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화
“그래, 이제 말해 보거라.”
제니스는 황후가 나가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저번에 말씀드렸던 제 반려에 대해서 부탁드릴 게 있어요.”
“부탁이라…….”
황제는 그녀의 입에서 나올 말이 기대되었다.
벨루아 가문과 관련이 되어 있으니 환영할 일이지만.
“리온 님과 약혼을 진행해 주세요. 성녀로 추대된 다음에 반려를 공개할 생각이에요.”
“발을 뺄 수 없게 할 생각이구나. 하지만 마탑은 황실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임을 알고 있겠지.”
“네, 알고 있어요.”
이러려고 쌓아온 인지도는 아니었지만, 여론이라면 자신 있었다.
“어차피 백성들은 스캔들에 열광할 거예요. 성녀와 마탑주의 관계라면 더더욱.”
마탑에 대한 이미지도 나쁘지 않았다.
황실에 대적할 만한 독단적인 단체. 화합을 이루는 모습을 보인다면 백성들도 기꺼워할 것이다.
심지어 반려라는 로맨스까지 더해진다면…….
“나쁘지 않은 생각이구나. 그래 마탑주는 이 사실을 알고 있고?”
“아니요, 그가 알게 되면 모든 게 틀어질 거예요. 그러니 제가 성녀로 임명하는 날 공개하는 게 좋겠어요.”
“꽤 잘 컸구나.”
황제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제니스가 이토록 달라진 걸 보니 뿌듯했다.
“한 가지 더 부탁할 게 있어요.”
“그게 무엇이냐.”
제니스는 아버지의 표정을 살폈다. 저를 향한 애정이 한껏 묻어나 있었다.
‘하지만 아직이야.’
황후에 대한 처분을 논하기엔 제힘이 적었다.
더군다나 제가 당했던 일들을 말한다고 한들 황후를 내치진 않을 터.
“이 모든 건 폐하와 저만 알고 있었으면 합니다.”
“흐음. 델테르에게도 비밀로 해 달라.”
“네, 아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이야기는 쉽게 새어 나가니까요.”
“좋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그제야 제니스는 활짝 웃었다.
이제 남은 것은 델테르의 입단속을 어떻게 시키느냐인데.
자신의 반려가 리온이란 것이 공표가 되고 나면 델테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터.
더군다나 제가 죽게 된다면 리온이 의심을 사게 될 테니 목숨도 보장받게 된다.
“감사합니다. 폐하.”
그녀는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린 후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 * *
황제는 제니스의 성녀로 임명하기 위해 가신들을 불러들였다.
“제니스 아벨 보니타. 내 딸아이를 성녀로 추대하려 한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성녀 자리에 앉힐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이야. 가신들과 귀족 대표들의 얼굴이 굳었다.
“성력을 가진 이가 폐하의 자식임을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이는 한 번도 있지 않았던 일입니다. 저희들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황제는 예상대로 반발이 심한 이들을 보며 턱을 매만졌다.
“데펠로아 그녀를 내가 가둬 두고 안았던 것을 잊지 않았겠지. 방계의 여식도 아니고, 평범한 가문의 힘을 가진 이였다. 반쪽짜리 피를 이었으니 이상할 것도 없지.”
“하오나!”
쾅!
손으로 의자를 내려치는 커다란 소리에 가신들의 몸이 떨렸다.
“그대들은 지금 짐을 의심하는 것인가? 내 자식이 맞다질 않나. 내가 무슨 이유로 거짓말로 지어내겠나.”
“그, 그건…….”
“이 건에 대해서 더는 말하지 말게. 짐은 굉장히 그대들에게 실망이 크오.”
황제의 으름장에 귀족들은 고개를 숙였다. 제국은 황권이 강한 나라였기에 아무리 반대한다고 한들 소용이 없었다.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제 목을 쥐려 할 것이다.
하여 그들은 황제의 말에 더는 토를 달지 못했다.
* * *
“어떻게 나한테 이런 수모를!”
황후는 알현실에서 쫓겨나 분노로 몸을 떨었다.
기어코 방으로 돌아가 물건을 바닥에 팽개치며 소리를 질렀다.
“제니스, 이년을 그때 죽였어야 했는데!”
데펠로아는 죽어서도 저를 방해했다. 황제가 제니스를 찾아낼 줄도 몰랐다.
그저 꽁꽁 숨어서 살아갔으면 좋았을 것을.
“당장 폐하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내.”
“알겠습니다.”
“그리고 뭘 숨기고 있는 것 같으니 그게 뭔지도 찾아내서 가지고 와.”
황후는 씩씩거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황태자는 어디에 있지?”
“전하께서는 현재 정무로 바빠서 잠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요즘 들어 자주 나가는구나.”
아들의 얼굴을 보기가 이토록 어려워서야. 그녀는 툭툭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치며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뭔가가 있는 것 같아.”
궁이 조용한 것도 그렇고, 밖이 소란스러운 것도.
“센 공작의 저택에 불이 났다지? 누구의 짓인지 알아봐.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저 그게…….”
기사가 안절부절못하며 자리를 뜨지 않았다.
황후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그에게 다가가 부채로 턱을 들어 올렸다.
“오, 이런. 혼자서 담고 있으면 답답할 텐데. 털어놓으면 편해질 게야.”
“……아무것도 아닙니다.”
“네 슬하에 가족이 꽤 많다지? 황실 기사라고는 하나 풍족하진 않을 텐데.”
그녀는 제 손가락에 낀 반지 하나를 빼어내 그에게 내밀었다.
“이거 하나만 팔아도 꽤 값을 받을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기사는 넙죽 바닥에 엎드리며 반지를 챙겼다.
