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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92/120)

제92화

한참을 달리던 말이 멈춘 것은 숲속 한가운데였다.

그는 숨을 몰아쉬더니 내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괜찮으십니까?”

“저는 괜찮은데…… 이것 좀 놔주시겠어요?”

나는 센 공작의 손을 잡아떼며 말에서 내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아무래도 사람을 불러야겠네요.”

“말에 다시 올라타시죠. 위험합니다.”

센 공작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나는 잡지 않았다.

“좀 걷고 싶어서요.”

솔직히 같이 붙어 있으니 없던 마음도 생길 것 같았다.

센 공작은 아쉬운 표정을 짓더니 말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그럼 함께 걷겠습니다.”

“……그러세요.”

나는 화살을 꼭 쥐었다.

여차하면 날카로운 화살을 목에 갖다 대야지.

나도 눈에 뵈는 게 없다고.

다행히 센 공작은 별다른 행동을 취하진 않았다.

긴장되는 적막 속에 샘물을 발견했다. 목이 조금 타던 찰나에 다행이었다.

사실 센 공작이 물을 건네긴 했지만, 뭘 탔는지 알 수 없어 거절했다.

“와! 물이 시원해요. 공작님도 한 입 하세요.”

이럴 땐 천진난만한 척이 최고다.

그의 호의를 거절하면서도 의심하지 않는 척 티를 내야지.

뭐 믿진 않는 것 같지만.

“사냥도 틀린 것 같으니 어서 돌아가요.”

“네, 그럴 생각입니다. 그런데 엘르 영애. 제가 무섭진 않으십니까?”

“……그렇게 물으니 무서워지는데요.”

“이런, 그럴 생각은 없었습니다.”

거짓말 마. 자각하게 하려는 셈이었잖아!

나는 자리에서 얼른 일어나 말에게 다가갔다.

“자, 그럼 빨리 이동하죠.”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같이 있을 때 제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그렇죠. 저 역시 공작님께 뭘 할 수 없으니 걱정 마세요.”

이젠 숨기지도 않을 생각인가 보다.

“그런 눈빛으로 보니 상처받는군요.”

상처는 무슨.

눈알 굴러가는 소리 여기까지 들린다.

“어차피 계획하신 것도 틀어진 것 같으니 시간 끌 필요 없이 돌아가는 게 어때요?”

“뭐,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사실 같이 있으니 꽤 불리하다고 느끼기도 했고.”

“왜요?”

나는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가며 해사하게 웃었다.

“흔들리기라도 하시나요?”

그리고 또 한 발짝.

“막상 죽이자니 심장이 막 아프고 그래요?”

또 한 발짝.

그의 앞에 선 나는 더욱 활짝 웃으며 얼굴을 가까이했다.

“저는 좀 슬플 것 같은데…… 공작님 꽤 잘생겼잖아요.”

공작의 얼굴을 매만지며 가볍게 웃었다.

심장이 쿵쿵 뛰며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맴돌았다.

탁하고 내 손을 낚아챈 센 공작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저 역시 아깝게 생각합니다.”

그는 내 허리에 손을 감싸 잡아당기며 거리를 좁혔다.

“그대 역시 워낙 좋아하는 얼굴이라서.”

“아깝네요, 둘 다.”

나는 그의 손목에 채워진 액세서리를 보다 손으로 툭툭 쳤다.

“간수 잘해요. 모두에게 알리기 싫으면.”

순간 몸 안으로 강한 마력이 흘러들어 왔다. 정신을 지배하고, 영혼을 갉아먹는 듯한 느낌에 으득 이를 갈았다.

그러나 곧 온몸이 편안해졌다.

‘……각성?’

몸의 변화에 놀란 나는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는 내게 마력을 흘려보냈지만, 그걸 아무렇지 않게 쳐낸 것이다.

센 공작은 제법 놀란 얼굴이었다.

‘아주 쓸모없는 몸은 아닌 모양이네.’

다행히 에드가의 피를 이어받긴 했나 보다.

문양이 발현되고 나서야 각성을 한 것 같지만, 필요할 때 적재적소에 나타나 주니 나야 고맙지.

쾅!

커다란 굉음과 함께 살기가 뒤에서 느껴졌다.

센 공작의 얼굴에는 설핏 두려움이 스쳐 지나갔다.

나 역시 숨쉬기 힘든 강한 힘에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그곳엔 화가 잔뜩 나 보이는 리온이 살기를 내보이며 다가오고 있었다.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온 그가 나를 낚아채 제 품으로 당겼다.

“……꽤 재밌는 놀이였습니다. 어린애나 하는 숨바꼭질이라니.”

리온의 분노가 여과 없이 드러났다.

“사냥은 끝났습니다.”

그제야 나는 안도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구나.

리온이 이곳에 나타남과 동시에 센 공작의 수족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각하! 큰일 났습니다.”

요란스럽게 나타난 이들은 나와 리온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곤 그의 귓가에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와락 얼굴을 찌푸리며 센 공작이 말에 올라탔다.

“리온 경이 왔으니 엘르 영애를 부탁하겠습니다.”

