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화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나처럼 자주 황제를 만나는 귀족 영애도 없을 것이다.
도대체 몇 번째 만남인지.
오랜만에 봐도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 눈빛이었다. 황제는 활짝 웃으며 나를 반겼다.
내 입에서 어떤 부탁이 나올지 모르니 저렇게 웃는 거겠지.
“그래, 이제 몸은 좀 괜찮은가 보구나.”
“배려해 주신 덕분입니다.”
황제는 눈을 반짝였다. 이미 신문에 난 이야기를 들어서 알 것이다.
“제가 요청드릴 것은 매우 간단한 일입니다.”
“간단하다라.”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어차피 황제는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한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겠어.
모든 세상 사람들이 이미 다 알아 버렸는데.
“마탑주인 리온 데이비스와의 약혼을 황실에서 공증해 주셨으면 합니다.”
“혹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어떤 걸 묻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발뺌했다. 사실 여부는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황제는 확인하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황녀에게 문양이 생긴 것은 알 테고.”
“네, 알고 있습니다.”
“반려가 리온 데이비스란 건 몰랐던 모양이지? 가문의 기사였는데 몰랐을 리 없거늘.”
“저는 그저 요청드릴 뿐입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반려의 문양은 상관없는 분이지 않으셨나요?”
내 말에 황제는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었다.
반박할 수 없겠지. 그 누구보다 문양을 믿지 않는 자였으니까.
그랬으니 데펠로아도 제 마음대로 안은 것이고.
“좋다. 공증해 주마. 그러나 내가 엘르 양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은 이번 한 번뿐이다.”
당연하지. 내가 우승자가 아니었다면, 이런 부탁을 할 수도 없었을 테니까.
심지어 황제가 다른 귀족의 약혼을 허락해 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벨루아 가문이기 때문에 힘든 일이지.
“감사합니다.”
어차피 황실의 부패를 까발리게 되면 황제의 시대도 끝이 난다.
‘머지않았어.’
부패한 황실을 도려낼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인사를 한 후 곧바로 빠져나가려 했다.
“수도에 돌아온 것을 환영하네.”
“……네, 불러 주신 덕분입니다.”
“앞으로 자주 보게 되겠구나.”
“영광입니다. 폐하.”
가짜로 웃는 미소는 이제 어려울 것도 없었다.
황제는 어차피 리온에게 반려의 각인이 있는 이상 제니스에게 돌아가리라 생각할 것이다.
문양이 상관없다고 했지만, 권력을 갖고 있는 리온을 제 편에 들이는 건 다른 일이었으니까.
완전히 리온을 포기하진 못하겠지.
나와의 약혼은 그냥 구색만 맞춰 주는 걸지도 모른다.
약혼은 언제든 깨질 수 있는 완전하지 않은 관계였으니까.
그래도 상관없었다.
원하는 것은 리온의 안위와 황실의 균열.
이번 일로 제니스는 황제에게 신뢰를 잃게 될 것이다. 그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되겠지.
성녀가 된다고 한들 여론을 무시하고 리온과 약혼을 추진할 수 없다. 그걸 확실하게 알게 되겠지.
나는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알현실을 빠져나왔다.
* * *
“이게 어떻게…….”
제니스는 신문을 확인하고 충격에 빠졌다.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해도 그녀는 작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괜찮아. 황제의 명이잖아.”
그러니 스캔들이 난 것쯤 아무것도 아니리라.
그럼에도 계속해서 불안했다.
결국 제니스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당장 아버지에게 가서 확답을 받아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기에.
점점 더 발걸음이 다급해졌고, 숨은 가빠 왔다.
알현실 쪽으로 가는 길목에서 엘르만 만나지 않았어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저를 올곧게 쳐다보는 엘르의 얼굴에는 승리의 미소가 번져 있었다.
“……엘르 나타시아 영애.”
“황녀님, 오랜만이네요.”
사르륵 접어 웃는 눈에 제니스의 표정이 굳었다.
“……여긴 어쩐 일로 왔나요?”
“사냥 대회에서 우승을 했으니 바라는 바를 말하러 왔습니다.”
역시 제가 우승을 했어야 했다. 델테르와 저 역시 서로 바라는 게 달랐기에 힘을 합치지 못했다.
그러한 이유로 혼자서 점수를 딴 게 패착의 원인이었다.
“어떤 요청을 드렸나요?”
“나중에 알게 되실 테니 연회를 기다려 보세요.”
“리온 님에 관한 것인가 보네요. 신문 봤어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제니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언론을 이용하다니. 그걸 생각하지 못한 제 자신이 미웠다.
“무슨 생각이긴요. 저 역시 우연히 들킨 것뿐입니다.”
“……하!”
그녀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제 앞에서 차분한 엘르의 모습을 보자 화가 치솟았다.
“언제까지 리온 님의 곁에 붙어 있을 생각이죠? 반려도 아니면서.”
“황녀님. 반려가 한 명도 아니신 분이 반려에 목을 매시다뇨.”
“……설마, 아버지에게.”
“걱정 마세요. 아직 말 안 했으니까.”
아직이란 말에 제니스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제 약점을 쥐고 있는 것 자체가 싫었다.
