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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93/120)

제93화

만약 제니스가 우승했다면, 저 역시 아버지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을 것이다.

“수사는 하고 있겠지?”

“네, 그런데 특이사항은 없습니다.”

사실 제대로 하진 않았다. 어쩐지 찝찝하기도 하고, 리온의 일도 있었고.

‘아무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그는 오히려 리온과 엘르의 관계를 응원하는 쪽이었다.

제니스에게 위협만 가하지 않는다면 신경 쓸 필요도 없고.

단지, 신경 쓰이는 것은 리온의 손목에 있는 문양이었다.

“다들 액세서리를 차고 다닌다지?”

“네, 그렇습니다. 문양 가리기에 워낙 좋으니까요.”

“문양이 없는 사람들도 액세서리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어느 날부터 제국 내 사람들의 손목에 하나둘 차고 있더니 황녀와 황태자까지.

아들에게도 문양이 생긴 것은 아닐지 궁금했다.

그러나 황제는 문양을 믿지 않았다. 그들에게 생겼다고 한들 다른 짝을 이어 줄 생각이었다.

“한 가지 불편한 점이라면 꾸준한 수리가 필요하다는 것이겠죠.”

“꾸준한 수리라…….”

“엘르 영애가 알고 보니 꽤 수완가더군요.”

돈이 될 만한 것은 기가 막히게 눈치를 챘다.

액세서리를 팔 땐 언제고 수리까지 돈을 받았다.

심지어 놀라울 정도로 보증 기간까지만 멀쩡했다.

“여러 가지로 흥미롭구나.”

황제는 돈이 된다는 생각에 눈을 번뜩였다.

‘벨루아 가문이 최근 들어 한 사업은 다 딸의 머리에서 나온 게로군.’

이상하긴 했다. 에드가가 추진했던 것과는 달랐으니까.

“아, 저기 오는구나.”

황제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엘르를 맞이했다.

그녀의 뒤에 올라탄 리온을 발견한 제니스의 얼굴은 한없이 어두워졌다.

* * *

얼떨결에 시상을 받고, 사람들의 환호 속에 사냥 대회가 끝이 났다.

그저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눈 깜짝할 사이에 뭔가 후루룩 지나간 느낌이 들었다.

“황제에게 요구할 건 생각했나.”

“그럼요.”

예전부터 생각해 오던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변방에서 벗어나는 것. 제국 수도까지 오는 게 워낙 힘들어야지.

그 먼 거리를 리온은 어떻게 왔다 갔다 하는 걸까. 마법진을 이용한다고 해도 멀미를 해 대는 통에 내키지 않았다.

“뭘 요구할지 기대가 되네.”

“아마도 황제의 얼굴이 볼만해질 걸요?”

나는 씩 웃었다.

에드가는 뭐가 됐든 내가 우승한 것 자체가 좋은 듯했다.

“그나저나, 리온은 그새 어딜 갔지?”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정말 요즘 들어 자주 사라진단 말이야.

막사를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제니스가 다가왔다.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두 손에 힘을 줘 움켜쥔 채.

“축하드려요, 엘르 영애.”

“아닙니다. 함께 했다면 황녀님께서 우승을 하셨을 텐데.”

“과연 그럴까요? 운이 참 좋아요.”

우승을 놓친 것이 분한 모양이다. 하긴, 그녀가 바라는 것은 리온을 제 곁에 두는 것이었을 테니까.

“네, 제가 태어날 때부터 운은 좋았어요.”

몇 번의 죽을 고비도 넘겼고,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것을 보면.

단지 운이라고 하기엔 들인 노력이 많긴 했지만, 그건 제니스가 모를 테니 넘어가도록 하자.

“다음에 또 초대해 주세요.”

“……그러도록 하죠. 그런데 엘르 영애는 상품으로 뭘 들어달라 하실 건가요?”

그녀의 불안한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아마도 내가 리온과 관련된 것을 황제에게 말할까 두려운 거겠지.

예컨대 그와의 약혼이랄지, 결혼 같은 거?

그러나 나는 그런 식으로 리온을 얽매이게 할 생각이 없었다.

“글쎄요. 나중에 되면 아실 테니 확인해 보세요. 제가 뭘 폐하께 요구했는지는.”

제니스는 몸을 돌려 자신의 마차로 향했다.

여전히 안쓰럽게 떨리고 있는 그녀의 몸이 눈에 들어왔다.

마차에 올라타 있는 델테르가 나를 보며 히죽 웃었다.

내 우승으로 슬퍼하는 이는 제니스밖에 없는 듯했다.

* * *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센 공작은 엉망이 된 제 공작저를 보며 소리쳤다.

누가 와서 헤집어 놓고 가지 않은 이상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인간이 한 짓이라고 보기에도 힘들 정도로 잔혹하고도 종잡을 수 없었다.

공작저에 있던 자백제가 다 깨져 있었다. 심지어 사들인 용병조차도 죽음을 면치 못했다.

피로 흩뿌려진 공작저를 보며 그는 공포에 휩싸였다.

“…… 이건, 이건.”

잊어버린 기억 하나가 살며시 떠올랐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과 동시에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천천히 고개가 돌아감과 동시에 붉은 눈과 마주했다.

“……너는?”

“내가 경고했는데 못 알아먹은 것 같더군.”

리온은 천천히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폭주하듯 일렁이는 마력과 함께 위압감에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커헉.”

“그러게 건드리지 말랬잖아.”

