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화
“리온, 그만해.”
나는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제야 굳어져 있던 리온이 표정을 풀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제니스의 얼굴을 아까보다 더 일그러져 있었지만.
“너무 피곤해.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했다.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리온은 나를 부축했다. 나는 그에게 기댄 채 힐끔 센 공작과 제니스를 보았다.
센 공작은 다소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래도 오늘의 기회를 놓친 게 꽤 쓰린 모양이다.
“그럼 내일 함께할 시간을 고대하겠습니다. 엘르 영애.”
누가 봐도 애정이 묻어나는 어조에 소름이 돋았다.
센 공작도 만만찮은 상대임은 틀림없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제니스를 향해 말했다.
“아, 그리고 죄송하지만 황녀님. 막사는 따로 써야 할 것 같아요.”
“엘르 영애!”
“이해하시죠? 제가 이곳에서 믿을 게 리온 밖에 없어서.”
제니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곧장 반박하려 입을 달싹였지만, 델테르로 인해서 제지당했다.
“그만, 황녀. 엘르 영애가 꽤 지쳐 보이니 보내 주는 게 좋을 것 같군.”
“하지만……!”
“더는 소란을 일으키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델테르는 제니스의 주먹 쥔 손을 꽉 잡으며 웃었다.
“……네, 알겠어요.”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더는 나를 잡지 못했다.
“그럼, 내 막사로 가자.”
“으응?”
이야기가 왜 또 그렇게 되는 거지.
나는 눈을 깜빡이며 몸을 뒤로 빼냈다.
“새 막사를 준비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거야.”
“그, 그건 그렇지만.”
“그래, 엘르 영애. 리온 경의 막사에 가 있는 게 안전할 것 같군.”
델테르는 기분이 좋은지 연신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나는 결국 리온의 막사로 발걸음을 돌렸다.
* * *
리온은 막사의 입구를 닫은 후 나를 보았다.
“내일도 긴장 늦추지 마.”
“그래야지. 같이 있는 동안에도 무슨 일을 벌일 게 분명하니까.”
센 공작은 현재 뭐든 할 준비가 된 듯했다.
“아버지는?”
“아마도 오고 계실 거야. 걱정 마. 눈이라도 붙이는 게 어때.”
“여, 여기서?”
“아까 피곤하다고 그랬잖아.”
리온이 내게 다가왔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뒤로 물러섰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는 좀…….
툭.
침대에 넘어지듯 앉아서 리온을 올려다봤다.
다가오는 리온을 본 나는 황급히 이불을 뒤집어쓰며 얼굴을 가렸다.
“잠이 확 몰려오는 것 같아.”
“그럼, 좀 쉬어.”
리온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꼭 감은 채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숨을 작게 내쉬었다.
아까보다 지금이 왜 더 긴장되는 건지.
하지만 정말로 피곤했던 것은 사실이었는지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 * *
“헉, 허억.”
잠에 겨우 들긴 했지만, 악몽에 시달렸다.
꿈에서 깨어나고 싶었지만 눈이 떠지지 않았다.
몸은 무거웠고, 뭔가가 짓누르는 느낌과 함께 힘이 빠졌다.
‘일어나고 싶어.’
뭔가에 잡아먹혀 버리는 느낌과 함께 불안함이 엄습했다.
끙끙 앓으며 이리저리 뒤척여도 눈을 뜰 수 없었다.
이러다 나 못 일어나는 건 아니겠지.
있는 힘껏 몸을 비틀어도 소용없었다. 결국 체념한 채 잠을 청하려 했다.
그리고 이마에 닿는 따스한 촉감과 함께 몸이 편안해졌다.
‘으응? 갑자기…… 잠이…….’
버둥거리던 몸이 멈춤과 동시에 의식이 점차 수렁으로 빠져들어 갔다.
* * *
리온은 힘겹게 잠이 든 엘르를 보며 침음했다.
“……센 공작.”
오늘 일을 시작으로 그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초조함에 더 몰아칠지도 모른다.
조금 더 있다 죽이려 했는데 이렇게 나온다면 저 역시 서둘러 줘야지.
리온은 공포에 사로잡혔던 엘르의 얼굴을 떠올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미끼가 되게 두는 게 아니었는데.
그 순간 제가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엘르는…….
끔찍한 상상이 현실이 될까 두려웠다. 그는 눈을 감고 벽을 기댄 채 손으로 툭툭 탁자를 쳤다.
“그냥 죽이는 건 곤란해.”
없애 버린다면 아주 고통스럽게 죽여야만 했다.
내일까지만 기다리면 돼. 그러니 조금 더 참아야지.
엘르의 비명 소리를 듣고 그는 곧장 달려갔다.
역시나 예상대로 센 공작이 보낸 이들이 엘르의 뒤를 쫓고 있었다.
그림자들은 빠르게 그녀와 속도를 맞춰 정해 둔 장소까지 기척을 숨겼다.
그리고 리온은 뒤를 쫓고 있는 이들을 발견하곤 단번에 그들을 낚아챘다.
생각지도 못한 복병으로 인해 부상을 당하긴 했지만,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
살려 두어야 증거를 채집할 수 있었으므로 숨은 붙여 뒀건만.
“하아, 대체.”
왜들 이리도 가만히 두질 않는 걸까.