저 역시 에드가가 저를 불러내 이야기를 했다는 걸 알리면 된다. 그러나 그건 좋은 수가 아니었다.
제니스는 불리해진 제 입장에 화가 났다.
“며칠 뒤, 연회에서 보아요. 아 그리고 앞으로는 자주 보게 될 것 같아요.”
“……자주?”
“오늘부로 수도에 다시 오게 되었거든요.”
엘르의 말에 제니스는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변방에서 수도로 오게 되었다는 것은 지금보다 더 리온과 자주 왕래를 하겠다는 말이었다.
“그럼, 이만.”
엘르는 얼빠진 얼굴로 서 있는 제니스를 지나쳐 걸어갔다.
눈앞이 멍하게 흐려지는 것을 애써 참으며 제니스는 발걸음을 돌렸다.
아버지에게 가 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 * *
“와, 너무 좋다.”
“그렇게 좋습니까?”
“그럼요! 텔레포트 없이 바로 집으로 갈 수 있잖아요.”
엘은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에 저택이 있으니 황실과 그리 멀지 않고 얼마나 좋은가.
덕분에 엘이 좀 바빠지긴 했지만, 황궁에는 나를 죽이려는 이들이 너무 많아 보호가 필요했다.
그렇다고 호위 기사를 많이 대동하고 가기엔 너무 속 보이고.
“아버지는요?”
“이미 가 계십니다.”
“마음에 들어 하시던가요?”
“네, 말은 안 하셨지만 흡족해하셨습니다.”
그제야 나는 안도했다. 삼천만 골드를 주고 샀으니 기대치도 컸을 터.
잔소리를 하지 않으셨다면, 그건 마음에 들었다는 소리다.
“아, 참. 저택에 손님이 와 계십니다.”
“손님?”
나를 찾아올 손님이라곤 리온뿐인데.
“그러고 보니 정보상은 어떻게 하고 왔어요?”
“전부 다 옮겨 왔습니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긴, 변방에서보다 수도가 더 돈이 잘 벌릴 것이다.
사람도 많고 이미 알려져 있으니 수요도 더 많아질 터.
“일단 베르뎅 쥬얼리 숍부터 들러야겠어요.”
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집이 멀지도 않았으니 잠시 들렀다 집에 가도 상관이 없었다.
마차를 타고 조금 지나자 베르뎅 쥬얼리 숍이 보였다.
“으음? 사람들이 왜 저렇게 많아.”
혹시 몰라 모자를 뒤집어쓴 나는 뒷문으로 조심히 들어갔다.
“엘르 님!”
베르뎅이 울먹이며 내게 달려왔다.
“그동안 몸이 안 좋으신 것 같아서 연락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미안해요. 사정이 좀 있었어요. 그런데 문 앞에 왜 이렇게 사람이 많나요?”
“그게…… 공급을 줄였더니 수요가 너무 넘쳐 나서 원성이 자자합니다.”
“흐음, 가격이 많이 올랐겠군요.”
베르뎅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벌어들인 수입만 해도 엄청났긴 했다.
나는 고민하다 베르뎅에게 말했다.
“조금씩 예약제로 받아서 푸세요. 가격은 이전보다 높게.”
“정말입니까?”
“네, 이제 풀어도 상관없어요.”
센 공작이 죽었고, 내 손목에 있는 문양도 사라졌으니까.
나를 범인으로 지목할 증거는 없었다.
그제야 베르뎅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던 모양이다.
“대신 수리 비용을 할인해 준다고 하세요. 그래야 틀어진 마음을 달랠 수 있으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이제 수도에 왔으니 급한 일이 있거든 바로 연락 줘도 괜찮아요.”
“……정말입니까?”
나의 고갯짓에 베르뎅은 활짝 웃었다.
“저, 엘르 님. 다른 지역에서도 문의가 쇄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혼자 하기 힘드셨죠? 이제 슬슬 다른 지점에도 가게를 열 때가 되었네요.”
“그 말씀은…….”
“베르뎅 님이 인재를 모집하세요. 계약을 맺고 그들에게 상품을 보내, 판매를 대신하게 하면 좋겠어요.”
“알겠습니다.”
“필요하면 조수는 얼마든 구해도 좋아요. 돈은 제가 댈 테니까요.”
“정말 감사합니다.”
베르뎅은 연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를 유명하게 한 건 나였으니까.
“저희 사업 말고도 계속 작업에도 힘써 주세요. 베르뎅 님의 작품은 아름다우니까요.”
나는 베르뎅의 액세서리를 보며 하나둘 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거 다 저희 집으로 보내 주세요.”
“이, 이걸 다요?”
“네. 연회에 필요할 것 같아서요.”
“그럼 제가 아가씨를 위해 목걸이를 만들어도 될까요?”
“어머! 그럼 너무 영광이죠.”
과분한 선물이겠지만, 내가 하고 간다면 홍보 효과는 될 것이다.
팔찌 사업도 성공했으니 베르뎅의 목걸이를 하고 가면 또 주문이 폭주할 터.
나와 베르뎅의 동업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내 통장에 또다시 돈이 두둑하게 차오르겠구만.
나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쥬얼리 숍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