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화 (90/120)

제90화

“제길 사냥에 실패할 줄이야.”

센 공작의 막사는 다소 소란스러웠다.

그는 분을 참지 못하고 물건을 집어 던지며 씩씩거렸다.

갑자기 나타난 놈들만 아니었어도 엘르를 없앨 수 있었는데.

황녀와 동행한다고 들어 쉽지 않을 거라 단념했었다. 그 상황에서 겨우 엘르를 죽일 기회가 찾아왔다. 그런데 힘들게 찾아온 기회가 무참히 박살이 났다.

무엇보다 오늘 엘르와 마주했을 때 이전보다 더 강한 힘이 느껴졌다. 이대로 가다간 저 역시 그녀에게 홀리고 말 것이다.

이성을 잃기 전에 모든 걸 끝내야만 했다.

사냥 대회가 그에게 주어진 완벽한 기회였다.

“그거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기사는 고개를 푹 숙였다. 센 공작도 봤겠지만, 그들은 이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단 번의 힘으로 목숨을 앗아간 괴물들을 상대로 어떻게 싸운단 말인가.

도망을 칠 새도 없이 전멸했다.

“사냥 대회가 끝나고 나서 움직일 거니 그렇게 알도록 해.”

심지어 뭔가 대비가 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기사는 말을 아꼈다. 지금 센 공작의 심기를 건드렸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네, 알겠습니다.”

“엘르 영애의 막사는?”

“아 그게. 아직도 마탑주의 막사에 있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지금은 백작이 지키고 있습니다.”

“……에드가 백작이 왔나?”

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센 공작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그는 소리 지르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아 내며 기사의 얼굴을 우겨 잡았다.

“반드시 사냥 대회가 끝나고 연회가 열릴 때를 노려. 알겠나?”

“네, 네!”

센 공작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의자에 앉았다.

“제길, 제기랄! 이대로 가다간 내가 죽어.”

이렇게 끝낼 순 없었다.

엘르와 같이 있겠다 한 것도 자기가 의심받는 상황을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내일까지만 버티면 된다. 마지막 사냥 날 어떻게든 처리를 하면……!

함께 있을 때 엘르가 무사한 것을 본다면 의심하는 이들의 눈을 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걸 이용해 한 번 더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갈 생각이었다. 이번엔 저 역시 위험에 빠지게 되는 계획을 짰으니까.

‘괜찮아. 별일 없을 것이다.’

철저히 돈을 주고 산 이들이었다.

연고도 없고, 저와 관련되어 있지 않은 이들로만 구성이 된.

돈을 주고 목숨을 산 자들이었기 때문에 들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 지금은 나와 비슷한 상황의 사람이 필요해. 제니스 황녀…….

그녀라면 말이 잘 통하겠지.

“지금 당장 제니스 황녀의 막사로 은밀하게 안내해.”

기사를 따라 센 공작은 사람들의 시선에 띄지 않게 은밀하게 움직였다.

* * *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황녀님께 고해.”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다음에 다시 오십시오.”

“급한 일이야.”

센 공작은 저를 막아서는 기사를 향해 낮게 읊조렸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제니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간이 늦었는데 막사에 대뜸 찾아오다니.

제니스는 그의 방문이 달갑지 않았다.

아까의 일도 있고, 그녀 역시 센 공작이 벌인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이게 무슨 짓이죠?”

제니스는 잔뜩 경계했다.

“제안을 드릴 게 있어 왔습니다.”

“……제안?”

“여기서 말해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센 공작은 저를 빤히 보고 있는 기사들을 힐끔거리며 능글맞게 웃었다.

‘무슨 속셈인지 알 수가 없어.’

하지만 분명 제게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는 무슨 이유에서건 엘르를 위협하려 했다.

어쩌면 저와 같은 편일지도 모른다.

제니스는 센 공작을 훑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 델테르의 막사와는 멀지 않았다. 여차하면 델테르를 부르면 그만이었다.

황족을 시해할 정도의 배짱은 없을 것 같았고.

“황녀님께선 저와 꽤 말이 통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는 여전히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제니스에게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달콤한 유혹이 될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 있었다. 그녀는 제 손을 잡게 될 것이 분명했다.

제니스는 센 공작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그가 저를 찾아온 이유가 궁금했다.

말이 통한다고 했는데,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을 한 것일까.

“이 밤중에 무슨 급한 일이 있어 찾아왔나요?”

그녀는 차분하게 대응했다.

마음 같아선 그에게 낮에 있었던 일과 연관되어 있는지 바로 묻고 싶었다.

득보다는 실이 크다는 것을 알기에 입을 닫고 있는 것이지만.

“길게 끌지 않겠습니다. 제겐 자백제가 있습니다.”

“……자백제?”

그건 분명 유통을 막았을 텐데. 아직도 존재한다고?

“그렇습니다. 제 반려를 찾기 위해 사용해 왔습니다.”

