 물었다.

그래, 리온의 얼굴을 보면 저런 표정이 나오는 것도 이상할 게 없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온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 이제 곧 황녀님이 나오실 테니 저희 앞으로 갈까요?”

나는 서둘러 말을 돌렸다.

이토록 많은 사람이라면 리온에게 인사를 한다고 쳐도 기억하기 힘들 터.

그의 약점을 알릴 필요는 없었다.

때마침 음악이 흘러나오고 제니스가 성녀 복을 입은 채 델테르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제니스 아벨 보니타 황녀님과 델테르 카베제르 보티나 황태자 전하가 드십니다.”

두 사람 다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잔뜩 곤두섰네.’

오늘은 마주치지 않는 게 좋겠어. 리온의 곁에 딱 붙어 있어야지.

이윽고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은 제니스의 의복에 집중했다.

“어머, 저건…….”

“드디어 성녀로 임명이 되나 봐요. 세상에!”

모두가 기대에 찬 눈동자로 단상을 보았다.

제니스는 황제의 앞으로 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오늘 이 연회는 제니스 황녀의 성녀 임명식을 위해 연 것이다.”

황제는 나와 리온을 보더니 시선을 거뒀다.

제니스의 임명이 끝나고 나면 나와 리온의 약혼 공증을 알릴 테지.

“제니스 아벨 보니타 황녀는 지금까지의 공을 인정하고, 그대의 몸 안에 깃들어 있는 신성력을 인정하는 바. 성녀로 임명한다.”

황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환호성이 연회장을 가득 메웠다.

제니스는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며 모두의 앞에 서서 싱긋 웃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이내 나와 리온에게 향했다.

살기 어린 눈동자에 솜털이 곤두섰다.

이윽고 황제는 나와 리온의 약혼을 인정한다고 말했다.

그 말이 더욱 큰 파장을 일으켰지만, 나와 리온은 덤덤하기 짝이 없었다.

“그럼 두 사람은 반려가 아직 없는 건가요?”

역시나 이 질문은 피할 수 없었다.

나는 처연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저었다.

“저희는 서로의 반려는 아니에요. 하지만 그 누구보다 사랑하고 있답니다.”

리온의 품에 안기다시피 한 나는 속눈썹을 가늘게 떨었다.

리온 역시 나를 꽉 껴안으며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반려가 나타나게 되면 어떻게 할 생각이죠?”

제니스는 단상에서 내려오며 물었다.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눈동자가 우리에게 향했다.

대중들은 이미 원하는 답이 있었다.

자기들은 그러지 못했기에 더더욱 바라는 그것.

“저흰 문양에게 지지 않을 거예요.”

내 말에 곳곳에서 안타까운 탄식이 이어졌다.

황제는 나의 연기에 활짝 웃으며 음악을 더욱 키웠다.

“이렇게 좋은 날, 모두에게 행복한 날이 되었으면 하는구나.”

황제의 말과 함께 모두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의 곁에 모든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는 황후와 델테르는 웃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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