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4화 (104/120)

제104화

“알아낸 건 있어?”

“딱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찝찝함은 없어졌으니 된 건가.

“비로이드가 판매한 게 아니라면 누구의 부탁을 받은 걸까.”

“찾아봐야지. 그런데 이렇게 비도 오는데 왜 수도까지 온 거야.”

리온이 내 망토를 제대로 씌워 주며 빗물을 툭툭 털어 줬다.

“변장도 안 하고 나왔네.”

“그럴 필요가 없었어. 벨루아 가문이 지낼 저택을 구입하러 나온 거니까.”

“가문이 지낼……?”

그제야 리온에게 제대로 된 설명을 해 주지 않았던 것이 떠올랐다.

구구절절 설명할 시간이 없긴 했다.

“나 수도로 오게 될 것 같아. 잘 됐지?”

“……여기로 온다고?”

“응, 황실 허가서도 받았어.”

리온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불안한 거겠지.

제니스와도 가까워진 셈이니까. 그건 곧 그녀가 내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소리고.

“리온, 걱정 마. 나 네가 치료한 이후로 좀 달라졌어.”

“달라졌다니?”

“아까 못 느꼈어? 그럴 리 없는데.”

나를 치료해 주기 위해 손을 뻗었을 때 몸이 절로 리온의 힘을 빨아 당겼다.

그걸 리온이 모를 리 없었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거지?”

“……일시적일지도 몰라.”

“뭐, 그래도 괜찮아. 일단은 힘이 생긴 거잖아.”

사실 힘이 없어도 머리를 굴려 잘 빠져나가긴 했었다.

그래도 보험 하나 더 생긴다고 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그보다 황태자는?”

“아마도 우리 집에 있을 걸. 이렇게 날씨가 안 좋은데 수도로 돌아가기 힘들지 않을까.”

“그렇겠네.”

마법사라 날씨 상관없이 이동에 용이한 것도 아니고.

그 말은 내가 저택으로 돌아가게 되면 꼼짝없이 또 델테르와 마주하게 된다는 거네.

“으음.”

“안 됩니다. 돌아가셔야 합니다.”

헤센은 정말 눈치가 빠르다.

“어떻게 알았죠?”

“아가씨 눈빛만 봐도 압니다. 이제.”

“……우리가 제법 오래 붙어 있긴 했나 봐.”

쩝.

날씨 핑계 대고 마탑에 가서 좀 있으려 했더니 안 통하네.

헤센과 나의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이 시작되었다.

“아니면, 날씨가 좀 괜찮아지면 가는 건 어때?”

리온이 중간 타협점을 제시했다. 동시에 헤센과 내 고개가 돌아갔다.

“좋은 것 같아.”

“좋습니다.”

이렇게 비가 미친 듯이 내리는 날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건 목숨을 거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리온에게 부탁하기엔 법이 좀 걸렸고.

리온이야 마법사라 마음대로 한다지만, 나는 안 그래도 미움받는 입장이지 않은가.

텔레포트를 마음대로 사용했다가 처벌받을지도 모른다.

“그럼, 마탑으로 잠시 이동하겠습니다.”

리온의 말에 헤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참. 헤센은 텔레포트 안 해 봤을 텐데?’

뭐, 이참에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나는 씩 웃으며 헤센을 보았다.

그는 별안간 불안한 표정을 짓더니 내 옷깃을 급히 잡았다.

“자, 잠시만 잡겠습니다아악!”

처량한 비명 소리가 짧게 울렸다.

* * *

에드가는 잠잠한 엘르가 이상했다.

갑자기 빠져 준 것도 다른 꿍꿍이 때문이겠지.

“비가 꽤 많이 오는 것 같으니 그치면 가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는 선심 쓰듯 툭 하고 던졌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입니다.”

“연회를 여는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모르십니까?”

에드가의 말에 델테르는 표정을 굳혔다.

연회에 이유가 필요한 것은 맞았지만 이번엔 그도 알지 못했다.

‘아버지의 명령이었지.’

연회를 주관한 적이 없었기에 의외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걸 어머니께 맡기다니.

이상한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엘르 영애께서는 파트너가 있을지.”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녁 준비를 하라 이르겠습니다.”

델테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할 이야기도 없으니 마주 보고 있을 필요도 없었다.

“엘르 영애의 몸도 나았으니 따로 이야기를 하고 일정을 정하겠습니다.”

에드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은 알아서 하라는 무언의 태도였다.

‘아까 나갔으니 저녁 먹고 이야기를 나누면 되겠군.’

돌아갈 때 함께 가면 두 번 일 안 해도 될 텐데.

델테르는 방을 나와 비가 내리는 하늘을 보았다.

“비가 지독하게도 오는군.”

이런 날일 때면 제니스가 방에서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던 것 같은데.

여러모로 신경 쓰이는 날이었다.

에드가는 델테르가 나가고 나서야 한숨을 내쉬었다.

“헤센은 또 어딜 간 거지?”

뭐 좀 시키려고 했더니.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엘르의 방으로 향했다.