“사실 사냥 대회에서 작은 소동이 있었습니다.”
“……사냥 대회에서?”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 누구도 제게 보고하지 않았기에 몰랐다.
“벨루아 가문의 엘르 나타시아 영애가 위협을 당했지만, 자객들이 죽어 있는 상태라…….”
“안타깝게 되었구나. 그때 죽었다면 좋았을 텐데.”
황후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그러곤 좋은 묘수가 떠오른 듯 활짝 웃었다.
“그렇다면, 좀 더 일이 쉽게 풀릴 것 같구나.”
“예?”
“아무것도 아니니 나가 보거라.”
“네, 감사합니다!”
황후는 기사가 나가자마자 외출할 채비를 했다.
* * *
“빨리 왔네.”
서신이 효과가 좋긴 한가 봐.
나는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리온을 보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어떻게 된 거야?”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어. 몸은 괜찮은 것 같네.”
“센 공작 일 말이야. 아직 나한테 아무것도 말 안 해 줬잖아.”
“저택에 불이 난 모양이야. 살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네가 한 거야?”
나는 리온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했다고 한다면, 너도 날 괴물로 볼까.”
“그런 말이 아니잖아.”
“그 방법밖에 없었어. 널 위협하는 건 그게 뭐든 없앨 거야.”
“리온.”
그는 정말로 그렇게 할 위인이었다. 나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알아, 내게 반려가 있는 한 소용 없다는 거.”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안 돼.”
그렇게 되면 결국 똑같아지게 된다. 델테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리온과 포지션만 바뀌었다뿐이지, 그는 제니스를 사랑하고 있다.
리온 역시 문양을 함께 공유하고 있고.
“무슨 생각을 하든 안 돼.”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 모양이네.”
“리온, 리온.”
나는 그를 꽉 끌어안았다. 내일 이곳에 제니스와 델테르가 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리온은 그때를 놓치지 않겠지.
막아야 했다. 이 방법은 서로에게 좋지 않으니까.
무슨 방법이라도 있을 것이다.
“황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제니스.”
도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거야. 차분히 머리를 굴려 보자.
나는 리온을 안아 등을 토닥였다.
“……미안해.”
괴물이 되지 않게 막으려 했는데 결과적으로 그러질 못했다.
“엘르, 나는 미안하다는 말이 너무 싫더라.”
리온은 나를 품에서 떼어 내며 시선을 맞췄다.
“그러니 다른 말로 해 줘.”
“으응…….”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리온의 손길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처음에 놀랐어. 내가 잘못한 건 아닐까 하고.”
리온의 안도하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다행이다.”
천천히 내 액세서리를 벗겨 낸 리온이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손목을 응시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아? 네가 범인이란 걸 알게 되면…….”
“괜찮아. 그건 황태자가 다 처리했으니까.”
“……그가 왜?”
“아, 빚이 있거든.”
리온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빚이라……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네.
“공식적인 수사는 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내가 잡힐 일도 없어.”
“그렇구나.”
그제야 한결 마음이 놓였다. 나로 인해 리온이 또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건 아닐지 걱정했었다.
“이제 더는 그러지 마.”
“……알았어.”
“황녀의 움직임이 이상하다는 건 무슨 말이야?”
“아직 확실하지 않아서. 일단은 몸조심하고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똑똑똑.
“저, 아가씨. 디리아예요.”
화들짝 놀란 나는 리온과 동시에 문을 쳐다봤다.
“이런, 이런 가 봐야겠네.”
“내일 말고 모레 와.”
“알았어. 네 말대로 할게.”
“진짜지?”
리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열리기 전에 내 얼굴을 부드럽게 잡고 입을 맞췄다.
“흡.”
열린 입술 사이로 부드럽게 밀려들어 온 시원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여린 살을 혀로 툭툭 치며 헤집은 그는 웃으며 나와의 거리를 벌렸다.
“또 올게.”
“와아 진짜…….”
나는 얼빠진 얼굴로 입술을 매만졌다.
진짜 어디서 이런 거 배워 오는 거야. 아주 칭찬해 줘야겠어.
“아가씨?”
디리아는 문을 열고 들어와 나를 보았다.
“괜찮으세요?”
“어, 어. 괜찮아. 그런데 무슨 일이야?”
“아…… 그게.”
디리아는 서신 하나를 보여줬다. 나는 황실 문양이 찍힌 서신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뭐야?”
“그게 조금 전 어떤 사람이 와서 아가씨께 전해 달라고 했어요.”
“나한테?”
나는 서신을 열어 보았다. 거기엔 황후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뜻하지 않은 패가 손에 들어왔네.”
원치도 않은 패이긴 한데. 지금으로는 꽤 유용하게 쓰일 것 같았다.
“잠깐 나갔다 와야 할 것 같아.”
“지금요?”
“응, 다른 사람들에겐 비밀로 해 줘.”
“……하지만 호위도 없이.”
“괜찮아.”
먼저 손을 내민 쪽은 황후였으니 나를 죽이진 않을 것이다.
아마도 센 공작의 일과 사냥 대회에 있었던 일을 보고 받은 듯했다.
‘느리네, 느려.’
황실에는 황후의 편이 영 없나 본데?
나는 망토를 뒤집어쓰고 방에서 나왔다.
자 그럼, 거래를 해 보러 가 볼까나. 그녀도 뭔가를 알아냈으니 나를 찾을 것일 테지.
“아버지께는 보고하지 마.”
“정말 가시려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 뒷길로 나오자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굼뜨구나. 다른 사람의 시선에 띄지 않게 어서 타도록 하렴.”
황후는 창문을 통해 고갯짓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