“그걸 제게 말하는 연유가 무엇이죠? 당장이라도 황태자 전하에게 고할 수도 있어요.”

센 공작은 능글맞게 웃으며 황녀를 응시했다.

“그러지 않으실 거 압니다. 제가 있어야 황녀님께서도 원하는 것을 얻으실 수 있으니까요.”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제니스는 의자에 살짝 기대며 느릿하게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리온 데이비스. 그를 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티 나게 행동을 했다고 생각은 안 했는데.

센 공작의 입에서 나온 리온의 이름에 그녀의 눈썹이 들썩였다.

‘앞으로 행동을 좀 더 조심해야겠어.’

최근에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리온만 보고 나아갔던 것은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사냥 대회에서 센 공작은 알아차린 듯했다.

그건 그렇고 그게 왜 그와 상관이 있는 걸까.

“제 반려가 엘르 영애입니다.”

의외의 말에 제니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래서 사냥 대회를 빌미로 처리를 하려 했던 거구나.’

그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소름이 끼쳤다.

“황녀님께서 작은 도움만 주신다면 서로에게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만.”

“……나더러 다른 사람을 죽이는 일에 동조를 해 달라는 건가?”

“아닙니다. 그저 리온 님의 시선을 끌어 주시면 됩니다.”

“정말 그거면 된다는 건가?”

사실 매혹적인 제안이긴 했다.

엘르에게 반려가 있다는 것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센 공작일 줄은 몰랐다.

대범한 그의 행동에 놀라웠다.

“리온과 엘르 영애 사이에 유대가 굉장히 깊더군요.”

“……알고 있어요.”

“제 예상으로라면 황녀님의 반려가 리온 경 같은데. 맞습니까?”

“무례하군요.”

“아, 죄송합니다. 억지로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센 공작은 한 걸음 물러나는 듯이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의 마음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두 사람 사이에 뭐가 있는지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내게 자백제를 주겠다는 건가요?”

“황녀님께선 구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게다가 궁금한 것을 알게 해 줄 약인데.”

그의 말에 제니스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제가 황녀님께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습니다. 사냥 대회가 끝나는 날까지 기다리겠습니다.”

“……헛걸음했군요.”

제니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센 공작을 내려다보았다.

자백제를 손에 넣는 것은 굉장히 혹할 이야기지만, 그걸 쓰게 되는 순간 약점을 잡히게 될 것이다.

그녀는 그런 리스크를 안고 갈 생각이 없었다.

이미 그가 엘르 영애의 반려라는 것을 알게 된 것부터가 득인 셈이다.

아마도 오늘 일로 판단력이 흐트러져 저를 찾아왔을 터.

제니스는 멍청한 일을 벌일 생각이 없었다.

“이만 돌아가세요. 오늘 이야기는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황녀님, 잘 생각하셔야 할 겁니다. 제게도 꽤 많은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센 공작의 말에 제니스는 헛웃음을 삼켰다.

자신의 손을 잡은 이들이 제 편이 되어 줄 수도 있다고 말하는 건가?

“그렇군요.”

그러나 제니스는 그가 어디까지 제 손을 잡고 함께 갈지 장담할 수 없었다.

반려도 죽이려는 사람이 저라고 그러지 못할까?

“아, 안 됩니다! 전하!”

입구에서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제니스의 고개가 돌아감과 동시에 델테르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둘이서 무슨 작당을 하길래 이 야밤에 막사 안에 함께 있을까.”

“……전하.”

제니스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오해받기 딱 좋은 광경에 등장하다니. 어쩐지 하루 종일 시달릴 것 같았다.

“오늘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있어 잠시 부른 겁니다.”

“궁금한 것이라.”

“……맞습니다. 황녀 전하와 저는 낮에 마주했으니 오해가 있으면 풀기 위해서.”

센 공작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미소 지었다.

황태자 앞에서도 떨지 않고 자연스레 거짓을 늘어놓았다.

그런 모습을 보자니 더욱 그와 손을 잡아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만 들어가세요.”

“시간 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센 공작은 예를 갖춰 인사를 한 후 막사를 빠져나갔다.

제니스는 의심 가득한 눈동자로 저를 빤히 보고 있는 델테르의 시선을 피했다.

“전하께서야 말로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로 오셨나요?”

“아, 뭔가 불안한 느낌이 들어서 말이야. 낮의 일 너와 정말로 연관이 없는 거겠지.”

델테르의 말에 제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번에 일어날 일이라면 모를까, 적어도 오늘은 저는 아니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델테르는 센 공작이 앉았던 의자에 앉아 팔짱을 꼈다.

“……왜 거기에 앉으시는 건가요?”

“오늘 밤은 여기서 날을 새 볼까 하고.”

“……싫어요.”

“네게 권한이 있다고 생각했나?”

그는 자리를 잡은 채 눈을 감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니스는 할 수 없이 델테르를 놔둔 채 침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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