리온은 자비 없이 센 공작의 옆에 있는 이들의 숨통을 끊어 냈다.

홀로 남은 센 공작이 뒷걸음질을 치며 마력을 끌어모았다.

“그래, 할 수 있는 한 모든 걸 짜내 봐.”

“으윽! 그, 그만둬!”

“더 발악해야지. 너도 그렇게 즐겼잖아?”

죽음의 문턱까지 갔을 때의 두려움을 느껴 봐야 했다.

“그러게 얌전히 있었으면 중간이라도 갔을 텐데.”

리온은 센 공작의 목을 가볍게 움켜잡으며 웃었다.

붉은 눈동자에 고스란히 겁에 질린 센 공작의 얼굴이 담겼다.

* * *

“어……라?”

순간 가슴에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해방감에 개운함 마저 들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아가씨……?”

화들짝 놀란 디리아가 내게 다가와 손수건을 건넸다.

“뭐지?”

왜 눈물이 나는 거야.

아릿하면서도 슬프고, 그러면서도 편했다.

욱신거리는 가슴의 통증과 손목의 화끈거림…….

나는 본능적으로 액세서리를 벗겨 내 문양을 확인했다.

“없어…….”

어째서? 왜?

문양이 없어지는 것은 단 하나의 경우밖에 없었다.

설마!

리온이 기어코 일을 낸 것인가. 이 일을 다른 사람이 알게 되면 리온이 위험해진다.

반려를 죽이는 것만큼 큰 죄는 없었다.

게다가 벨루아 가문은 황제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이 기회를 빌미로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제가 요청하려 했던 것도 허사가 되고 말 것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

“아가씨, 왜 그러세요?”

디리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살폈다.

“백작님께서 지켜보라고 하셨는데 어디가 안 좋으신 건가요?”

아버지가 날 지켜보라고 했다고?

무슨 이유 때문에?

디리아의 말을 들으니 확실해졌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 몸에 일어날 변화를.

“아버지를 봐야겠어. 어디에 계셔?”

“집무실에 계실 거예요.”

“당장 가야 해.”

나는 방문을 열었다.

점점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이 이상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호흡이 가빠 왔고, 열이 올랐다.

“하아, 하아…….”

“아가씨 안 되겠어요. 당장 방으로 돌아가요!”

디리아가 사색이 된 채 내 몸을 부축했다.

“안 돼…… 빨리 가서 제대로 된, 이야기를…….”

의식이 흐려졌다.

눈앞이 컴컴해짐과 동시에 무너지듯 바닥으로 몸이 기울었다.

쿵!

하는 소리가 귓가에 왱왱 울렸다.

* * *

“늦으셨군요.”

리온은 계단에 앉은 채 공작저로 들어서는 델테르를 맞이했다.

“이게 무슨…….”

“말은 안 해도 아실 테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센 공작을 지나쳐 델테르에게 다가갔다.

“그럼, 이만.”

“설마 그때 말한 게.”

“그럼 제가 뭘 부탁할 거라 생각했습니까? 예상도 했을 텐데.”

표정 하나 뒤바뀌지 않는 리온을 보며 델테르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걸 엘르 영애도 알아야 할 텐데.”

“전하껜 더할 나위 없는 기회일 텐데.”

리온의 말에 델테르는 낮게 웃었다.

엘르의 반려가 죽었으니 리온과의 관계는 돈독해질 터.

그러나 이걸 목격한 델테르는 또 다른 걱정이 생겼다.

그의 검이 어디로 향할지는 불 보듯 뻔했다.

제니스가 심기를 건드리는 순간 가차 없이 목을 벨 것이다.

리온은 엘르를 위해서라면 뭐든 하는 인간이었다.

델테르는 그걸 오늘 또다시 두 눈으로 확인했다.

“여기까지다. 내가 봐줄 수 있는 것은.”

“그럼 잘 지키십시오. 그녀가 무슨 선택을 할지도 잘 지켜보고.”

리온은 델테르의 생각을 읽은 듯이 대답했다.

그러곤 미련 없이 공작저를 빠져나갔다.

덩그러니 공작저에 남은 델테르는 허탈함에 주변을 보았다.

생명체라곤 어느 것도 남기지 않은 듯했다. 그는 불을 만들어 내 바닥에 떨어뜨렸다.

“…… 하.”

기도 차지 않는군. 이렇게 일을 벌여 놓고 유유자적 사라지다니.

델테르는 불길이 치솟는 것을 본 후 공작저를 빠져나갔다.

아무래도 기사 하나를 던져 놓아야 할 것 같다.

‘그래서, 그놈들을 내게 준 거였군.’

붉은 문양 사냥꾼.

그들을 이용하면 일은 쉽게 풀릴 것이다. 여기까지 내다본 것을 보니 이미 오래전에 계획은 끝냈을 터.

손에서 놀아났다는 기분을 지우기 어려웠다.

* * *

“문양의 부작용인가?”

에드가는 열이 오르는 엘르를 보며 신음했다.

손목을 확인하니 문양은 사라져 있었다.

언제까지고 선명할 것이라 여겼는데.

‘성공한 모양이군.’

에드가는 한결 마음이 편했다. 그래도 센 공작이 사라졌으니 목숨의 위협은 더는 없을 터.

그러나 이대로 엘르가 깨어나지 않는다면 곤란했다.

“알아본 건?”

“이런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합니다. 문양이 선명해진 경우일수록 부작용이 큰 것 같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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