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3화 (103/120)

제103화

“죄송합니다. 아직…… 의원이 오지 못한 것 같습니다.”

집사의 말에 헤센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저희도 급하니 계약이라도 하고 가야…….”

“지, 집사님! 의원이 왔어요!”

“정말인가?!”

집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후다닥 정문을 열었다.

망토를 뒤집어쓴 웬 남자 하나가 성큼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뚝뚝. 빗물이 바닥을 더럽혔다.

“……의원이 맞습니까?”

“비가 와서 급히 오느라 옷차림이 이러니 이해하십시오.”

헤센은 의원의 음성을 듣고 빠르게 다가가 팔을 붙잡았다.

“빨리 여기로 오십시오. 아가씨가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네, 네. 어서 가 보세요. 여기서 사람이 아프면 곤란합니다.”

집사는 발을 동동 굴렀다.

주인이 정신을 차리기 전까지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선 안 된다.

리온은 조금은 빠른 발걸음으로 손님 방으로 향했다.

침대로 옮겨져 쌕쌕거리는 엘르의 모습이 보였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무리한 건가?’

그냥 먼저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리온은 입술을 잘근 씹으며 엘르의 몸을 살폈다.

“음?”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오히려 제 마나를 흡수하고 있는 게 아닌가.

리온은 엘르의 몸에서 슬그머니 손을 뗐다.

“이제 괜찮아질 겁니다. 감기인 것 같으니 푹 쉬기만 하면 됩니다.”

“아……! 다행입니다!”

집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의 반응에 엘르가 힐끔 눈을 뜨더니 리온을 보았다.

뭔가를 이야기하려는 눈빛이었다.

‘이 집에 뭔가가 있을 것 같으니 찾아보라는 거군.’

찰떡같이 알아들은 리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저희 주인님도 봐주실 수 있을까요?”

이게 웬 횡재야.

엘르는 집사의 말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리온이 직접 만나서 능력을 쓰면 뭔가 알게 되겠네.’

손쉽게 풀리면 좋을 텐데.

시간을 번 보람이 있게 뭔가를 얻어 내고 이곳을 나가고 싶었다.

“네, 알겠습니다.”

리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집사의 뒤를 따랐다.

위층에 있는 주인 방으로 가는 길에는 별 특이한 건 없었다. 그저 기둥이 세워져 있었고, 꽤 값비싼 물품들로 장식이 되어 있었다.

문이 열리고 비로이드가 누워 있는 침대로 가자 끙끙 앓고 있는 그가 보였다.

“계속 이런 상태입니까?”

“네, 정신이 조금 들긴 한 것 같은데…… 비를 너무 맞아 감기에 걸리신 건 아닐지.”

“확실히 열이 높군요.”

리온은 손을 뻗어 이마를 가볍게 쓸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비로이드의 얼굴이 편안해졌다.

“곧 깨어나실 겁니다. 목을 축일 차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집사는 재빠르게 방을 나섰다.

비로이드는 개운해진 몸과 함께 눈이 뜨였다.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리온을 보자 이상하게 두려움이 몰려왔다.

“당신 누구지?”

“아, 저는 의원입니다. 집사가 봐달라고 하여 왔습니다.”

“……내가 왜 집에.”

비로이드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의 기억은 빗속을 뚫고 술집 근처까지 갔던 것까지만 선명했다.

화들짝 놀라 품속을 열심히 뒤졌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제길!”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아, 아무것도 아니니 이만 내 집에서 나가시오.”

“나가긴 곤란할 것 같고, 이야기를 좀 했으면 하는데.”

리온은 망토를 벗어 싱긋 웃었다.

“무, 무슨!”

비로이드는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자 온몸에 힘이 쫙 빠졌다.

“이거 네가 경매에 붙인 게 맞나?”

“……어떻게 그게 여기에. 팔리지 않은 건가. 저는 부탁을 받고…….”

비로이드는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쓰레기 냄새가 진동을 하더라니.”

리온은 보석을 품에 다시금 넣으며 물었다.

“나머지도 네가 팔았나?”

“아니, 그건 우연히 대리로…… 다른 건 보지도 못했는데.”

“집을 내놓았던데 경매랑 무슨 상관이 있지?”

“그건 세간에 떠도는 루비온 가문의 일원에게 죽게 될까 봐 두려워서…….”

비로이드는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자꾸만 저를 억압하는 강한 힘에 숨을 쉬기가 버거웠다.

“그, 그래서 도망을 치려고.”

“……우연히 얻었다라.”

리온은 김이 팍 샜다. 진행자도 그렇고 비로이드도 제대로 아는 게 없었다.

“어! 비로이드 님!”

집사가 차를 들고 나타나 소리쳤다.

“깨어나셨습니까? 진짜 저 너무 걱정했습니다.”

거의 울먹이며 비로이드의 곁에 다가가는 바람에 능력을 거뒀다.

“아, 어? 집사?”

비로이드는 몽롱한 정신에서 깨어나려 머리를 세차게 저었다.

“머리가 너무 아프군.”

“의원님이 치료하셨으니 괜찮을 겁니다. 그보다 지금 아래층에서 손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손님이라니?”

비로이드의 얼굴이 초조함으로 뒤바뀌었다.

“내 허락 없이 저택에 사람을 들인 건가!”

“그, 그게 어쩔 수 없었습니다. 비로이드 님을 구해 주신 은인이라.”

