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화 (96/120)

제96화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

“너는 알고 있겠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말이야.”

“……글쎄요.”

나는 황후의 표정을 살폈다.

무미건조한 내 반응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센 공작의 죽음이 벨루아 가문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단다.”

“그렇습니까? 왜 그런 생각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지만.”

황후의 눈썹이 들썩였다. 뭔가 이야기를 듣고 온 건가?

“서로 피차 오래 보는 건 불편할 테니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않겠다.”

“네,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아버지가 알게 되면 난리가 날 테니 빨리 돌아가야 했다.

디리아가 약속을 지켜 주긴 할 테지만……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니까.

“내가 추리한 바로는 센 공작이 네 반려라고 생각이 되는데.”

“죄송하지만, 제겐 반려가 없어요.”

나는 뻔뻔하게 고개를 저었다.

항상 액세서리로 팔목을 가리고 있으니 그렇게 생각한 거겠지만, 문양이 생겨도 바로 반려를 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모든 사람의 팔목을 확인할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황후 역시 나를 떠보려는 심산이겠지.

하지만 이미 내 손목에는 문양이 사라져 있었다. 그러니 잡아떼면 그만이다.

“반려가 없다라…… 그렇게 나오면 할 말은 없다만.”

황후는 여유롭게 웃었다. 내가 이렇게 나올 것도 예상을 한 사람 같았다.

“사냥 대회 이후 곧바로 센 공작이 죽었다……. 이상하구나.”

“우연의 일치이긴 하죠. 제가 피해자였다는 것도 아실 텐데요. 그때의 충격에서 아직도 전…….”

나는 고개를 숙이며 몸을 바르르 떨었다.

한껏 두려움에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황후는 코웃음 쳤다.

“걱정 말아라. 그걸 빌미로 네게 뭔가를 협박하러 온 것은 아니니까.”

그럼 그걸로 무슨 말을 하려고?

“제니스 황녀가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더구나.”

“황녀님께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아는 것을 모두 고하거라. 그럼 네게도 내가 알고 있는 걸 알려 줄 테니.”

황후는 내 질문의 대답을 피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며 실과 득을 따졌다.

제니스에 대한 걸 알려 주게 되면 황후는 그녀를 억압하러 들 것이다.

그녀의 반려가 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나올까?

그건 너무 위험이 컸다. 델테르가 그녀의 반려라는 것을 알리는 게 가장 좋은 선택지인데.

“제니스에게 반려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나요?”

“그래, 마탑주라고 하더구나. 반려가 힘이 있으니 언제 딴 맘을 품어도 이상할 게 없지.”

리온이 반려란 것을 벌써 알고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내 쪽에서 델테르가 반려라는 것만 알려도 제니스는 황후로 인해 활동이 제약될 터.

그녀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리온을 위해선 뭐라도 해야 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제가 뭔가를 알려 드리면, 황후 폐하께서는 제게 뭘 해 주실 건가요?”

“뭘 원하는지 말해 보거라.”

황후는 뭐든 다 들어줄 것처럼 고개를 치켜들었다.

“제니스 황녀는 리온을 원할 거예요. 아마도 황제께 부탁을 올렸을지도 모르죠.”

“흐음, 안 그래도 나를 내보내고 황제와 이야기를 나누긴 했다.”

그렇다면 벌써 황제와 리온을 두고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을 게 뻔했다.

“황녀에게 또 다른 반려가 있어요.”

“……또 다른 반려?”

믿기지 않겠지. 이런 사례는 한 번도 존재한 적 없었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 책임질 수 있겠지.”

“저는 거짓말하지 않아요. 두 명의 반려가 있어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그리고 그 반려는.”

“그만. 그건 듣고 싶지 않구나.”

황후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다른 반려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나 보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자, 그럼 이야기가 쉽겠네요. 리온이 제니스의 곁으로 가는 것을 막아 주세요.”

“허…….”

“어차피 제니스 황녀에게 힘이 실리게 되면 황후 폐하께서도 곤란하지 않겠어요?”

“……그거면 된다는 거구나.”

“그럴 리가요. 원래는 황제 폐하께 요구하려 했는데 황후 폐하께서 들어주셔야겠네요.”

변방으로 쫓겨난 것도 거의 황후로 인해 일어난 일이니까.

나는 고개를 치켜들고 또박또박 말했다.

“벨루아 가문을 수도로 들여 주세요.”

“……뭐라?”

“그게 제가 황후 폐하께 요청드릴 일이에요.”

“그건.”

“곤란하다는 말은 하지 않으셔야 할 겁니다. 저도 썩 황실에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닌지라.”

황후는 얼빠진 얼굴을 했다.

내가 이렇게 나올 걸 예상도 하지 못했다면 멍청한 거지.

자기 때문에 우리 가문이 어떻게 됐는데.

심지어 우리 엄마를 죽게 한 장본인이지 않은가.

“이번 주까지 서신이 오리라 믿고 있겠습니다. 늦어진다면, 저도 제 입이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네요.”