리온은 센 공작의 비릿한 미소를 떠올렸다.
엘르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 실망하던 그의 표정, 그리고 목소리까지.
“엘르, 아무래도 나는 약속은 못 지킬 것 같아.”
그녀의 말대로 두고 보려 했다. 저가 너무 나간 것이라고 생각하며, 엘르의 말을 따르려 했지만.
조금 더 지켜보기만 했다가 엘르의 목숨이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이게 마지막일 리는 없다.
통상 함께 있는 사람이 제일 먼저 의심받는 법이다. 누가 같이 있을 때 암살을 시도하겠는가.
센 공작은 그러한 고정 관념을 이용해, 엘르와 함께 있을 때 암살자가 찾아오게 만들 것이다. 자기 자신이 그녀의 죽음에 증인이 될 수 있도록.
리온은 사냥 대회가 끝나는 날, 끝을 낼 생각이었다.
센 공작은 또다시 기회를 만들려 할 것이다.
리온의 붉은 눈동자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제 손목에 선명해진 문양을 보며 더는 동요하지 않았다.
리온은 폭주를 통해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었다.
그때만큼은 문양의 힘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딱, 폭주 직전까지만 가도 문양의 힘이 닿지 않을지도 모른다.
리온은 주먹을 쥐었다 피며 제니스를 떠올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겨우 잠이 든 엘르를 본 그는 막사를 빠져나가려 했다.
겨우 잠이 들었으니, 제가 엘르의 막사로 가는 것이 나으리라.
순간적으로 나타난 기척에 리온이 힘을 쓰려 했다.
“엘르는 잠들었나.”
에드가의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목을 썰었을 것이다.
“……참 빨리 오셨습니다.”
리온은 비아냥거리는 어투로 말했다. 에드가는 별 신경 쓰지 않는 듯 막사 안을 보았다.
“센 공작이 움직인 게 확실한가?”
“그 편이 확률이 높은 것 같긴 합니다. 제니스 황녀도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르지만.”
“……황녀가 연관되어 있다라.”
에드가는 하늘을 보며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역시 어쩔 수 없는 건가.”
그는 내심 제니스가 제 편에 서길 바랐다.
데펠로아도 있고, 제 아내가 그걸 원했을 테니까.
그러나 제니스는 결국 손을 잡지 않았다.
예상하긴 했지만 씁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엘르 역시 그걸 원했기에 제게 제안을 했던 걸 테고.
“어떻게 할 생각이지? 알아서 하겠다더니 설치게 놔두기나 하고.”
“먼저 움직이길 기다렸던 겁니다.”
“엘르가 위험에 처할 걸 모르진 않았을 텐데.”
에드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런 식일 줄은 몰랐지만.”
리온은 오만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사람들이 많았기에 그가 조심할 것이라 여겼다.
아무래도 그는 예상보다 더 초조한 모양이지만.
“황태자가 공식적인 조사는 막을 겁니다.”
“알고 있어. 어차피 공식적으로 해 봤자 그놈들 살려 둘 것도 아닌데.”
그건 그렇지.
리온은 에드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었다. 어차피 죽을 놈들 다른 이들에게 알려 봤자 일만 복잡해진다.
“일단은 이 거지 같은 사냥 대회를 끝내야겠지.”
“아마 그건 안 될 겁니다. 황제가 이 모든 걸 알고 있음에도 중단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니까요.”
황제는 이 기회가 제게 좋게 작용할 것이라 여긴 듯했다.
사냥 대회에서 엘르가 죽어 나가게 되어도 사고였다고 말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어차피 준비는 다 되어 있고, 명분도 얻었으니 괜찮습니다.”
리온은 잠이 든 엘르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렇게 된 거 사냥 대회 우승도 엘르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승?”
“우승자에게 황제가 뭐든 들어준다고 한 모양입니다. 혹시 몰라 사냥감은 이미 엘르 앞으로 달아 뒀습니다.”
선물이 있다고 그곳으로 가 보라고 했지만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 그러질 못했다.
리온이 따로 이야기를 해 뒀기 때문에 엘르의 앞으로 수가 집계되었을 터.
“제니스 황녀가 우승을 하려는 이유는 원하는 게 있어서일 테니까.”
“압니다.”
리온은 그게 저와 관련되어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황제에게 저와의 관계를 말하고 속박할 구실을 만들어 낼지도 모른다.
“빨리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아, 걱정 말게. 밤은 생각보다 기니까 말이야.”
에드가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리온은 막사 앞에 자리를 잡는 에드가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여기서 있을 생각이십니까?”
“그럴 생각이야.”
“……본인 막사로 가시죠.”
“아니, 내가 자넬 뭘 믿고?”
에드가는 엘르가 있는 막사 앞에서 밤을 샐 생각이었다.
“자네는 딴 데로 가서 내일을 대비해.”
저를 쫓아내는 것이 분명했다. 리온은 그 자리에 서서 에드가를 빤히 보았다.
“네놈이 또 엘르가 자고 있는 이 안에 들어갈지 누가 알아?”
“걱정되십니까?”
“아니.”
“걱정되시는 것 같은데요.”
“아니라고 했어.”
그러면서도 리온이 들어가지 못하게 입구를 단단히 막아섰다.
다시 들어갈 생각도 없었지만, 에드가의 행동에 리온은 헛웃음을 삼켰다.