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화
“저주를 풀 방법이 여기에 있을지.”
리온은 보석을 보며 신음을 내뱉었다.
예민하고 응축된 마력이 느껴진다. 잔뜩 날을 세우고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만 어떻게 하면 될 것 같은데.”
며칠 동안 보석에 매달렸지만 까다롭게 구는 통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문서도 남아 있는 게 없고.”
리온의 기억도 어릴 적에서 그쳤으니 골머리를 앓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제게 보석에 대한 것을 알려 주기라도 했다면 달라졌을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리겠어. 조금 더 컨트롤을 할 수 있는 뭔가가 필요한데.”
보석을 상자 안에 넣어 빤히 쳐다보았다.
붉은색 눈동자가 똑 닮은 보석을 품었다. 마치 서로에게 반응하듯 이끌려 한참을 쳐다봤다.
똑똑똑.
“마탑주님!”
카벤의 목소리에 리온은 책상 위 보석을 바라보던 눈을 들어 문을 쳐다봤다.
‘빠르네, 순식간에 소문이 돌겠어.’
엘르의 말을 떠올려 보면 자신 때문에 카벤이 저렇게 놀라 달려오는 것일 테다.
미리 알고 있었던 것과 모른 채 당하는 것은 차이가 컸다.
카벤은 후자였으니, 아마도 놀란 얼굴로 방으로 들어서리라.
그리고 리온의 예상은 들어맞았다.
“이거 오늘 자 신문 보셨어요?!”
카벤은 숨을 헐떡이며 말을 내뱉었다.
무덤덤한 리온의 반응에 맥이 탁하고 풀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알고 계신 겁니까?”
리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며칠 뒤 연회에도 참석하실 건가요?”
“그래야겠지.”
“와!”
어떻게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모든 걸 혼자 정할 수 있을까.
리온은 카벤의 속마음을 읽었는지 정리된 서류를 건넸다.
“일은 다 끝냈으니 걱정 말고.”
“……와.”
이러니까 더 재수 없어.
분명 근래 바빠 보였는데 언제 일은 다 끝낸 걸까.
카벤은 서류를 검토하는 내내 입을 떡하니 벌렸다.
따질 것도 없이 완벽했다.
“다들 난리가 났습니다. 벨루아 가문이 수도에 왔다는 말도 퍼졌어요.”
“오늘 온다고 하더군.”
“……말한 제가 잘못했군요.”
카벤은 리온에게 알릴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호들갑을 떤 제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런데 개중에 이런 소문도 돈다고 하던데…… 리온 님이 제니스 황녀님의 반려란 이야기가…….”
그는 힐끔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알아.”
“……그러시군요. 저희들이 또 알아야 할 사항이 있습니까?”
“언제부터 마탑이 이런 시시콜콜한 사생활에 관심이 많았지?”
시시콜콜하다니! 황실과도 엮여 있는데.
카벤은 속으로 혀를 찼다. 도대체 저 인간의 머릿속은 무슨 생각으로 가득 찬 건지.
제 외에 다른 것은 무섭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다 생각이 있으시겠죠.”
리온은 턱을 괴곤 카벤을 빤히 보았다.
“……그런데 너. 루비온 가문의 보석에 대해서 좀 아나?”
“루비온 가문의 보석이라……. 알다마다요.”
의외였다.
카벤은 제 책상에서 서랍을 뒤져 보더니 이내 오래된 책 하나를 꺼냈다.
“이게 우연히 마탑 내 도서관에서 찾은 겁니다.”
“마탑 내에?”
“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금서에 있더라고요.”
“이것 좀 봐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최근 들어 루비온 가문에 대해서 파헤치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어차피 물어도 대답 안 해 줄 게 뻔했다. 빨리 그의 일을 처리하도록 도와주는 게 나은 길이리라.
카벤은 곧장 책에 집중하는 리온을 놔두고 나왔다.
“아, 정말 종잡을 수가 없다니까. 그런데 이제 나를 바로 알아보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최근 들어 리온이 사람을 헷갈리는 경우가 드물어졌다. 가끔 말도 안 되게 헷갈리긴 했는데.
“뭐, 다행이네. 이제 괜찮아지신 것 같으니까.”
카벤은 애써 어깨를 으쓱이곤 제 방으로 향했다.
* * *
나는 심히 고민에 잠겼다.
도대체 뭘 입고 가야 하지?
이번 연회는 굉장히 중요했다.
남들의 시선도 그렇지만, 리온을 알리는 자리이기도 했으니까.
그것도 내 약혼자로서.
게다가 벨루아 가문의 귀환을 공포하는 셈이기도 했다.
“이건 어때?”
“음, 약하지 않을까요? 조금 더 디테일이 들어갔으면 좋겠는데…….”
디리아도 굉장히 세심하게 드레스를 골라 줬다.
아침부터 계속 여러 가지 시안을 받아서 추려 내고 있었다.
본 것만 해도 수십 벌이건만, 눈에 딱 들어오는 게 없단 말이지.
“리온의 옷은?”
“저녁에 보내 준다고 들었어요.”
“그래? 맞춰서 입고 가면 좋을 것 같은데.”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두 분의 약혼을 알리는 자리이기도 하니까요.”
디리아는 두 손을 모아 눈을 깜빡였다.
또, 또 마음대로 상상의 날개를 펼치고 있구만.
리온에게 반려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디리아의 환상을 와장창 깨 버리게 될 터.