“센 공작님?”

나는 다급히 빠져나가는 그를 불렀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뭐, 급한 일이 있나 보지.”

리온은 조금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다친 곳은 없는 것 같네.”

“으응, 별일은 없었어.”

“별일이 없다고 하기엔 아까의 상황에 대한 설명이 듣고 싶은데.”

더욱 강하게 나를 품에 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그건 가면서 이야기를 좀 들어 볼까 해.”

“꺅!”

나를 말 위에 태운 리온이 내 뒤에 곧바로 올라타 끌어안았다.

아까의 느낌과는 달랐다.

이게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지.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뭔가를 생각하려 할수록 느낌이 이상했다.

그러니까 말 위에서 서로 안고 달리는 건 생각보다…….

“엘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리온의 목소리가 귓가에 스치자 흠칫 몸이 움츠러들었다.

“아, 아무것도! 아무런 생각도!”

너무 강하게 부정한 것 같긴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변태 같으니 얼버무리자.

“이번에도 어떻게 잘 알고 찾아냈네.”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어.”

“……어?”

그런 말을 내뱉으면서 나를 좀 더 제 쪽으로 잡아당기는 건 기분 탓이겠지?

나는 달리는 말 위에서 정면만 응시한 채 눈을 깜빡였다.

“센 공작과 이 정도로 가깝게 잘만 달리더니.”

“그, 그건.”

“지금은 왜 몸을 뺄까.”

으악.

심장이 뛰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이러다가 과 호흡으로 죽는 건 아니겠지.

“살려고 뭐든 해 봤을 뿐이야.”

“……그래?”

리온의 표정을 보지 못했지만 아마도 장난을 치고 싶은 얼굴일 것이다.

“정말 사냥이 끝난 거야?”

“아니.”

“뭐어?”

“끝나긴 했지. 사냥 대회는.”

그제야 나는 한시름 놓았다.

이 지긋지긋한 대회가 끝이 났으니 집으로 돌아가 은신해야지.

“걱정 마. 내일이면 편해질 테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그건 그렇고 센 공작은 무슨 일이었을까.”

나를 버리고 간 걸 보면 더 급한 일이 있다는 것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반려를 죽이는 일보다 급한 건 없어 보였다.

“엘르, 조금 섭섭해지려 해.”

“……뭐가?”

“아까부터 계속 센 공작 이야기만 하고 있잖아.”

“아!”

힘차게 달리던 말이 이내 속도를 늦췄다. 리온의 목소리가 더욱 잘 들렸다.

“너하고 있는 건 지금 난데.”

“그, 그렇지?”

“그럼 누구에게 집중을 하는 게 맞는 걸까.”

“……너겠지?”

“맞아, 잘 알고 있네.”

나는 고개를 돌려 리온을 보았다. 눈을 접고 웃는 그의 눈동자와 마주하자 심장이 잘게 떨려왔다.

홱 하고 고개를 돌린 채 어색하게 손을 뻗었다.

“빠, 빨리 가자! 아버지가 걱정하겠어.”

“이제 천천히 하고 싶은데.”

그런 말 하면서 끌어안지 말란 말이야.

정말 리온 때문에 심장이 남아나질 않았다.

“빨리 오라고 하십니다.”

순가 나타난 엘만 아니었다면 이상한 기류가 이어졌을 것이다.

아버지가 보낸 것인지 엘이 난처한 표정을 하며 나와 리온을 번갈아 보았다.

“백작님을 닮아서 그런지 눈치가 없으시군요.”

리온의 말에 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말 많이 듣습니다.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있으니 이리 행동하는 겁니다. 빨리 움직이시죠.”

엘은 생각보다 강적이었다. 리온의 말에도 꿈쩍도 않고 대답했다.

아마도 리온에게 당한 게 많아서 그런 것 같지만…….

“폐하께서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황제가 왜요?”

“그야, 엘르 님이 사냥 대회의 우승자니까요.”

“……와.”

역시 권력의 힘이란.

정말로 아버지의 말대로 우승자가 되어 있었다.

나는 헛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건 말도 안 돼요.”

제니스는 불합리하다며 반박했다. 그러나 엘르 앞으로 달린 사냥 수는 거짓이 아니었다.

“그녀는 제대로 사냥도 하지 못했어요.”

“제니스, 그건 중요하지 않단다.”

황제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어루더듬었다.

“자신의 편에 선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 역시 필요한 것이란다.”

그녀는 얻고 싶은 게 있었다. 그래서 악착같이 사냥을 했는데.

또다시 엘르가 뺏어가고 말았다.

그것도 정정당당하게 경쟁을 벌인 것도 아니지 않은가.

억울하고 분했다.

“……그럼 우승자는 엘르 영애가 되는 건가요?”

“안타깝지만 그렇구나.”

제니스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황제는 그녀의 욕망이 기꺼웠다. 욕망이 클수록 제니스는 황녀의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될 것이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무슨 방법을 쓰든 우승만 하면 되는 거 아니었습니까?”

델테르는 제니스가 우승하지 않은 것에 안도했다. 그녀가 뭘 원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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