“그건 또 무슨 소리지?”

그는 머리를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에 빗속에 쓰러졌던 게 스쳐 지나갔다.

“이런…….”

“그보다 중개업자에게 집을 내놓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합니다. 마음에 들어서 당장 계약을 하고자 하신다고.”

“……당장?”

“그보다 전할 말이 있습니다.”

집사는 비로이드의 귓가에 속삭였다.

“물건이 팔렸다고 합니다. 삼천만 골드를 지불하겠다고 했다는데.”

“……삼천만 골드? 누가?”

“그게…… 비로이드 님이 구입자라고.”

집사의 말에 비로이드가 놀라 펄쩍 뛰었다.

“말도 안 되는!”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큰돈으로 판매해 달라 올린 물건을 샀을 리 없지 않은가.

진행자는 비로이드가 판매자임을 모르고 있긴 했다.

그렇지만, 각서라든지 단계가 있어 판매책이 누구인지 드러나는 법이거늘.

‘이게 무슨…….’

만약 값을 지불하지 않게 된다면 진행자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에 대해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악독했다.

그 암시장에서 계약은 곧 목숨이었다. 지키지 않으면 목을 내어 주는 것과 같았다.

사색이 된 비로이드는 침대와 제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없어. 그렇다면 누가 나를 사칭했다는 건가?’

초대장이 없어졌으니 가능성은 있었다.

“나를 구해 주신 분들이 아래층에 있다고 했나?”

“네,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장 안내해.”

그는 지금 선택지가 없었다. 이 저택을 비싸게 팔아서 보석값을 마련해야 했다.

리온은 가만히 비로이드를 살펴보았다.

그를 따라 내려가자 엘르가 나와 있었다.

“저를 구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집 계약하러 왔다가 얼떨결에 목숨을 구했지.”

자연스러운 하대에 비로이드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귀족임이 틀림없다. 게다가 붉은 머리카락이라면…….

“이렇게 부족한 저희 집이 마음에 드셨다니 영광입니다. 벨루아 가문의 엘르 나타시아 님 아니십니까.”

오호. 나를 곧바로 알아차리다니.

하긴 지금은 망토를 쓰고 있지 않았으니 붉은 머리카락이 드러났겠지.

“이곳을 사려 하는데 조건이라도 있나?”

“조건이라면…….”

“내가 문전 박대를 당하고, 자네를 찾아 빗속을 뚫고 나갔다가 감기까지 걸렸지 뭔가?”

“……다른 조건은 없습니다.”

비로이드는 어색하게 웃었다.

여기서 말을 잘못했다간 무슨 혐의를 뒤집어씌울지 모른다.

악명 높은 벨루아 가문이지 않은가.

그래서 비로이드는 값만 세게 받고 끝낼 생각이었다. 한시가 급했다.

“바로 계약하시려는 겁니까?”

“뭐, 마음에 들어서. 나도 좀 급하게 들어와야 하거든.”

“다행히 일정이 딱 맞을 것 같습니다. 모레면 비워져 있을 겁니다.”

비로이드는 웃으며 집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계약서를 가져오라는 거겠지.

“말이 잘 통해서 좋네.”

엘르는 집사가 가져오는 계약서를 빤히 보았다.

비로이드는 금액을 쓰곤 내밀었다.

“건축과 관리, 그리고 안에 있는 모든 것은 그대로 둘 겁니다. 이 정도 가격이면 굉장히 좋은 거래입니다.”

“……삼천만 골드?”

엘르는 계약서를 손으로 툭툭 치며 비로이드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이 가격이면 내일 당장 나가 줘야겠는데.”

“내, 내일 말씀입니까?”

“그래. 내일, 내가 변방에 있어서 수도 물가를 모른다고 생각하나 봐.”

엘르는 바짝 얼굴을 들이대며 눈을 접어 웃었다.

“헤센 경. 이 저택의 집 가격과 내부에 있던 장식품을 더한 견적이 어떻게 되지?”

“후하게 쳐 준다고 해도 일천만 골드입니다.”

“그렇다고 하네? 그런데 자네는 내게 세 배의 가격을 요구했고.”

“……집은 파는 사람 마음이지 않습니까!”

비로이드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 가격이어야 했다.

엘르는 이미 경매에서 얼마에 보석이 팔렸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비로이드가 왜 저 가격을 고집 피우는지도 알았다.

“삼천만 골드에 집을 사 주도록 하지. 내일 집을 비운다는 조건하에.”

“정말이십니까?”

“그래, 나는 꽤 이곳이 마음에 들거든.”

엘르의 말에 비로이드의 얼굴이 펴졌다.

“그, 그럼 여기에 서명 부탁드립니다. 혹 에드가 백작님께서는 알고 계시는 건지…….”

“그건 걱정 말게. 내 돈으로 계약하는 거니까.”

“……네?”

“못 들었어? 내가 내 집 사는 거라고.”

그 말을 끝낸 엘르는 곧장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자, 그럼 나는 이만 나가 주지. 짐을 싸야 할 테니까.”

비로이드는 안도감도 잠시 머리가 아파 왔다.

내일까지 빼 주려면 지금부터 움직여도 시간이 부족하다.

이미 계약서에 서명을 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제길…….”

그는 저택을 빠져나가는 엘르의 뒷모습을 허망하게 쳐다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