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에드가는 엘르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떨궜다.
조금 더 신중하게 했어야 했는데 마음이 급해서 그러질 못했다.
게다가 지금이 딱 적기였기에 물러설 수도 없었다.
이 정도로 반발 작용이 심할 줄 알았다면…….
그러면 센 공작을 처리하지 않았을까?
아니, 그자는 계속해서 엘르의 목숨을 위협했을 것이다.
둘 중 누군가가 죽지 않는다면 운명은 파멸로 이끌고 갔을 게 뻔했다.
에드가는 돌아온 엘에게 물었다.
“아직인가.”
엘은 주변을 살폈지만 리온의 기척을 느끼진 못했다.
“네, 죄송합니다.”
“……느려 터졌군.”
에드가는 엘르에게 어떠한 것도 해 줄 수 없었다. 리온이 와야지만 엘르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것도 아니면 성력을 지니고 있는 제니스를 불러내야 했지만, 도와줄 리 만무했다.
게다가 센 공작을 처리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곤란하게 될 테니 기다리는 수밖에.
에드가는 자리에서 일어나 초조하게 문을 보았다.
“백작님,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죠.”
“제가 의원을 불러올까요?”
디리아는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준비를 했다.
의원으로 될 일이었으면 이리 초조하지도 않았을 터.
에드가는 고개를 저었다.
“리온이 와야지만 해결할 수 있다.”
“……리온 님이요?”
디리아는 시계를 보았다. 벌써 엘르가 쓰러진 지도 한 시간이 다 되어 갔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끙끙 앓는 것도 모자라 고통스러워 보였다.
쓰러지기 전 엘르의 얼굴에 공허함이 맴돌았던 것은…… 반려가 사라진 것에 대한 영향일까?
“언제나 그렇듯 늘 나를 놀라게 하는구나.”
어릴 때부터 그녀는 그래 왔다. 예상을 뒤엎은 일을 벌여 제 심장을 하루에도 몇 번이고 곤두박질치게 했다.
오늘도 그러니 아무렇지 않게 털고 일어날 것이다.
그때 제가 쓰러져 깨어나지 못했던 것처럼, 엘르 역시 잠시 이러는 것뿐이리라.
에드가는 간절했다.
“제길, 더는 안 되겠군.”
결국 참지 못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가려 했다.
“엘르?”
그리고 그토록 기다렸던 리온이 나타나자 화가 치밀었다.
“대체 뭐 한다고 이제야!”
에드가의 분노 어린 목소리에 리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 왜 다들 그러고 있는 겁니까.”
그가 생각했던 모습은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엘르가 달려와 제 멱살을 잡으며 잔소리를 늘어놨어야 하는데.
“어째서 엘르가 누워 있는 거지?”
리온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원흉을 없애고 돌아왔다.
그런데 왜 엘르는 창백한 얼굴로 잠이 들어 있을까.
황급히 엘르에게로 다가간 리온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러곤 마법을 흘려보내며 안색을 살폈다.
“제발, 제발.”
이토록 간절했던 적은 없었다.
“으으음…….”
아까보다 한결 나은 숨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모두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아.”
“……대체 뭐 했길래.”
에드가가 거칠게 리온의 멱살을 잡으며 화를 냈다.
리온은 아무 말 하지 못하고 허망한 눈으로 에드가를 보았다.
저를 향해 욕을 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일을 끝내자마자 곧바로 달려왔어야 했는데.
마력을 너무 써 버린 탓에 제어가 힘들었다.
컨트롤을 하다 보니 조금 늦은 것이다.
마력이 폭주한 상태에서 저를 마주하게 되면 엘르는 견디지 못할 테니까.
“둘 다 동작 그만.”
어느새 몸을 일으킨 엘르가 리온과 에드가를 보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 디리아가 두 사람을 떼어 놓으며 엘르에게 다가갔다.
“아가씨 괜찮으신 거죠?!”
엘르는 디리아를 향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좀 아프긴 했는데…… 이젠 괜찮아. 그건 그렇고 두 사람 나랑 이야기 좀 하죠?”
그녀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까만 해도 아파서 골골거렸던 가녀린 모습이었건만, 어쩐지 힘이 넘쳐 보였다.
그 모습에 에드가와 리온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까와 사뭇 다른 분위기에 에드가의 그림자들은 모른 척 모습을 감췄다.
방에 남은 것은 엘르와 에드가 그리고 리온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디리아는 연신 엘르의 몸을 살폈다.
방 안에 흐르는 기류에는 관심도 없는 듯했다.
“세상에 아가씨 나중에 이야기해요. 두 분은 나가세요!”
디리아의 말에 에드가와 리온은 기다렸다는 듯이 방문을 나섰다.
엘르는 손을 뻗어 그들을 저지하려 했지만 디리아의 힘에 의해 침대에 다시금 누웠다.
“저…… 디리아?”
“아무 말씀 하지 마세요. 절대 안정이니까요! 제가 진짜 아까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그녀는 울먹이며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 일주일간 쉬세요! 다른 말은 하지 마세요. 저 진짜 진심이에요!”