“아, 저기 있군.”

시녀들이 잘 보이지 않았던 찰나 디리아가 보였다.

에드가는 디리아에게 다가갔다.

“헉, 배, 백작님.”

이런 반응은 엘르가 무슨 일을 저질렀을 때인데.

“엘르는 어디에 있지?”

“그게…… 잠시 외출을.”

“외출이라니?”

“금방 오신다고 했어요……!”

디리아는 다급히 대답했다. 혼자 간 게 아니니 위험한 일은 없을 테지만.

“헤, 헤센 보좌관님도 함께 가셨습니다.”

“……하. 헤센까지.”

누가 주인인 건지.

“그보다 왜 이렇게 분주하지?”

“아…… 그게. 아가씨께서 짐을 싸라고 하셨어요.”

답이 왔나 보군.

생각보다 빠르게 답이 온 것은 놀랍긴 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오셨으니 티가 나지 않게 준비하라고 해서…….”

철저하기까지.

에드가는 이럴 때는 늘 행동력이 빠른 엘르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외출한 건 집이라도 알아보러 간 모양이지?”

“……어떻게 아셨어요?”

화들짝 놀란 디리아가 얼빠진 얼굴을 했다.

이렇게 늦어질 줄은 몰랐지만, 에드가가 곧바로 엘르를 찾을 줄 몰랐다.

“엘.”

에드가의 부름에 곧바로 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찾으러 가 볼까요?”

“아마도 마탑에 가 있을 확률이 크니 그쪽으로 가 봐.”

“존명.”

엘은 토 달지 않고 사라졌다.

“……아가씨께서 집을 구하러 가셨는데요?”

디리아가 에드가에게 묻자 어깨를 으쓱였다.

“비가 이렇게 오는데 얌전히 집에 올 리가 없지.”

“……확실히 그러네요.”

그녀는 한 번에 수긍이 갔다.

“비가 그치면 황태자가 갈 테니 그때가 되면 정리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네, 알겠습니다.”

혹시라도 눈치채면 곤란하니까. 사실 그가 알게 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자, 그럼 우리 따님이 어떤 집을 구매했는지 기다려 봐야겠군.”

청구서가 날아올 테니 후에 알게 되겠지만.

엘르의 안목이라면 기대해도 괜찮겠지.

* * *

오랜만에 오는 마탑이라 그런지 감회가 남달랐다.

“으음, 역시 신기해.”

어떻게 이렇게 조용할 수가 있지.

밖에 비바람이 치고 난리가 났는데 여긴 다른 공간 같았다.

“……마탑주님?”

“어, 카벤 님!”

나는 반가움에 손을 흔들었다. 저번에 보고 두 번째 보는 건가.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아니 엘르 님은 또 여길 왜.”

“어쩌다 보니 잠시 피난차 왔어요.”

“……또 뵙습니다.”

헤센이 어색하게 카벤과 인사했다.

마탑에 모인 네 명의 표정은 각기 달랐지만 어색한 기류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일단 몸 좀 녹이고 이야기할까요?”

나는 손을 번쩍 들어 분위기를 풀려 했다.

“그러는 게 좋겠어. 몸이 꽤 차가우니까.”

리온의 손이 내 손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같이 비를 맞았는데도 여전히 따뜻함이 느껴졌다.

“그전에 우리는 이야기를 좀 나눠야겠지?”

나는 리온의 손끝을 다시금 잡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래야겠지.”

“그럼 저도 함께 듣겠습니다.”

“으음, 헤센 경. 이럴 땐 눈치껏 빠져 줘야지.”

내 말에 헤센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절대 안 됩니다! 백작님이 아시면 저 죽어요.”

헤센은 나와 리온의 사이를 파고들며 떼어 놓았다.

“제가 있을 때 이야기를 하십시오.”

“글쎄 이야기할 게 있어서 그렇다니까요?”

“그럼 제가 보는 앞에서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헤센 경은 절대로 비켜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럼 이렇게 하면 되겠군.”

리온이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순식간에 헤센 경이 놀란 눈을 했다.

“헤센 경, 왜 그래요?”

“어…… 어! 이, 이상합니다! 귀가 안 들려요! 어!”

그는 당황한 듯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리온?”

내가 놀라 리온에게 묻자, 그는 씩 웃었다.

“굳이 같이 있겠다는데 어쩔 수 없잖아.”

가끔 리온이 저럴 때면 흑막이 맞긴 한 것 같단 말이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었다.

루비온 가문을 쫓고 있는 것을 다른 이들이 알게 되면 곤란했다.

안 그래도 리온이 보석을 산 것을 헤센 경은 알지 않은가.

“미안해요, 조금만 참아 줘요.”

내 말에도 헤센은 울먹였다.

“아가씨…… 귀가.”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카벤 님도 여기에 있으실래요?”

“……저는 바로 나갈 생각이었습니다!”

카벤은 후다닥 방을 나섰다.

결국 헤센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채 훌쩍이며 소파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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