“너, 너!”

“노여워 마세요. 저를 찾아온 건 황후 폐하시잖아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차의 문을 열었다.

“아, 참. 다른 생각 하시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제가 황제 폐하를 알현하러 가서 무슨 소리를 할지 저도 무섭거든요.”

황후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마차에서 빠져나왔다.

저렇게 지르긴 했어도 겁은 났다.

‘이제 아버지한테 가서 이실직고해야지.’

일단은 리온에게도 서신을 보내야 했다.

제니스가 황제와 뭐라고 이야기를 했을지 모르니 대비는 해 두라고 해야지.

나는 황급히 저택으로 향했다.

“꺄악!”

뒤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황급히 몸을 숙였다. 허공에 스치는 날카로운 굉음에 소름이 돋았다.

‘그럼 그렇지. 좋게 끝나는가 했다.’

나는 몸을 돌려 마차를 노려보았다.

창문에 당혹스러워하는 황후의 얼굴에 분노가 치밀었다.

자객의 손을 잡은 순간 몸에 강한 힘이 느껴졌다. 이내 그는 튕겨져 나가듯 땅바닥에 굴렀다.

“으, 으윽!”

“뭐야……? 뭔가 내 몸이 이상해진 것 같은데.”

턱.

내 어깨를 잡은 자객의 손을 나도 모르게 잡아 바닥에 팽개쳤다.

“……어?”

당혹스러워할 틈도 없이 나는 내게 달려드는 자객을 순식간에 처리해 나갔다.

모든 이들이 앓는 소리를 내며 뒹굴고 있었다.

상황은 순식간에 끝이 났고 얼떨떨한 기분을 느끼기도 전에 황후가 탄 마차가 떠올랐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마차로 향했다.

“황후 폐하, 이렇게 나오시면 매우 곤란합니다만.”

“어, 어떻게!”

“지금 그게 중요할까요? 아무래도 기일을 줄여야겠네요. 삼일. 그 안에 제가 부탁드린 답이 오지 않으면…….”

나는 싱긋 웃었다.

그래, 뭐 이렇게 되나 저렇게 되나 죽을 목숨이라면.

“델테르 황태자 전하가 꽤 곤란해질 겁니다.”

황후는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듯했다.

나는 예를 갖춰 그녀에게 인사를 올린 후 마차의 문을 닫았다.

“삼일, 잊지 마세요.”

그 말을 남긴 후 나는 유유히 저택으로 걸어갔다.

* * *

방으로 돌아온 나는 벽에 기댄 채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래도 이거 당장 아버지에게 말을 해야겠는데?”

몸이 이상하다.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

내게 힘이 있을 리 만무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아가씨 괜찮으세요?”

“아니, 안 괜찮아. 아버지를 당장 만나야겠어.”

“제가 확인해 볼게요!”

디리아는 황급히 방을 나갔다. 나는 내 손에 느껴졌던 힘을 떠올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이게 문양이 사라진 것과 관련이 있는 걸까?

그게 아니면…… 리온이 날 치료해 주면서 나도 모르는 힘이 발현한 걸지도 모른다.

나는 초조하게 아버지를 기다렸다.

* * *

델테르는 이상한 기분에 제니스에게로 향했다.

요 며칠 잠잠한 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

최근에 어머니가 제니스를 찾아갔다고 들었는데.

“황녀가 보이지 않는군.”

“아, 그게…… 황제 폐하를 만나러 가셨습니다.”

시녀는 곧장 델테르에게 고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고?”

“네, 뭔가 다급히 찾아가셨습니다. 고민하더니 결정을 내리신 것 같았어요.”

“결정?”

“……아무래도 성녀가 되기로 한 모양입니다.”

“하…….”

성녀라. 계승권을 이렇게 쉽게 포기한다고?

델테르는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럴 리 없다.

그거보다 더 큰 것이 필요하니 등가 교환을 했을 터.

그게 뭔지 궁금했다.

이를테면…… 리온?

이미 아버지는 제니스의 반려가 리온인 것을 알고 있다.

제니스는 방향을 틀었을지도 모른다. 제게서 벗어날 방법을 리온을 제 곁으로 두는 걸로 선회했다면?

델테르는 주먹을 꽉 쥐었다.

“아버지에게 안내해.”

“네, 알겠습니다.”

시녀는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이때 황태자에게 잘 보여야 제 앞길이 풀릴 것이다.

델테르는 시녀와 함께 알현실로 향했다.

“어머니는?”

“외출하신 것 같습니다.”

“……외출?”

나갈 일도 없으신 분이 외출이라.

델테르는 떨떠름한 기분을 지우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는 알현실에서 가로막혀 들어가지 못했다.

“지금은 그 누구도 만나지 않겠다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네, 그러니 내일 다시 오십시오.”

“제니스 황녀가 아직도 안에 있나?”

“황녀님께선 아까 나가셨습니다.”

델테르는 하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알현실에도 없다면 그녀가 있을 곳은 한군데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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