엘르는 이렇게 화를 내는 디리아는 처음 봤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반박하면 안 될 것 같았다.
* * *
결국 방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 나는 침대에 누운 채 디리아를 불렀다.
“아가씨 뭐 불편한 거 있나요?”
“내가 부탁한 건 했나 싶어서.”
“그럼요. 당연하죠! 베르뎅 쥬얼리 숍에 서신 보냈어요.”
“답은 아직이지?”
“아마 직접 오실 것 같아요.”
여기까지 오려면 꽤나 걸릴 텐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다.
사람이 고팠던 나는 베르뎅의 방문을 열렬히 반겨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백작님께서는 오늘도 바쁘셔서 외출하셨어요.”
“요즘 들어 너무 바쁘신 거 아니야?”
“아무래도 아가씨 일도 있고…… 시내가 요즘 난리도 아니라서요.”
디리아는 말끝을 흐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저런 표정을 내게 뭔가를 숨길 때나 하는 건데.
“디리아,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지?”
“아, 아니요!”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티가 나도 너무 나잖아. 캐물어도 대답해 주지 않겠지.
“황실에서 별다른 이야기는 없어?”
“네, 몸이 좋지 않다고 하니 일정을 연기해 줬어요. 대신 황태자 전하께서 방문하신다는 것 같아요.”
“……황태자가?”
제니스도 함께 오려나.
둘의 방문은 달갑지 않은데…….
혹시 모르니 액세서리를 차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언제 온다고 했어?”
“내일이라고 들었어요. 아마도 백작님과 만나고 돌아가실 거예요.”
“흐음. 그래?”
디리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센 공작이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한데.’
어디에도 물을 곳이 없었다. 아버지도 바쁘다는 핑계로 나를 피했고, 리온도 찾아오지 않았다.
“서신을 써야겠어.”
“네, 준비해 드릴게요.”
디리아는 곧장 방을 나섰다.
나는 침대에 머리를 굴려 보았다. 문양이 없어졌다는 것은 센 공작이 죽었다는 건데.
이렇게 저택이 조용할 리 없어. 귀족 시해인 데다가 상대는 센 공작이잖아.
그는 제국에 꽤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에 반해 벨루아 가문은 황실의 미움을 받고 있는 처지고.
그게 이상하단 말이지…….
“왜 조용하지?”
분명 황실에서 이때다 싶어 가문을 몰아세워야 하는데.
침대에서 일어나 문에 다가가 귀를 바짝 댔다.
그러나 저택은 고요함 그 자체였다.
생명의 위협에선 벗어났으니 마음이 편해져야 했지만, 찝찝함은 가시지 않았다.
* * *
제니스는 불안함에 잠을 자지 못했다.
‘도대체 어딜 다녀왔던 걸까.’
며칠 전 궁으로 돌아온 델테르를 우연히 보았다. 그가 지나간 곳에서 화약 냄새가 느껴졌다.
그리고 다음 날 센 공작의 저택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신문의 대문을 장식했다.
“분명 관련이 있어.”
도대체 왜? 무슨 이유로?
델테르가 엘르를 도와줄 이유는 없었다. 그는 벨루아 가문 자체를 싫어했으니까.
아무리 저와 리온의 관계를 막기 위해서라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뭔가 약점이라도 잡히지 않은 이상.
제니스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대로 있다간, 모든 게 끝나고 말 거야.
그녀는 그 생각을 마치자 곧장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다행히 델테르는 보이지 않았다.
“황녀님 지금은 들어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경비가 제니스를 말렸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당장 고해 주세요. 급한 일이니까.”
“……안에 황후 폐하도 계십니다.”
“괜찮아요.”
그녀는 지금 조급했다. 센 공작이 죽었다면 엘르는 자유로워졌을 터.
뒤처리까지 황태자가 했으니 벨루아 가문에서 움직였다는 증거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 황제가 그걸 알고 있는지도 확인해야 했다.
제니스는 떨리는 마음을 안고 알현실 안으로 들어섰다.
황제는 제니스의 방문에 살짝 당황한 얼굴을 했다.
황후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알현을 요청했다라.
제니스는 황후를 힐끔 보곤 드레스 자락을 꽉 쥐었다.
“갑자기 무슨 일로 왔느냐.”
“아, 저…… 따로 말씀드릴 게 있어서요.”
“예의 없긴.”
황후는 제니스의 방문에 눈을 게슴츠레 떴다.
‘혹시, 저것이 내가 한 짓을 일러바칠 생각은 아니겠지.’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가 한 짓이 있으니 찔리기도 했고.
그러나 제니스는 그 일은 잊은 지 오래였다.
저에게 지금 중요한 건 엘르의 반려가 사라졌다는 것이니까.
“폐하, 그동안 거절했던 성녀의 지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습니다.”
“마음을 굳힌 것이냐?”
“네, 보탬이 된다면 운명을 따라야죠.”
황제는 제니스의 결단이 마음에 들었는지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원하는 바는?”
“…… 네?”
“원하는 게 있을 테니 말해 보거라.”
제니스는 힐끔 황후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가 여기 있는 한 제 입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한정적이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