그래서 나는 그녀를 지켜 주기로 했다.
“좋아, 이게 좋겠어.”
“어머 이걸로 해도 괜찮을까요?”
“뭐, 어때.”
새하얀 드레스는 결혼을 연상하게 했다.
그걸 노리는 거였으니까.
분명 제니스 역시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오겠지. 심지어 성녀 복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올 터.
애 좀 타 보라지.
“리온도 비슷하게 해 달라고 전해 줘. 흰색에 금빛으로 자수를 놓는 게 좋겠어.”
벨루아 가문의 이미지는 어두침침하고 검은색의 드레스겠지만.
이제 이미지도 변신했으니 좀 달라질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붉은 머리카락까지 더해지면 얼마나 무섭겠는가.
“그럼 이대로 전달할까요?”
“응, 그렇게 해 줘.”
내 말에 디리아는 주섬주섬 시안들을 한 아름 안고 방을 나섰다.
연회까지 이틀.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수도까지 왔으니 계획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도 알아야 했다.
그동안 일이 너무 바빠 신경을 쓰지 못했지 않은가.
반역을 하지 않고 황권을 무너뜨릴 방법은 간단했다.
마탑과 하나가 되어 정당한 권력을 세우는 것.
델테르 역시 아버지를 몰아내는 것엔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그는 황제의 자리에 앉고 싶어 했다.
권력 욕심이 있는 자였으니 영리하게 머리를 굴릴 테지.
나는 델테르에게 그걸 거래로 내세울 참이었다.
‘황후가 움직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테니 그도 초조하겠지.’
그녀는 곧이어 제니스의 목을 점점 조여 갈 것이다.
그래야 델테르가 다른 손을 잡을 테니까.
제니스를 사랑한다면 그녀를 살리기 위해 뭐라도 할 터.
아버지의 반역을 막아냈으니 도려내는 것은 내 몫이었다.
그동안 벌어온 돈을 이날을 위해 얼마나 아낌없이 쏟아 부었는지.
힘든 백성들에게 쌀과 생활을 위한 도움을 주었다.
벨루아 가문의 정보상 이름으로.
그들에겐 이미 우리 가문의 이미지는 달라진 지 오래였다. 그걸 황실만 모르고 있는 눈치지만.
암암리에 도움이 필요한 자들은 벨루아 정보상을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현재의 황실에 적의가 가득했다.
황제는 욕심이 많았고, 그가 해왔던 행위들은 사라지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자, 그럼 이제 움직여 볼까.”
제니스의 성녀 임명식 날. 모든 것이 달라지는 전환점이 될 것이다.
연회장에 간다는 것은 여전히 내키지 않았지만.
계획대로만 된다면 아무 탈 없을 것이다.
* * *
책의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리온은 한참 동안 보석을 응시했다.
“……정말로 될까.”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보단 나았다.
폭주하게 되어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죽이는 것보단 뭐든 낫겠지.
엘르의 도움으로 폭주하지 않고 잘 버티긴 했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저주를 완전히 풀어야 엘르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은 보석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찾게 된 이상 불안하게 만드는 원인을 제거하고 싶었다.
리온은 보석을 잘 챙겨 두었다.
“그녀가 도발에 넘어왔으면 좋겠군.”
제니스의 힘이 필요했다. 저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했으니까.
리온은 책상 끝에 놓인 상자를 무심코 열어 봤다.
“……정말 깜찍하다니까.”
엘르가 보낸 쪽지와 함께 새하얀 정장이 눈에 들어왔다.
게다가 검은색 부츠는 또 뭐란 말인가.
아주 눈에 띌 작정을 한 모양이다.
제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쪽지에 적힌 한 단어 때문에 리온은 곧장 옷을 입어봤다.
[리온, 나와 맞춰 입고 갈 거야.]
흰 드레스에 블랙 공단 구두를 신고 온다는 말인가?
단단히 각오를 한 것 같은데.
거울 앞에 선 리온은 제 모습에 웃음이 났다.
어둠에 물든 검은 머리와 대조되는 새하얀 슈트라…….
붉은 눈동자를 감춰서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다들 도망갔을 것이다.
반면 그는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엘르를 떠올렸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꽤 잘 어울렸다.
“빨리 보고 싶네.”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제 팔짱을 끼고 모두에게 알릴 수 있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델테르의 움직임은 잠잠한데, 황녀가 걱정이군.’
반려란 것을 밝힐 바보는 아니었지만, 가만히 있을 위인도 못되니까.
연회에서 무슨 일이 생기든 엘르만큼은 지켜 내야 했다.
황실에게 대적하는 일일지라도.
“뭐, 다른 이를 그 자리에 올리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
리온은 셔츠 단추를 채우며 씩 웃었다.
엘르가 다방면으로 움직이는 덕분에 자료는 꽤 모았지만, 패는 까 봐야 아는 거니까.
그는 다시금 옷을 갈아입고 책을 펼쳤다.
고대어로 적혀 있어 해석에 꽤 시간이 걸렸지만, 그래도 반절이나 읽었다.
해석을 하더라도, 꽤나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었다. 그래도 오늘 내로 끝마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제힘의 증폭을 막아내고, 저주를 풀어 엘르를 지켜 내기 위해선.
어떠한 방해물도 있어선 안 되었다.
그는 엘르에게 구원받은 순간부터 맹세했으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엘르가 다치는 일은 없게 하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